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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Feb 23. 2020

아빠와 삶은 달걀

을지로 터줏대감 호찬씨를 가늠하며

고등학생 시절, 나는 일요일 밤 12시 30분이 좋았다.


범생이 축에 속했던 나는 새벽 2시까지 동네 도서관에 다녔는데, 주말도 예외는 없었다. 사실 12시부터는 자의 반 타의 반 엎드려 졸다가 직원의 청소하는 소리에 화들짝 깨는 것이 반사였지만 그래도 나는 새벽 공기를 마시며 집에 오곤 했다. 분명 볼과 이마를 수놓은 벌건 자국이 졸음과의 사투를 여실히 보여줬을 테지만 엄마는 가타부타 말없이 반겨줄 뿐이었다.


아빠는 매주 일요일 자정, 나를 데리러 독서실에 왔다. 운동복에 슬리퍼를 신고 담배를 한 대 물고는 독서실 건물 1층에 서있는 아빠가 나는 좋았다. 지금 보니 엄마가 일요일에는 본인도 쉬자며 등 떠밀어 보낸 거였겠지만 아빠가 나를 기다린다는데 괜히 우쭐하곤 했다.


아빠는 그 시대의 아버지보다 가정적이었다. 바쁠 때는 며칠씩 집에 못 들어오기도 했지만 겨울에는 격주로 스키장을 여름에는 바닷가를 가는 식으로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가족과의 시간은 아빠 개인의 노력만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더라. 모두가 힘들었던 IMF가 지나고 아빠는 직원들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투잡으로 노래방을 시작했다. 낮에는 인쇄소를 밤에는 노래방을 하는 아빠를 나는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볼 기회가 없었다.


일요일 밤 열두 시는 그런 아빠가 나를 데리러 오는 시간이었다. 집까지는 기껏해야 10분 정도였지만 우리는 코스처럼 집에 와서 계란을 삶아 먹곤 했다. 전라도 깡촌 출신의 아빠는 상경하는 기차에서 사람들이 먹는 삶은 달걀이 너무 부러웠다고 했다. 그래서 아빠의 최애 간식은 삶은 달걀이고 줘도 안 먹는 음식은 수제비라고 했다.


'우우~ 워우~ 우우! 우우!'

당시 최고의 미드 CSI 주제가를 들으며 아빠와 난 계란 껍데기를 깠다. 어서 자라, 이 시간의 웬 계란이냐는 엄마의 잔소리가 들려왔지만 둘 다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매주 일요일 밤, 아빠와 삶은 달걀이 나의 안식처였다.


15년이 지난 지금, 출근하기 싫어 발버둥 치는 일요일 자정에 아빠를 떠올린다. 주중 내내 아침저녁으로 일하며 자식을 위해 매주 일요일 새벽 딸을 마중 나오던 아빠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15개월 딸아이를 키우는 요즘 조금은 가늠이 되기 시작했다. 이제 3살짜리 아이를 키우면서 아빠의 마음을 헤아린다 하기 우습지만 일요일 자정 아빠가 느낀 마음은 감사 아니었을까.


존재 자체가 감사한 존재. 그것은 자식이었다.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반려자도 결국 서로 오가는 마음의 효용가치가 관계를 지속한다. 하지만 오로지 주는, 일방적 마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존재, 자식.


본능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마음의 경제학을 체득한 우리가 전혀 다른 차원의 셈법을 경험한다는 것. 그건 감사한 일이었다. 그래서 난 15년 전 아빠가 일요일 자정마다 느꼈을 마음이 감사라고 예단한다.


15년이 지나 환갑을 바라보는 아빠는 여전하다. 다크서클만 남긴 노래방은 정리했지만 여전히 본업인 인쇄소와 당구장을 겸업한다. 이제는 자식들도 다 자기 앞가림을 한다지만 미래의 본인 앞가림을 위해 멈출 수 없다 한다.


아빠는 2주에 한번 꼴로 월요일 아침 우리 집에 온다. 손녀를 보고 싶어서다. 아직 뛰어다니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손녀와 놀기 위해 출근길 아침 짬을 내 40분 거리의 우리 집을 온다.



와서도 기껏해야 '요놈 봐라' '허허, 이제 다 컸네 다 컸어' 몇 마디 하는 게 다면서, 또 다시금 손녀를 보러 온다.


아직 손주가 없는 나는 예단은커녕 가늠도 안 되는 그의 마음을 언젠가 잰걸음으로 추측해보겠지. 그때를 위해 할아버지와 딸아이의 순간을 사진을 핑계 삼아 각인해본다.


아빠가 30년 넘게 지킨 을지로 골목을 출근시간 매일 지난다. 덕분에 사뭇 아빠가 많이 떠오르기에 내일도 어김없이 떠오를 아빠를 가늠하며. 출근하기 싫은 일요일 밤 마음을 달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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