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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ul 26. 2023

MZ 세대의 혁명

[책을 읽고] <밀레니얼은 왜 가난한가 > 대 <생각수업>

<생각수업>은 강연회 스피치 모음집이다. 뻔한 얘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그러나 강연이란 장점도 분명히 가지고 있다. 말을 돌려서 할 가능성이 낮다. 화자의 생각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내가 장하성 파트를 읽으면서 줄을 냅다 치게 된 원인은 아마도 그것 때문이리라.


저는 혁명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빨리 바뀌게 말이죠. (<생각>, 217쪽)


그러나 그는 곧 태세를 전환한다. 혁명은 피를 부르니 안 된다. 따라서 개혁이 답이다. 개혁이라, 아마도 혁명을 0.1배속, 아니 0.01배속으로 돌리는 것이겠지.


이어서 보게 된 책이 <밀레니얼은 왜 가난할까>였다. 저자는 헬렌 레이저(Helen Razer)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의 사람이다. Razor가 아니니 괜찮다고 할 상황이 아니다. Razer라면 더 무서운 존재다. 그런데 이 책은 밀레니얼을 소재로 한 빈곤 포르노가 아니다.


99퍼센트의 당신은 100퍼센트의 세계를 얻을 수 있다. 가서 쟁취하라. (<밀레니얼>, 351쪽)


이 책의 맨 마지막 문장이다. 이 문장이 잘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처음부터 읽어 이 문장에 도달했다면, 이 문장이 뭘 요청하는 것인지 오해할 수가 없다. 이 책의 첫 문장, 그러니까, 목차의 가장 윗부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스마트폰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에게 깔맞춤인 카를 마르크스 '형님' (<밀레니얼>, 11쪽)


저자가 속한 X세대를 비롯한 이전 세대는 이런저런 이유로 혁명의 적기를 놓쳐버렸다. 그런데 밀레니얼은 다르다.


(밀레니얼 세대) 대부분이 우리가 계급의식이라 부르는 것을 쌓았다. 이 시대에 청년으로 살면서 여가를 즐기든 일을 하든 간에 자신의 노력이 결국 다른 누군가의 이윤을 늘리는 데 쓰인다는 점을 느끼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밀레니얼>, 341쪽)


저자의 말에 따르면, 밀레니얼은 혁명의 씨앗을 품고 있다.



인간 본성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문제다


책의 전반부에서만 그렇다는 점이 아쉽지만, <밀레니얼>은 꽤 웃기는 책이다. 그런데 왜 웃기는가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처한 현실이 그만큼 막장이라서다. 톰 필립스의 <인간의 흑역사>를 읽으며 키득거리는 것은 그 일들이 과거의 일들이라는 점에서 다행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키득거린다면, 자조밖에 되지 않는다.


왜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한 정책을 펴겠다는 후보에게 투표할까? 저자는 소득이 줄어들면 대중이 진보적이 된다고 믿는 <진보주의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혀 한다.


소득이 감소하면 민중은 누구든 소득 증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하는 쪽으로 움직인다. (<밀레니얼>, 48쪽)


이 말이 정답이다. 소득 증가를 공약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것이 사실은 부자들의 소득 증가에 힘쓰겠다는 말인데도, 왠지 유권자들은 잘만 자기기만에 빠진다.


마르크스는 '어떤 시대이건 지배계층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다시 읽어보라. 끝내준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사회의 지배적인 물질적 세력이 정신적으로도 지배적인 세력'이라는 것이다. (<밀레니얼>, 209쪽)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헤어 나올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다. 장하성은 <생각수업>에서 신자유주의가 더는 주장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내지 시장경제만큼 너무 당연한 생각이라서, 아예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왜 문제인가? 사실 이 질문에는 답하기가 쉽지 않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인간 본성이 자본주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짧고 강력한 대답을 던진다.


당신은 고용주에게 받은 것보다 많은 가치를 제공한다. 이는 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당신의 노동은 반드시 회사에서 받은 임금보다 더 큰 이윤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밀레니얼>, 237쪽)


이것은 마르크스가 '잉여가치'라는 다소 어려운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본질은 간단하다. 당신은 받은 임금보다 더 큰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이 생각은 우리 마음속에 아주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다. 최저임금 상승으로 알바보다 더 적은 돈을 가져가게 됐다고 푸념을 자연스럽게 내뱉는 고용주들이 그 증거다. 그런 일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한다.


저자는 자본주의가 인간 본성 아니냐는 내 의구심에도 대답한다.


자본주의가 우리를 경쟁적으로 만든다. 우리의 경쟁심이 우리를 자본주의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밀레니얼>, 256쪽)



소외


마르크스가 말하는 <소외>는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결과다. 밀레니얼들이 불행한 이유는 사실 소외 때문이다.


