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첫날의 일기
월드컵 열기가 뜨겁던 2002년 여름이 지난 가을, 22살이던 때의 여행 일기를 바탕으로 여행기를 적습니다.
여행사에서 예약해 준 비행기는 일본을 경유하는 티켓이었다. 옆자리에 탄 한국인은 내 또래즈음의 남자였다. 그와 어떻게 말을 시작했는지, 그리고 도착한 나리타 공항에 내려 호텔로 향하는 길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잘린 필름이 되었다. 이어진 필름 속 장면은 이런 거다.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공항 근처 호텔까지 그와 함께 찾아가게 되었다. 너도 초행길, 나도 초행길. 어찌어찌 헤매가며 체크인을 하러 둘이 나란히 데스크에 섰다.
"원 베드 룸?"
프런트 직원은 우리를 번갈아 보며 방 하나면 되냐고 물었다. 오 마이 갓! 무슨 큰일 날 소리를.
손부터 휘젓고 있는 나보다도 한 발 더 빠르게 내 옆에 있는 남자가 "노"라고 외쳤다. 얼굴에 '순진함'이 써져 있던 우리 둘은 적잖이 놀랐다. 다급히 노노를 외친 덕에 우리는 '투게더'가 아닌 마주 보고 있는 각자의 방으로 체크인할 수 있었다. 그와 저녁을 함께 먹고 방으로 돌아왔다. 창 밖은 어두웠다.
혼자 있는 호텔방이라니,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고요했다. 외로움이란 이런 건가? 외롭다는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던 지난 시간을 새삼 깨달으며 이내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집에서도 방에 불을 켜고 잘만큼 겁이 많은 나였다. 장롱에, 침대 밑에, 큰 창 밖에서 머리 푼 일본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잠은 다 잤네. 눈을 감을 수 있어야 말이지."
서랍에서 가지런히 놓인 티 중 하나를 꺼냈다. 바스락거리는 종이를 찢었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잠시 티를 담갔다. 향긋한 허브향이 코에 닿자 조금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호로록 한 모금 삼켰다. 차가운 10월 가을밤에 퍽 잘 어울리는 따뜻함이었다. 몸은 노곤한데 잠은 오지 않는 밤. 처음 겪어보는 장기 비행, 처음 가족과 한 달 이상 떨어지는 시간, 처음 스스로 모든 걸 해야 하는 상황. 잔뜩 놓인 처음 앞에 걱정, 긴장, 설렘이 한데 엉켜 피곤한 몸 상태에도 이상하리만치 정신은 계속 또렷해졌다.
'영국으로 유학 간다는 노군도 잠을 못 자고 있으려나? 얘기나 하자 할까?'
이것을 진지하게 고민한 걸 보면 나는 참 순진한 아니, 조금 덜 떨어지는 여대생이었다. 그는 나만큼이나 순박한 얼굴을 가진 유학생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새벽에 남자방을 노크하는 건 좀 아니지.
일본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13시간의 비행은 먹고 자고 가스를 채우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앞사람 좌석 뒤에 붙은 화면을 통해 비행기가 날고 있는 위치를 확인하고, 창 밖을 바라보기를 수십 번. 설렘이 몽글몽글 잔뜩 뭉친 뽀얀 구름처럼 차오르기 시작했다. 고개를 쑤욱 빼고서 내려다본 창 밖으로 마치 네모난 잔디밭 같은 육지가 보였다. 화면 속 지도를 보니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였다. 드디어 다 와간다! 이제 한 번 더 바다 위를 지나 보이는 육지는 나의 도착지인 런던이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빠져나오기까지 내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계속 숫자를 더하며 떠있었다. 세관 신고가 뭐지? 잘 도착했다고 엄마에게 전화해야 되는데 공중전화는 어떻게 이용하는 거지? 영어 실력이 형편없다 보니 궁금증을 시원하게 해소할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손 안의 번역기인 스마트폰이 없던 세상이었다. 더군다나 해외여행조차 처음이었다.
설렘과 긴장이 그려진 얼굴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나와 비슷한 표정으로 함께 걷던 노 군은 나보다 훨씬 사정이 좋았다. 유학원 측 사람이 노군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그를 반겼기 때문이다. 그는 안도의 얼굴을 하고서 내게 안녕을 고하고 그 직원을 따라나섰다. 부러웠다. 이제부터 나는 정말 모든 걸 스스로 해야 했다.
