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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ul 25. 2023

애정이 담긴 책과 그렇지 않은 책

통섭, 다재다능, 그리고 얄팍한 근자감

통섭이라는 게 유행이다. 단어 자체는 유행이 좀 지났는지 몰라도,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것은 인간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분야를 넘나드는 책도 많다. 나도 물론 그런 책들을 매우 좋아한다.


지금 막 생각나는 것은 <미술관에 간~> 시리즈다. 화학이 괜찮았고, 수학이 최고였던 것 같은데, 대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진중권의 책을 읽어보면, 미술관에 간 한량들이 자기 분야도 아닌 분야에 대해 떠들어봤자 우습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물론 나도 미술에는 문외한에 가깝고, 그럼에도 얄팍한 지식을 내비치는 어리석음을 자주 저지른다. 반성한다.)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이라는 책을 읽었다. 서문이 굉장하다. 이거, 대어를 낚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 바닥이 드러난다. 역사라는 만만해 보이는 분야를 끌어들였으나, 한계가 금방 드러난다.


그런데 계속 읽다보니, 괜찮은 내용이 나온다. 볏과 식물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접해 본 내용이다. 그래서 살펴보니, 저자가 <싸우는 식물>을 쓴 이나가키 히데히로다. <싸우는 식물>은 정말 괜찮은 책이다. 식물학자로서 이 사람은 아주 좋은 책을 쓸 수 있다.


https://brunch.co.kr/@junatul/389


개인 차원에서 통섭에 도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남에게 던질 수 있는 정도가 되려면, 적어도 그 분야에 대해서 애호가 정도는 되어야 한다. 소위 말하는 덕후 말이다. 애정이 있어야 진정한 배움이 가능한 것이고, 그래야 남에게 말할 수 있는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김필영이란 작가는 주로 철학에 관한 책을 쓰는데, 전공은 공학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철학에 관한 이해 수준은 웬만한 전공자 수준을 아득히 뛰어 넘는다. 그냥 내 생각이지만, 강신주와 맞짱을 떠도 꿀리지 않을 느낌이다. (나는 모든 학문 중에서 철학을 가장 애정한다고 자부하며, 석사 논문도 문학철학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사람이 철학과 물리학을 결합하여 <시간여행>이라는 책을 썼다. 시간이란 주제는 내가 아주 애정하는 주제이고, 책도 꽤 읽었다. 그런 내게, 이 책은 그간 읽었던 그 어떤 책과 비교해도 손색 없을 정도로 훌륭한 책이었다. 카를로 로벨리, 스티븐 호킹, 그리고 애덤 프랭크의 통섭 역작, <시간 연대기>와 비교해도 좋을 정도다.


노력하는 자조차도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무언가를 즐기는, 즉 애정하는 사람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러니 애정하지도 않는 문제에 대해 얄팍한 지식을 뽐내려는 생각은 좀 자제했으면 좋겠다. 근자감은 근자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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