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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Jan 22. 2022

애양원 교회와 함께 기억해야 할 사람들

[등록문화재 산책] 애양원과 애양원 교회


<등록문화재는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 중 50년 이상이 지난 것으로서,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특별히 필요하여 등록한 근대문화유산이다. 우리가 지금껏 살아왔던 삶의 공간이 역사의 현장으로 인정받은 근대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미래의 중요 문화재로 남게 될 등록문화재를 찾아 근대의 시간 속으로 산책하며 글을 쓴다>



여수 여행 길에서 만난 애양원 교회를 통해 이 땅의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헌신한 서양 선교사들과 손양원 목사의 삶을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애양원 교회와 애양원은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치유와 구제를 위해 시대적 역할을 다해 왔다. 서양인 선교사들에 의해 만들어졌던 애양원과 애양원 교회라는 서양식 건축물이 이제는 우리의 근대문화유산이 되었다. 이곳에는 서양인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한센병 환자들의 치료와 돌봄의 정신이 흐르는 곳이다. 또한 환자들을 기독교로 인도하기 위해 세운 교회에서 후일 손양원 목사가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순교할 때까지 지켰던 곳이기도 하다.


여수공항 담벽락을 돌아 나오면 시골마을의 고즈넉한 풍경이 다가온다. 교회로 가는 길옆으로 이어지는 소나무는 정겨움을 더해 주었다. 안내 표지판에 따라 교회에 도착하여 보니 석조의 고딕식 예배당 건물이 나타났다. 정면의 석조 벽면에 '애양원예배당' 을 한 글자씩 새긴 하얀 돌판이 박혀 있다. 교회 앞의 언덕 위에는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했던 애양원 건물이 있다. 지금은 애양원 역사관으로 고쳐 이곳에서 환자들을 치료한 지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1.애양원 교회 전경. 2.교회 전면부 3.손양원 목사 순교기념비 4.명심대 석판(시계방향)

교회 앞 정원에는 손양원 목사의 순교기념비가 서있다. 계단 올라가는 옆면에는 '명심대'란 글이 새긴 석판이 붙어 있다. 우월선 선교사가 이 언덕을 명심대라 불렀다고 한다. 병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므로 병을 고치려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여수 애양원교회는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에 세워진 교회이다. 한 때 성산교회로 이름을 고쳐 부르기도 하였으나 2016년 다시 애양원 교회로 고친 이곳에서는 지금도 교인들의 기도가 이어지고 있다.

1.애양원 교회 등록문화재 지정 동판 2. 애양원 역사관 등록문화재 지정 동판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를 인정하여 2002년 5월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지정 당시 '여수 구 애양원교회'의 등록문화재 등록번호는 제32호였다. 교회 맞은편에 있는 '여수 애양병원'(현 애양원 역사관) 건물은 등록문화재 제33호이다. 등록문화재 제도 실시 후 꽤 빠른 시기에 지정된 것을 알 수 있다.(2021년 11월부터 문화재의 지정번호제는 폐지되었다)

     


 애양원 역사관 360도 사진 

- 화면에 마우스나 손가락을 대고  이리저리 움직이면  360도로 볼 수 있습니다.



<애양원과 애양원 교회>

애양원 교회는 애양원에서 시작되었다. 애양원은 우리 땅에서 처음으로 한센병 환자를 치료한 병원이다. 목포에서 활동 중이던 포사이드 (W.H. forsythe) 선교사가 1909년 동료 선교사를 치료하기 위해 광주 제중원(현 광주 기독병원)으로 오던 중 남평 부근에서 여자 한센병 환자를 발견하여 데려와 치료한 것이 동기가 되어 설립하게 된다.

영화 벤허에서 한센병 환자들이 이웃으로부터 버림받아 주거지역에서 쫓겨나 동굴 등에서 집단 거주하다가 예수에 의해 깨끗해지는 장면이 나온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행적 가운데 한센병 걸린 사람이 깨끗이 나아 구원받은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리라. 이렇듯 한센병 환자의 치료는 기독교의 사랑을 실천하는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성경의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행동을 실천한 포사이드 선교사의 참다운 사랑에 감동을 받은 우월순(Dr. R. M. Wilson, 당시 광주 제중원 원장) 선교사는 한센병 환자 구제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고 이웃들에게서 내쫓긴 후 무리 지어 거리를 배회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한센병 환자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1910년 미국 남장로교의 재정지원으로 광주에 한센병 환자를 위해 세워진 치료소로 시작하였다. 1911년에는 전라도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 광주 나병원을 건축하였다. 한국 최초의 나병원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한센병은 완치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했다.     

