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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 Jan 02. 2024

9. 꿈이 생겼다

해가 바뀌어도 진행형인 소음 지옥.

마음을 다지며 버텨 보려 애쓰고 있지만, 그럼에도 벅찰 때를 위한

계속해서 살아 나가기 위해 쓰는 소음 일지.




<2023년 12월 8일, 금요일>

나는 고요와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런 환경에 최적화된 성격의 소유자다.


그러나 현재의 환경이 그것을 뒷받침할 수 없고, 또 한동안 어려울 것 같다면 그런 나의 모습은 잠시 내려놓고 지금에 적응해야겠지.


생각해 보니, 어려서 살던 집의 경우 이모가 살고 있던 위층에서 나는 소음은 거의 없었고 이모네 강아지가 내려오면 그저 좋기만 했다. 그 사이에도 몇 차례 거처를 옮겼지만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는 층간 소음으로 좀 짜증이 난 적은 몇 번 있었어도 고통받은 적은 없었다. 꽤 운이 좋았구나, 나.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널뛴다. 어떻게든 적응해서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가도 '쿵' 소리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고. 다시 마음먹었다가도 '다다다다' 소리 한 번에 날이 서고.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다.




<2023년 12월 9일, 토요일>

주말이 두려워 종일 집 밖을 돌아다녔다.


일주일 전부터 하루를 꽉 채워 일정을 잡아 놓고, 오늘만 기다리며 살았다. 퇴사한 이래로 이렇게 주말을 기다려 본 건 또 오랜만이다.


아침에 집을 나서 밤에 들어갔다.

내일은 계속 집에 있어야 하는데. 견딜 수 있을까.




<2023년 12월 10일, 일요일>

예상은 쉽사리 틀리지 않는다. 오전부터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온 가족.


오전 내내, 세 시간쯤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정오쯤 슈퍼로 도망쳤다. 집에 들어오니 점심을 먹으러 나갔는지 무척 조용했다. 몇 시간은 좀 살겠다 싶었지만, 한편으론 '점심 먹고 돌아오면 다시 시작되겠구나'하는 절망감에 관자놀이에 홧홧한 감이 느껴졌다.


다시, 예상은 잘 틀리지 않는다. 세 시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각, '우당탕탕쾅쾅쾅'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도 가라앉지를 않길래 경비실에 전화를 걸어 말을 좀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안녕하세요. 00동 00호입니다. 윗집에 말을 전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어요.'

'아, 많이 시끄러운가요?' (여기에서 속으로 빵 터졌다. 오늘 층간 소음으로 경비실에 전화한 집이 많았나 보다)

'아, 예. 원래 좀 나긴 하는데, 오늘은 좀 힘들 정도라서요. 뭔가 깔든 신든, 조치를 좀 취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다고 전달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알겠습니다.'


*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때 경비 아저씨는 윗집에 전화해서 그냥 '아랫집에서 시끄럽다네요'라는 한 문장만 전달하셨다고 한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연락을 받고도 저렇게 뛰는 거면 좀 더 많이 열받는데 말이지.


소파에 앉아 있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잠시 자리를 피했다. 10분쯤 후, 다시 돌아오니 갑자기 아파트 전체 방송이 흘러나온다. 층간 소음 관련 방송이다. 다시 속으로 웃었다. 주말을 맞아 층간 소음에 시달리는 집이 많은가 보다. 이렇게 평소에 방송 않던 뜬금없는 시간에 전체 방송을 내보내는 걸 보니.


남편과 함께 영화를 보러 나갔다. 보고 싶던 영화기도 했지만, 집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영화를 보면서도 현관에 쪽지가 붙어 있지는 않을까, 영화를 다 보고 집에 들어가도 여전히 전혀 나아진 바 없이 똑같은 '쿵쿵쿵쿵'을 듣게 될까, 우려되는 마음에 오롯이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나쁜 예감은 잘 틀리는 법이 없지. 이번 주 평일에 나는 그래도 꽤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오만했다. 저녁을 먹으며 들리는 진동음에 남편에게 미소조차 지어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스트레스를 받고 나니 이제 스트레스를 느낄 기력조차 없었다.


11시가 되니 아이가 자는지 발소리도 멈추었다. 

매일 아침, 저녁, 주말을 어떻게 이렇게 사나.


과도한 감각적 자극과 그로 인한 부정적 감정에 온 신경이 쏠려, 일은 고사하고 연말을 맞아 한 해를 돌아보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2023년 12월 11일, 월요일>

평일의 패턴은 얼추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이른 시간부터 충격음이 시작되었다.


저렇게 어마어마한 에너지로 뛰는 아이를, 부모는 대체 왜 말리지 않는가. 그래, 뛸 수 있다. 아이가 뛸 수도 있지. 하지만 제지는 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 운동장도 아니고, 어떻게 계속 뛰어. 계속.


매트 깔 거라고 그때 분명히 얘기했는데, 대체 언제 깔려나. 매트 시공해도 발망치 소리가 다 잡히는 것도 아니라고 하던데. 그래도, 적어도, 천둥소리에서 공 소리로 강도라도 조금 낮아지지 않을까. 유일한 희망.


오전에 유튜브에서 층간 소음과 관련한 이런저런 영상을 보다가 <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에서 올해 방영한 층간 소음 영상을 봤다. 그 방송을 그대로 윗집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방송에 나온 피해자분이 플레이한 그 소리를 우리도 그대로 듣고 있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쉴 새 없이 고막을 진동시키는 소리에 네이버에서 부동산을 검색했다. 지금껏 딱히 꿈이랄 게 없었는데, 이제 확실히 생겼다. 단독주택으로 이사 가는 것. 이제 그게 내 꿈이다.


이른 저녁 시작된 소리는 저녁 10시가 되도록 끊이지 않았다. 내일 마감인 작업이 있어 오늘 밤에는 일을 좀 해야 하는데. 집중도 안 되고, 속은 답답해 터질 것 같고, 귀도 아프다. 위층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쿵쿵쿵 하는 소리가 나는 듯한 느낌에 심장이 더 벌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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