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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Mar 07. 2020

날카로운 첫 발표의 기억

지극히 개인적인 프레젠테이션 준비 노하우

복직 후 첫 세일즈 PT를 마쳤다. 예산도 적었고 비딩 참가 회사도 많지 않아서 부담 가질 만한 건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는 그랬다. 그래서였을까. 연습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스크립트도 장표의 절반에 달하는 정도를 겨우 쓰고는 손 놓았음은 물론 도무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리허설을 할 수가 없었다.


멍을 때리다 PT 중 개까이는 모습을 상상하며 다시금 집중하고 다시 멍 때리기를 여러 번. PT 하다 꼬르륵 소리가 나면 개망신일 거라는 생각에 푸짐한 한상 차림으로 점심을 먹었다.


차로 이동하며 프레젠테이션 흐름을 다시 복귀하고는 발표 장소에 도착했다. 체온을 쟤고 도착한 대회의실, 무려 여덟 명이 앉아있었다. 마른 한숨을 몰래 내쉬었다. 웃음을 장착하고 명함을 건네며 인사를 마칠 즈음, 꿈에서 깬듯했다.


차근차근 발표를 마치자 질문이 쏟아졌다. 피드백에 가까운 질문들은 '수용 80 재고 20'의 비율로 대답해내고 회의실을 나왔다. 담당자는 타 업체보다 우리의 분위기가 훨씬 좋았다며 곧 연락드리겠다고 비행기를 띄어줬지만 탑승하지 못한 채 찜찜한 걸음을 옮겼다.


이전보다 얼마나 준비가 미흡했는가 곱씹으며 돌아오는 길, 내가 스스로 조작한 내 첫 PT의 기억이 떠올랐다. 


흔히 드라마에서 보듯 큰 회의실에서 포인터를 들고 워킹하며 진행하는 스탠딩 PT를 이직하고 2년 정도 됐을 때 처음 했더랬다. 연차에 비해 빨리 얻은 기회였지만 결과가 좋았고 덕분에 다른 기회들도 더 얻을 수 있는 발판이 됐다.


하지만, 그전에 나만 기억하는(나조차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나의 첫 PT가 있었다.


날카로웠던 그 기억은 사실 스크립트도 볼 수 있었고 앉아서 편하게 할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숨이 막혔던 건 사실 '처음'이라는 그 이유 하나였던 것 같다. '첫 키스' '첫 경험' '첫사랑'이 버거운 건 들여다보면 '처음'이라는 이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말이다.



#컨퍼런스콜도 외국 클라이언트도 심지어 PT도 처음이라서요. 


때는 15년 봄. 이 회사에 입사한 지 반년 남짓 지났을 때 중국 모바일 백신 앱 회사에 홍보를 제안하게 됐다. 중국에서 꽤 큰 규모이고 이미 미주 유럽권에 진출은 안정기에 들었으나 아시아에서는 한국 시장을 첫 진출 국가로 정해 기자간담회와 언론홍보 니즈가 있었다.


나의 이전 회사의 동료가 소개해준 고객사로 자연스레 관련 미팅에 동석했다. 영어를 메인으로 사용한다기에 간단한 소개 인사를 준비해 참석했고, 회의가 끝난 후 당시 부장이 나에게 물었다.


"르넷, 영어 좀 해요?"


좀처럼 보기 힘든 부장의 농담 섞인 질문에 웃으며 답했다.


"의사소통 정도는 합니다."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이 말이 내 회사생활의 반환점이 될 거라고는. 회의장을 정리하고 자리에 돌아오니 메일이 한 통 와있었다. 차주 컨퍼런스콜로 진행될 제안서의 프레젠테이션을 나보고 하라는 거였다.


'아, 이번 제안은 버리는 건가?' 싶었지만 차장이 밤늦게까지 제안서를 쓰는 걸 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이내 워드를 열고 A4 3장 반 정도의 스크립트를 썼다.


스크립트를 쓰며 '지금이라도 못 하겠다고 할까?' 하는 마음에 엉덩이를 몇 번이고 들썩거리고는 한숨을 몰아 쉬었다. 본 투 비 예스 걸의 숙명인 걸까, 결국 못하겠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합리화 거리를 찾아냈다.


'그래, 스크립트도 있고 그냥 전화해서 읽으면 되는 거잖아.' 퍼런스 콜이라는 형식에 쾌지를 부르며 마음을 다독인 셈이었다.


인생은 반전의 연속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PT 당일 내 버팀목이었던 컨퍼런스콜이 나를 보기 좋게 무너뜨렸다.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다더니.


내가 컨퍼런스콜 PT를 망친 단계는 5단계였다.


[컨퍼런스 콜 PT를 망치는 비결]

1단계. PC로 스카이프를 하려면 마이크가 있어야 한다는 걸 몰랐다.


2단계. 마이크 연결 후에는 인터넷 덕분에 자꾸 렉이 걸린다.