또한 환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에 봉선리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교회가 여수로 옮겨가 지금의 여수 애양원 교회가 된다. 1913년에는 한센병 환자 집단 거주지가 만들어지고 1919년에는 환자들의 자녀를 위한 초등학교를 설립하였다. 이곳이 환자들에게는 그들만의 거주지이기는 하지만 치료뿐만 아니라 가정을 이루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던 그들에게는 정말 천국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의 헌신적인 선교사들의 사역은 큰 영향력을 끼쳐 이후 정부가 주도하여 한센병 환자 집단 거주지를 만들게 하는 등 환자들의 치유를 위한 조치들이 이어지게 하였다. 봉선리 한센병 환자촌은 1926년까지 운영되었다.

한국 최초의 나병원인 광주나병원은 주민들의 반대로 더 이상 광주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 1925년 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에 터를 마련하고, 1928년까지 단계적으로 이주하여 한센병자 600여 명이 옮겨왔다. 초창기에는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비더울트 나환자 수용소' 라 하였다가 1935년 환자들에게 새 이름을 공모하여 애양원으로 채택되었다. 이때부터 광주에서 옮겨온 교회도 '애양원 예배당'이라고 부르게 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1967년에 재단법인 애양원 병원은 여수애양재활병원으로 개칭하고 애양원 병원 근처에 현대식 병원을 새로 건축하였다. 이곳에서는 일반 지체장애자와 한센병 환자를 함께 재활 수술하게 된다. 1988년에는 사회복지법인 애양원으로 변경되었고 병원명은 ‘여수 애양병원’으로 고쳤다.

이렇게 되기까지 처음 한센병 환자를 외면하지 않았던 포사이드 선교사와 이후 32년간 환자들의 병 치료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 헌신한 우월순 선교사를 비롯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나눔과 희생정신이 있었다. 이들에 대한 고마움은 호남의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와 사람들에게, 더 나아가 한국인 모두의 마음속에 면면히 전해지고 있을 것이다.

애양원(현재 애양원 역사관)과 애양병원 소개

새 여수 애양병원이 세워진 후 구 애양원 병원 건물은 한동안 양로원으로 사용되었다. 1999년에 개보수하여 2000년 6월 ‘애양원 역사관’으로 개관하여 한국의 초기 선교 의료 활동을 알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2014년에는 역사관 뒤쪽에 ‘애양원 한센기념관’을 신축하여 한센병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역사관에 들어서니 마치 병원에 온 것처럼 느꼈다. 병원의 분위기가 그대로 살려 개보수를 한 듯하다. 정해진 동선을 따라 걷다 보면 애양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관임을 알게 된다. 당시에 사용하였던 수많은 의료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어 한국의 초기 서양의학 기술을 엿볼 수 있었다. 당시에 헌신하였던 의료진과 환자들의 생활상도 전시되어 당시의 모습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의료진들이 불치병이라 여겼던 한센병 치료를 위해 얼마나 큰 사랑을 행했는지를 느끼게 하는 현장이기도 하였다.          

이 역사박물관 맞은편에는 석조 건축물인 애양원 교회가 우뚝 서있다. 1909년 한센병을 치료하면서 환자들을 전도하는 교회를 시작하여 1912년 봉선리 교회가 되었다. 환자와 선교사, 의사의 신앙적 터전이었던 교회는 여수로 옮긴 애양원의 부속 전도실로 출발하였다. 수용된 환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하여 1928년 2층 규모의 석조 건물인 예배당이 준공되었다.

1.교회 전먼부 2.2층 예배당 입구 3.교회 연혁 4.교회 내부

이 건물은 증개축으로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지 않고 있으나, 석조에 의한 기본골격과 창문의 형태 등 전체적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예배당은 일제강점기에 서구인 선교사에 의해 지어진 여수의 독특한 건물로 눈길을 끌었다. 마치 유럽의 시골 마을에 있는 꽤 규모 있는 중세 고딕식 교회인양 느끼게 한다.  

   


예배당 내부 360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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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에 화재로 전소하여 골조만 남게 되었는데 다음 해에 장방형 형태의 교회 건물로 중건하여  현재 모습의 원형이 된다. 교회 건물의 외벽은 석조로 이루어져 있어 중후한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교회 건물의 2층에 램프와 전실이 있고, 중앙부에 예배실이 있다. 건물의 정면 지붕은 박공형, 후면 지붕은 합각형으로 되어 있다. 교회탑 위에 설치된 첨탑은 인간의 염원을 하늘에 전하는 표상인양 하늘 높이 뻗어있었다.

1900년대 초반 한국 선교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근대 종교 건축물이다. 환자들의 치료뿐만 아니라 영혼 구원을 위해 평생을 함께 한 손양원 목사가 목회 활동을 하고 순교한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한 곳이다.

여수 애양병원과 함께 여수 지역 기독교 선교 활동의 역사와 한국 근대 의료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문화적 유산이라는 평가를 받아 애양병원과 함께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하게 된다.  

    


  애양원 교회와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비 360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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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원 교회와 손양원 목사>

한센병 환자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여 그들의 삶을 위로하여 준 애양원 교회의 영적 구원 활동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특히 2대 담임 목사였던 손양원 목사의 실천적인 삶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손양원 목사의 삶은 <사랑의 원자탄>이란 책으로도 출판되고 영화화되어 많이 알려지기도 하였다.

