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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기복.

손이 갈 때와 아닐 때.

by 박세준


임관 전 산의 매력에 빠졌다. 하계훈련 독도법(지도를 읽는 법) 과목 중 산에 좀 머물렀는데, 좋은 기억으로 남았나 보다.

훈련 수료 후 동네 뒷산에 무작정 올랐다. 해발 200m도 안 되는 낮은 산이었지만 여름의 습한 흙냄새와 등산로 초입을 따라 흐르던 물은 나의 니즈를 채우기에 충분했다.

날씨가 좋아지자 수도권에 있는 산들을 돌아다녔다. 광교산, 청계산, 관악산, 수락산, 수리산 등등 각 산이 가지고 있는 식생과 분위기를 만끽했다. 산 정상에서 보온병에 담아온 물을 붓고 3분을 기다려 얻는 라면이란 보상은 지금 생각해도 참 좋다.

손이 갈 때다.

그러나, 임관을 하고 발령받은 근무지는 산과 너무 가까이 지내야 하는, 거의 산에서 살다시피 하는 환경이다 보니 굳이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진급을 하고 교육기관에 가더니 또다시 산을 찾고, 새 근무지로 오니 낯선 환경과 많은 업무 때문에 산에 갈 생각을 하지 못한다. 추운 날씨도 한 몫 하고.

손이 안 갈 때다.


비슷한 시기 캠핑을 좋아하게 됐다. 정확히 말하면 아웃도어 활동이라고 해야 할까.

어느 해는 한 달에 한 번, 많으면 두 번 꼴로 캠핑을 떠났다. 살림살이를 집이 아닌 밖에 차려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 선선한 별빛 맞으며 코에 바람을 넣는 일이 신선했다. 행복했다.

손이 갈 때다.

열정은 반드시 식는다고 했던가, 없는 시간을 만들어 다니던 캠핑도 시간이 나야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캠핑에 대한 마음이 줄어든 것이 아니다. 연차가 쌓일 수록 일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많아졌고, 취미에 쏟을 에너지가 남아나지 않는 것 뿐.

손이 안 갈 때다.


산에 좀 더 오래 머무르고 싶어 백패킹에도 손을 댔다. 캠핑과 전혀 다르지는 않지만 경량화가 중요한 백패킹은 내 통장과 지갑의 식습관을 잠시 바꿔 놓았다. 서너 번 정도 산 속에서 묵고 나니, 멀리 떠날 기회가 민들레 홀씨처럼 찾아왔다. 울릉도에서의 백패킹. 낭만은 최고조.

매번 혼자 산에서 자다가 친구가 옆에 있으니 든든했다. 의지가 되었다.

손이 갈 때다.

위의 맥락과 비슷하게 일 핑계로 떠나는 일이 없어졌다. 예상하건대 날이 좋아지면 다시 배낭을 매고 떠나지 않을까.

손이 안 갈 때다.


수영도 했었네. 수영은 학창시절부터 꾸준히-몇 년씩 건너뛴 적도 있지만- 해 온 운동. 주머니사정 녹록치 않은 대학생 시절 색다른 일을 해 보고자 라이프가드 자격증도 취득했다. 임관 후 근무지 근처 수영장이 없는 환경이 되자 자연히 손이 안 갔다. 교육기관에 들어오고 나서야 시간과 마음에 여유가 생겨 손이 갔고, 지금은 또 안 그렇다.


늘어놓고 보니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요즘에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생각거리가 떠오르면 메모장에 몇 자 적어놓고 장독 뚜껑 닫듯 휴대전화 잠금 버튼을 누른다. 며칠 묵은 생각거리는 구수한 영감을 내뿜으며 글쓰기라는 야식을 선사한다. 주로 일요일 저녁이 되고 있다. 글쓰기에 손이 갈 때다.

많이 읽어야 좋은 글이 나온다 하던가, 책을 읽으려 하지만 도무지 손이 안 간다. 살짝 게으른가보다.


느껴온 삶도, 사람사이도 그렇다.

손이 갈 때와 가지 않을 때가 있다.

자주 만나 놀며 하루걸러 술잔을 부딪히던 친구도, 매일같이 소식을 공유하던 전우도 멀어지기 마련.

반대로 생각지도 못한 사람에게 어느순간 스며들어 백년가약을 맺기 마련.

여기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자리를 남에게 내어주는 시간이 많아지고, 평생의 직장인 줄 알았지만 아니란 걸 깨닫는 순간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고 뒤돌아서며, 그저 앨범 속 멈춘 시간들을 펴 볼 때 안도감을 느낄 수 있기 마련.


영원한 건 없지만, 영원을 약속할 수 있는 순간은, 언제나 아름답기 마련.


p.s.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서 추천하시는 책을 사서 읽어보려 합니다. 활자와 친하지 않아 쉬운 책이었으면 합니다. 마음껏 아이디어를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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