3단계. 렉 덕분에 Are u there? Can u hear me? 를 한 백번 하며 시간을 뺏긴다.


4단계. 혼비백산하며 랩핑 하듯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이미 멘붕인 상태에서 가는귀를 닫는다.


5단계. 원래도 잘 안 되는 커뮤니케이션이 'Um... Ah... 어... Sorry?.. '로 이어진다.



이러한 체계적 망함은 손가락과 이마에 땀을 증진시켜 마우스가 미끄러지는 등 심각한 부작용을 야기한다. 여차저차 PT가 끝이 나고 자리로 돌아와 미팅 리포트를 쓰는데, 나의 굴욕은 다시 시작됐다.


문제는 녹음파일이었다. 토플을 공부했을 때보다 더 집중해서 녹취파일을 딕테이션을 하는데, 허망한 현웃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얼굴이 붉어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바로 고객사 이름을 말하는 영어+한글로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객사 명은 영어와 숫자의 조합이었는데, 예를 들면 GalaxyS20인 셈이었다. 자꾸 렉이 걸리는 컨퍼런스 콜에 PT를 망쳐 버릴까 두려웠던 나는 혀를 열심히 굴리며 PT 중이었는데, 'GalaxyS Twenty'를 'GalaxyS 이 공'이라고 연이어 말하고 있었다.


심지어 혀를 굴리며 '이 고오옹'이라고 하는 꼴이라니. 스스로가 너무 꼴 보기 싫을 지경이었다. 겨우겨우 회의록을 보내고 다음날, PT를 그지경으로 했는데도 우리와 하겠다는 회신이 왔다. 차장이 제안서를 끼깔나게 쓰긴 했나 보다.


그 녹취파일을 못 들어서였을까. 부장은 그 후로도 컨퍼런스콜과 다른 PT들을 내게 맡겼고 나는 몇 번이나 더 버벅거린 후에야 일정 수준 PT와 컨퍼런스 콜을 진행할 수 있었다.


덕분에 PT를 어떻게 연습해야 할지 나름의 방법이 생겼는데, 인터넷에 나오는 세련된 팁에 비하면

 #있어빌리티가 떨어지지만 그래도 내가 PT에 대처한 방법이었다. 누군가 나처럼 긴장해서 손가락에 난 땀 때문에 마우스가 미끄러질 정도의 초심자에게 도움이 되기를.



# 지극히 개인적인 PT 준비 노하우 


TIP1. 스크립트 말고 스피킹

스크립트를 쓰는 건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심지어 정식 제안은 장표가 100장으로 넘어가기도 하는데, 이러면 스크립트 쓰다 하루가 다가는 셈이다.


그래서 난 그냥 장표를 켜놓고 중얼거린다. 말을 하다 보면 각 슬라이드에서 말해야 하는 키워드가 눈에 더 들어온다. 스크립트를 쓰는 시간에 차라리 한 번 더 그 장표를 말해보는 게 효율적인 것 같다.


TIP2. 발표자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흔히들 발표 현장을 많이 상상하라고 한다. 그 일환으로 리허설을 해보라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힘들 수도 있다.


리허설하는 것도 팀원들의 시간을 뺏는 거니 무작정 여러 번 할 수 없을뿐더러 혼자 회의실을 하루 종일 붙잡고 성에 차는 만큼 연습을 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하고 있는 게 '자기 주문 10번 쓰기'다. 매거진 이름처럼 촌스럽지만 꽤 도움이 된다. 이 습관은 이제 나한텐 거의 징크스가 된 정도로 마음의 안정을 얻는데 꽤 효과가 있었다.


예를 들면, '나는 00PT를 떨지 않고 잘한다.'

'나는 PT를 끝내주게 해낸다.'

'나는 PT를 정말 잘해서 이 프로젝트를 따온다.'


는 식의 남들한테 보여주기에는 창피하지만 직설적인 자기 주문식이다.(그래서 아침 일찍 아무도 없을 때 몰래 수첩에 적거나 한다...)


TIP3. 밥은 든든하게, 간식도 끊임없이

이건 통통(?)한 나의 개취일 수 있으나, 달달 구리와 든든한 한 끼가 필수다. 이상하게 PT를 연습하면 배에 거지가 든 것처럼 꼬르륵 꼬르륵이 알람 울리듯 쉬지를 않는다.



덕분에 노트북 한쪽 옆에는 과자 껍데기가 산을 이루고 오전 PT에는 헤비 브랙퍼스트를 오후 PT에는 한상차림 점심을 꼭 먹는다.


뭐, 떨려서 밥이 안 들어간다는 분들도 있고 나처럼 아묻따 든든히 먹어야 하는 분들도 있을 테니 이건.. 개취로 남기는 걸로.


코로나19로 세일즈 PT도 더러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추세다. 세일즈 자체가 줄어드는 추세고 이로인해 PT도 치열해지는만큼 부디 모두 건강하고 기분좋은 긴장감 넘치는 경험을 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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