소매치기로부터 나의 짐을 지켜야 한다며 결연한 마음가짐으로 10킬로 가방을 메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사용료도 냈다. 좁은 화장실 칸에서 여권과 현금 같은 것들을 고이 챙기고 이런저런 짐들을 정리했다. 다시 화장실 문을 열고 왔을 때는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화장실 앞에서 돈을 받던 직원이 손을 허리춤에 얹고 경직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맞아, 너무 오래 있긴 했어.
무엇 하나 쉬운 건 없었다. 지하철 표를 사는 것도. 지하철에 내려 숙소까지 찾아가는 것도. 유스호스텔의 문을 여는 것도. 체크인을 하는 것도. 내 방을 찾아가는 것도 말이다.
지하철에서 내리니 이미 바깥은 어두워져 있었다. 골목 속 무리 진 남자들이 나를 보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옷깃을 여미며 종종걸음으로 겨우 예약된 유스호스텔을 찾았다. 이제야 따뜻한 공간에서 쉴 수 있겠구나 하고 커다란 숙소 문 앞에 섰는데 문이 안 열린다. 어떻게 여는 걸까? 유럽은 문 여는 방법도 다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들어가는 누군가를 따라 숙소로 들어섰다. 낯설지만 밝고 따뜻했다. 몽롱한 정신으로 데스크 앞에 섰다. 직원의 안내사항을 듣고 나는 더 몽롱해졌다. 꼬부랑 말, 뭐라고 하는 건지. 키를 내어주며 방 번호를 적어 주는데 적힌 숫자가 이상하다
이거 도대체 무슨 숫자인가. 이 무슨 본 적 없는 숫자인가 말이다. 복도에 돌아다니는 다른 투숙객에게 물어 이 숫자의 정체는 7이라는 것을 알아내어 겨우 방을 찾을 수 있었다. 3층에 있는 방에 간신히 도착한 뒤 가방을 내려놓자 추위와 피곤이 다시 몰려왔다. 따뜻한 우유 한잔이 절실했다. 그것을 마실 수 있는 방법은 알 수 없었다. 유스호스텔을 잠시 둘러보려는데 어질어질했다. 출발 전부터 있었던 감기기운이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에 오롯이 혼자다. 영어를 못해도 유럽 배낭여행 혼자 가도 된다고 얘기하던 사람들을 불러다,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영어 안 돼도 혼자가도 좋다고 얘기했던 사람들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한 외국인이 말을 걸어왔으나 알아듣기도 힘들다. 차근차근 얘기는 계속하는데 뭐라는지. 가뜩이나 정신없어 죽겠구먼. 춥다. 확신하건대 여기 동양인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구경이고 관광이고 여행이고 나발이고.
"다시 비행기 타고 집에 오고 싶을 걸."
라고 말했던 배낭여행 선배의 말이 딱! 정말 딱! 진짜 농담 아니게 딱! 와닿는 순간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며 너무나 예쁘네 어쩌고 할 때는 정말 시작도 아닌 거였다. 한국인과 계속 같이 있었던 탓인지 혼자인 게 적응이 안 되고 막막하기를 끝이 없다.
세면대는 어디며? 내 귀중품을 어디에 보관해야 되는지? 아무것도 알 수도 없는데 물어볼 수도 없다. 그냥 목도 아프고 콧물도 나고 어지럽다. 열나는 몸으로 오늘 관광할 곳을 찾기 위해 책을 한 짐 짊어지고 나섰다. 공부할만한 곳을 찾기 위해.
시선들...
한국에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던 나를 여기서도 느낄 수 있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이곳에서조차. 지금 나의 행동이 저들이 보기에 이상한 건 아닐까? 여기 이대로 컴퓨터 사용도 하지 않으면서 앉아 있어도 되는 걸까? 걱정하고 고민하고 있는 내가 바보 같다. 앞으로의 나는 적어도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니, 그런데 왜 다들 맨발로 다니는 거야. 오기 전의 걱정보다 훨씬 더 힘들고 오기 전의 자신감, 비행기 안에서의 자신감은 다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