애양원 교회 신사참배 거부운동 기록판

그는 1940년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옥고를 치르게 되어 1945년 광복이 되어서야 감옥에서 나오게 될 정도로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애양원 교회에서 손양원 목사는 환자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도하면서 한편으로는 환자를 위한 봉사 활동에 전념하였다.

환자의 고름을 직접 입으로 빨아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도 없었고 병원에서 하면 안 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손 목사의 사후 전기를 쓰는 과정에서 과장한 것으로 짐작된다. 몸을 사리지 않는 손 목사의 헌신적인 행동에 감명받은 사람들이 손 목사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전한 말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에 가면 이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다.

광복 이후 좌. 우의 이념 대립이 극심한 가운데 일어난 1948년 여순사건 때 반란군에 의해 두 아들이 살해되었다. 당연히 그의 가슴에는 원망이 가득했을 것이라 짐작하지만 아들의 장례 예배에서 놀라운 기도를 하게 된다. 손 목사는 열 가지의 감사 기도로 설교를 하면서 그중에서도 일곱째 기도 내용으로 '내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하여 장례에 참여한 애양원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설마 기도한 그대로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하였다. 아무리 기독교인이라 해도 두 명의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손 목사는 자신이 기도한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보여 주어 실제로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란 좌익 학생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았다.

마을 사람들과 애양원 환자들이 안재선을 처형하려 할 때 손 목사가 말려서 살려 주었다. 안재선은 그의 지난 행동을 참회하고 손 목사를 아버지로 따라 후일 손 목사가 순교했을 때 장례의 상주를 맡았으며 가장 슬퍼했다고 전한다.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과 손양원 목사상

1950년 한국 전쟁으로 호남 지역에서도 모두들 피난 가는 중에도 손 목사는 환자들을 두고 갈 수 없어 애양원에 남았다가 북한군에 체포되어 결국 총살당하였다. 애양원 환자들의 치유와 신앙을 지키기 위해 헌신적인 봉사의 삶을 살다가 순교한 손양원 목사를 기억하기 위해 애양원 교회 앞 에는 ‘손양원목사순교기념비’가 서있다. 1993년에는 교회 동쪽 500m 정도 마을 안쪽에 손 목사의 순교 신앙을 계승하고 그의 자료들을 보관하기 위해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을 세웠다.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과 손양원 목사상 360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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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목사 유적 공원 안내도와 3부자 묘소

애양원 교회, 애양원 역사관과 함께 마을 전체가 손양원 목사 유적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이 순례하는 마음으로 꼭 찾는 곳이 되었다. 기념관 앞마당에는 ‘손양원 목사상’이 있어 손 목사와 함께 순교한 사람들을 기념하고 있다. 기념관의 앞쪽 작은 동산에는 손 목사 부부와 두 아들의 묘소도 있어 기념관과 함께 탐방하며 손양원 목사의 일생을 되새겨 보는 기회가 되었다.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 홈페이지 방문하기  



애양원 교회와 애양원 역사관,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을 둘러보며 당시의 선교사들과 손양원 목사의 흔적을 느끼며 그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 벽안의 선교사들은 처음 어떤 마음으로 이 나라의 저 먼 땅끝까지 찾아왔을까? 애양원에서 행한 그들의 헌신을 보면 예수를 전하기 위해 찾아온 이 땅에서 애양원에서 행한 그들의 헌신을 보며 내 신앙을 한번 돌아보게 된다.

당시에는 한센병 환자들을 '문둥이'라는 말로 비하하며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고 가족들과 이웃조차도 그들의 울타리 밖으로 내치는 것은 당연한 일인양 여겼다. 전염성이 강하고 고칠 수 없는 천형의 병이라 여겼기에 남은 사람이라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국인인 그들이 이방 사람 중에서도 끔찍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몸 바친 것을 기독교의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애양원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한 외국 선교사들과 환자들을 위해 애쓰고 사랑을 실천한 손양원 목사의 삶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한센병 환자가 되어 환자들의 고통을 몸으로 체득하지 못해 진실한 봉사가 되지 못할 것을 안타까워할 정도로 환자들을 사랑하였다.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진정으로 용서하고 양아들로 받아들일 정도였으니 우리 보통사람의 정도를 뛰어넘는 참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분이다.

등록문화재로서 애양원과 애양원 교회는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중요성도 있지만 이곳을 지켜왔던 사람들의 정신을 기억하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들과 함께 한 선교사들이 이곳에 애양원을 세웠기에 많은 한센병 환자들이 치료되었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 또한 환자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정말 함께 아파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종교적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손양원 목사의 참사랑 또한 애양원 교회와 함께 기억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인인 필자로서는 이번 애양원 교회와 애양원 병원, 손양원 목사 기념관 방문을 통해 내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된 기회가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순천으로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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