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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by 박세준

오랜만에 키보드를 펼칩니다.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온갖 일더미에 싸여 허우적대다가 잠들기를 반복하고, 식사는 그저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치부됩니다.


오랜만에 비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저번주에도 왔고, 어제 아침에도 왔으니까요.


오랜만에 커피라는 음식을 가게용 컵에 담아 마십니다.

씁쓸하면서 구수한 맛은 어디 가지 않습니다.

아차, 한 모금 하려다 컵을 기울여 조금 쏟았네요. 바로 닦아내어 봅니다.

가게의 높은 천장과 노란 조명이 마음에 듭니다.


오랜만에 김광석 노래를 듣습니다. 연에 한 번씩 재생목록을 쭉 틀어보면 눈물이 조금 맺힙니다. 감동에는 쿨타임이 있나 봅니다.

자동차 앞유리에 앉은 빗줄기가 시속 80km/h의 바람에 밀려 모여 물줄기가 되고, 선루프 위로 밀려나는 모습을 봅니다.

서로 연대하던 물줄기들이 와이퍼의 손짓 한 방에 와해됩니다.

쾌감을 느끼는 나의 모습을 이내 반성합니다.


오랜만에 평일에 쉬어 봅니다.

출근은 했지만요.

낮잠도 한숨, 라면도 한 봉지, 빨래도 합니다.


오랜만에 우산을 펼칩니다.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수년간 든든하게 제 옆자리를 지킵니다. 아직 쓸만 합니다.

나무 손잡이라 끈적임이 없고, 손때가 타며 감촉이 좋아집니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앉아 있습니다.

나와 눈을 마주치면 질문부터 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내게 관심조차 없습니다.

편안합니다.

때로는 무관심도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날아갈 듯 합니다.

처음으로 마시는 차로 말미암은 여유를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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