우울 질환과 자살률은 빈곤과 열악한 노동환경에 신음하는 이들에게서 훨씬 높게 나타난다. (<밀레니얼>, 264쪽)


뻔한 얘기지만, 다시 새겨야 하는 대목이다. 가난에 찌들어 우울증에 걸린 환자라도, 의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결국 프로작 처방뿐이다. 요한 하리의 <물어봐줘서 고마워요>는 바로 이 사실 한 가지만을 400쪽 넘는 책에서 말하고 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항우울제가 아니라 경제적 도움과 사회적 연결이다.


자본주의 세상에 사는 모두에게 소외는 문제가 된다. 문제는 소외를 얼마나 체감하느냐다. 저자와 같은 지식 노동자는 소외를 실감하며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다른 종류의 노동자들보다 훨씬 적다.


지식 노동자들은 백화점에서 일하는 중간관리자와 비슷한 수준의 돈을 벌면서도 다른 노동자들이 할인매장에서 경험하는 잔인하고 엿 같은 소외감의 10분의 1도 경험하지 못한다. (<밀레니얼>, 270쪽)


이건 좀 썰렁한 사족인데, 히로시마 레이코의 연작 소설 <진천당>에서 파는 과자류 중에는 <엿 같은 엿>이라는 게 있다. 이 과자는 아직(8권 현재)까지 그냥 이름만 나왔는데, 과연 어떤 기능이 있는지 궁금하다.



페미니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저자는 여자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페미니즘을 포함하지 않는다. 시대의 제약을 들먹일 수도 있겠지만, 저자는 더 확실한 이유를 제시한다. 그 이유는 마르크스주의가 거시적 담론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라는 제일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이다. 그다음에야 해결이 가능한 다른 문제들은 다루고 있지 않다.


마르크스주의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우리 노동자들이 함께 힘을 모아서 우리가 쌓은 풍요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단결의 순간에 성별의 구분, 또는 기타 어떤 정체성의 구분도 우선순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생산양식의 변화라는 더 위대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이러한 희생을 치르는 것이다. (<밀레니얼>, 278쪽)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은 문제를 호도할 수 있다.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은 성차별로 인한 억압에는 반대하는 반면,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른 차별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유리 천장이라는 말 자체가 천장의 존재, 즉 차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셰릴 샌드버그는 물론, 힐러리 클린턴조차 이 문제에서 조금도 자유롭지 않다.


페미니스트들의 아이콘인 힐러리 클린턴이 반쯤 사적인 자리에서 연설 도중 그게 치욕스러운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리스타'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밀레니얼>, 310쪽)



그래서 어쩌라고


<밀레니얼>은 분명한 메시지를 담은 책이다. 당장 일어나서 짱돌을 들라는 메시지다. 그러나 그것은 '혁명을 원한다는' 장하성조차 권하지 못하는, 어려운 길이다. 그래서 <생각수업>에 나오는 9명의 연자들은 한목소리로 훨씬 온건한 메시지를 던진다. 투표하라는 것이다.


(몇 년 전이지만) 진중권은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당을 찍는 이유가, 변화가 싫어서, 내지 두려워서라고 말한다.


사회가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변한다 해도, 과도기에는 필연적으로 혼란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 혼란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 극복되지만, 경제적으로 너무 여유가 없는 이들은 그 짧은 혼란도 참기가 어렵지요. (<생각>, 83쪽)


고미숙은 고전학자답게, 현대인들의 고질병인 두려움과 불안의 원인을 소외에서 찾는다. 그런데 그보다 더 근원적인 두려움은 바로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운명에서 온다.


과학자 장대익은 인간의 소외를 밈(meme)의 관점에서 본다. 밈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인간을 소외시키고 죽음에까지 몰고 가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은 역시 종교와 이데올로기다. 유발 하라리가 <공통 서사>라고 말했던 그것이다.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밈에 불과한 원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는데, 이는 분명히 유전자(gene)의 이익에 역행하는 것이다. 이런 선택은 무형의 어떤 것(밈)을 위해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인간에게나 일어나는 현상이다.


장하성의 주장은 훨씬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이미 말했듯이, 그의 개인적 선호는 혁명이다. 단지, 그것이 현재 상황에서 적절하지 않을 뿐이다. 그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거다.


분배도 재분배도 안 되는 상황인데요. 그럼 경제 성장을 왜 하나요? (<생각>, 207쪽)


우리는 경제가 성장하지 않으면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고 믿는 듯 행동한다. 그래서 저 당연한 질문이 대단히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당연한 질문이다. 생각해보자. 가족들이 힘들게 일해서 돈을 벌어오는데, 그걸 아버지가 전부 몰수해서 술만 퍼마신다면, 돈을 벌어올 이유가 없지 않을까?


정리하자. 헬렌 레이저는 혁명, <생각수업>의 연자들은 투표를 권하고 있다. 선택은 스스로 할 일이다. 나는 투표 쪽이다.


투표가 어려운가? 투표에는 에너지도 시간도 거의 들지 않는다. 물론 나도 이해한다. 투표를 하려면 적으나마 에너지와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고, 투표를 한다고 해서 뭐가 바뀌지도 않으니 하기 싫은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참정권의 포기야말로 저들이 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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