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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Feb 19. 2020

사장님이 AE의 뜻을 물었다.

업을 정의한다는 것, 신기루 같은 것.

"르넷, AE가 무엇의 약자인지 아나?"


노트북을 두들기며 고객사에 넘길 플랜을 쓰던 나에게 사장님이 물었다. 이런, 너무 티를 내며 다른 짓을 하고 있었나. 그랜드볼룸 라운드테이블에 둥글게 둥글게 앉아있던 전 직원의 눈이 나에게 향했다.


물론,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대학교 전공 필수 시간 첫날에 배우는 단어 아닌가. Account Executive.


하지만 난 그 순간 답하지 못했다. 워크샵 내내 당장 이틀 뒤 예정인 일본 출장 계획서를 써 내려가고 있어서였을까.  꼭 이렇게 바쁠 때 워크샵이라며 툴툴 불평 거리고 있어서였을까.


신입도 알만한 질문에 '모르겠습니다.'라고 짧게 답한 뒤 다시 노트북을 쳐다보는데, 사장님이 말했다.


"Account Executive, 프로젝트의 중역 이란 뜻이죠.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역할이 중역에 버금간다는 의미입니다."


쏟아내던 타이핑을 이내 멈추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마치 '너는 네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라며 돌려 까기를 당한 느낌이었다.


현업에서 AE의 뜻은 다양하게 정의된다.


Almost Everything의 약자를 딴 데서 유래했다는 말부터 '아(Ah), 이것도 제가 에(Eh) 이것도 제가?'의 약자라는 말까지. 좋게 말해 프로젝트의 A부터 Z까지 모두 핸들링해야 하고 쉽게 말해 프로젝트의 잡부가 된 것 같은 자괴도 꽤나 들기도 하는 듯하다. 이쯤 되니 근원적인 물음이 생겼다.


업(業)을 정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정확히는 가능한가. 개발자의 ‘업’은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 같고 디자이너의 ‘일’은 새로운 미적인 물체 혹은 존재를 만들어내는 일 같은데. 과연 나의 ‘업’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셈인 우리네 업무 환경을 조롱하듯 만든 AE의 정의 말고, 정말 AE가 하는 일은 뭘까. 한 발짝 물러서 드라이하게 AE를 정의하자면 ‘PR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사람’ 정도일 텐데, 무언가 부족하다. AE로서 내가 주로 하는 일을 정리하면 아래처럼 뭔가 많은 것 같으니까.   


    고객사 / 경쟁사 모니터링   

    고객사 월간 PR 플랜 작성  

    보도자료 작성   

    미디어 미팅   

    기획 아이템 발굴 및 피칭  

    월간 결과보고 작성   

    기자간담회   

    인플루언서 콘텐츠 집행  

    인플루언서 파티 집행  

    유가 광고 집행  

    온라인 커뮤니티 체험단 이벤트  

    브랜드 SNS 채널 운영  

    신규 세일즈   


이쯤 정리하니 더 혼란스럽다. 난 누구 여긴 어디 같달까. 내가 하는 일이 내 업에 포함은 되겠지만 내 업무가 업을 설명하기는 역부족이다. 프로젝트에 따라 업무 스콥이 다르고 중시하는 가치가 다르니까.


그렇다면 내 업을 명확히 아우르는 정의는 가능할까. 아직 업을 규정하기에 짬이 부족한 나이기에, 이대로 포기할까 하던 중 프라다의 로고 플레이를 봤다.


(출처 : prada official 인스타그램)


요즘 명품 브랜드를 중심으로 활발히 집행되는 캠페인인데, 로고를 다시 제품에 크게 박고 브랜드 가치를 팔겠다는 취지로 행해지고 있는 듯하다. 가성비에서 가심비로 넘어가는 전환점에 브랜드 로고가 소비자에게 가격 대비 가치를 제시하도록 하고자 함 아닐까.


유독 프라다의 로고 플레이 중 인스타 캠페인이 눈에 띄었는데, PRADA 브랜드 명을 가지고 5 행시를 하는 콘텐츠였다. '언제 적 5 행시야' 하면서도 눈이 갔던 건 그 5 행시가 매번 다른 단어와 이미지로 구성된 콘텐츠로 집행되지만 결국 프라다의 2020SS 캠페인의 메시지와 연결되어 있어서였다.


캠페인의 메시지를 다섯 글자 키워드로 전하다니. 욕심내지 않고 간결해 멋졌다. 오히려 선택과 집중을 하니 더 핵심에 가까워지는 아이러니 같달까.


나도 비슷하게 접근해보고 싶었다. 어떤 프로젝트든 캠페인이든 기본적으로 누구나 고민하게 되는 업무 스텝은 뭘까. 여러 이해관계자들과 상호작용하며 프로젝트의 A to E를 수행하는 PR AE.


AE의 '업'이 프라다만큼은 아니어도, 5가지 키워드로 정리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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