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학년 학부모님 안녕하십니까?
3학년 기말고사 기간 학부모명예감독 신청과 관련하여 부탁 말씀을 드립니다.
수요일 3명, 목요일 1명의 학부모 감독님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희망하시는 분은 교무실로 신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학부모님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올해 중학교의 입학한 딸아이의 1학기 첫 시험 때 명예감독관 신청을 했었다. 신청 인원이 많다며 노땡큐의 회신을 받았다. 1학기 기말고사에는 인원이 부족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중간고사 때 한 번 해본 어머니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모두 도망가신 걸까? 그때는 일을 하고 있었기에 불가능하다는 답신을 할 수밖에 없었다.
1학년인 딸아이는 자유학기제로 시험이 없다. 거기다 10월 말의 이토록 빠른 기말고사는 중3들에게만 해당되었다. 나는 마침 일도 쉬고 있었고, 애잔한 마음으로 이따금씩 내 가슴을 두드리는, 인연 있는 중3 아이가 생각이 났다.
45분씩 세 번. 휴대폰은 물론이거니와 책도 손에 들지 못한 채, 꼼짝없이 자리에 앉아 앞을 주시해야 하는 일이 조금 걱정되긴 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마침, 나는 시간이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단아한 복장의 선생님은, 익숙한 몸짓과 말투로 열두 명의 학부모를 향해 말했다.
"아, 이번이 마지막이라 앞으로 여기 계신 분들을 못 뵐 거라 생각하니 눈물 날 것 같고 많이 아쉬워요. 여기 계신 분들의 자녀분들은 꼭, 가고 싶은 고등학교로 갈 수 있기를 제가 바라고 또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처음이었지만, 아마도 단골 명예감독관들이 많았으리라.
시험을 앞두고 긴장하는 아이들만큼은 아니겠지만 어색하고 긴장된 기색으로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교실의 맨 뒤쪽에 준비된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45분 동안 앞만 바라보고 있으면 될 일이었다.
갓 입대한 이등병 같은 정자세로 앉아 시험지를 나누는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분명 다정하게 말하고 웃음 지을 것 같은 앳된 그녀는, 사뭇 단호한 어조로 목소리에 힘을 주어 아이들에게 주의사항에 대해 말했다.
시험시간 10분이 지나자 엎드리는 아이가 보였다. 20분쯤 지나자 또 다른 아이가 팔을 베개 삼아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얘들아, 번호라도 찍고 자는 거지? 아는 만큼은 풀어야는데 아는 거는 다 푼 거 맞지?'
신체의 급한 신호를 받은 아이는, 시험도중 화장실을 찾았다. 그 아이 덕분에 지겨워 몸에 베베 꼬일 지경이었던 나도 함께 교실 밖을 나설 수 있었다. 여자친구를 화장실에 들여보내고 가방을 들고 기다리는 남자친구 마냥, 남자 화장실 앞에서 화장실을 간 아이를 기다렸다. 덕분에 스트레칭도 하고 다른 반 학부모들은 어찌 앉아서 버티고 계시나 곁눈질도 슬쩍슬쩍 할 수 있었다.
30분쯤 지났는데 친구 한 명이 교실로 들어와 빈자리에 앉았다. 실내화도 아닌 운동화를 신은 채로 그 친구는 자리에 반쯤 걸터앉았다. 180쯤 되어 보이는 큰 키에 체격이 좋은 그 아이는 어쩐지 책상과 어색한 사이처럼 보였다. 시험지를 뒤적이는 기색도 없다. 문제를 읽는 시늉도 하지 않는다.
'너... 찍기는 할 거지? 답안지 작성은 할 거지? 고속도로라도 밀고 나가야지! 3번 또는 4번으로 줄이라도 세워 마킹해야지.' 마음속으로 안타까운 말을 내뱉어본다. 지겨움이 극에 달해 조용히 몸을 일으켜 얼핏 그 친구의 시험지를 내려다보니 다행히 시험지에 올곧은 점선이 그려져 있었다.
열중하는 상체와 딴 세상인 듯 책상 아래로 늘어트려진 다리들. 한 아이가 다리를 떨기 시작하면 마치 박자를 맞추듯 다른 아이도 다리를 떨기 시작한다. 다리들의 소리 없는 연주는 끊어질 듯 이어지며 화음을 더해간다.
책상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이고 굽은 등으로 시험에 열중하는 아이들. 나는 또 주책맞게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진다. 숙여진 아이들의 머리 위에 저마다의 '가능성'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교실 창문을 통해 교실을 환히 밝히는 햇살처럼, 나의 눈에는 분명하도록 그렇게 보인다. 빛나고 찬란한 가능성이.
종이가 '나 넘어가요' 하며 내는 사그락거리는 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헛기침만이 열기 어린 공간을 채웠다.
디지털 디톡스. 스마트 폰의 짧고도 강력한 재미에 빠져 들 수 없는 시간. 시험지라도 풀고 싶어진다. 아이들의 뒤통수에서 옮겨지는 시선이 아이들의 가방으로 가 닿았다. 디스커버리, 노스페이스, 코닥, 내셔널지오그래픽. 색깔은 대체로 검정. 옆에 붙어 달랑거리는 인형이 꽤 귀엽다. 가방 그물 포켓에 꼽힌 우산을 보면서 생각해 본다.
'비 소식 없이 이렇게 맑은 날에 우산을 챙겨 온 너는, 갑작스레 내린 비에 쫄딱 젖어 봤나 보구나. 아니면 준비성이 아주 좋은 아이거나. 혹시 거기 우산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빼지 않았을 뿐일지도 모르고 말이야.'
중학교 3학년 2학기의 기말고사는 지금 당장은 너희에게 중요할 거야. 하지만 30년쯤 뒤라면 어떨까? 이 시험의 결과는 단 한 과목의 점수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별일이 아닌 게 되겠지. 혹시라도 오늘의 시험을 망치더라도 너희는 분명히 꽤 괜찮고 멋진 어른이 될 거야. 이 아줌마가 지금 너희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내면이 단단하고 행복한 어른이 되기를 바라며, 반드시 그렇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