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말 Jul 24. 2023

심심할 땐 뇌과학

[책을 읽고] 이인아, <기억하는 뇌, 망각하는 뇌>

뇌과학 책은 언제나 재미있다. 테드 창의 단편 중에 어떤 호기심 많은 이가 자기 뇌의 작동 방식을 실시간으로 관찰하는 것이 있다. 뇌과학을 공부하는 게 조금은 그런 느낌 아닐까. 이 분야는 또한 새로운 연구가 폭발적으로 나오는 분야라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이미 폐기된 내용일 수도 있다. 계속 읽어야 하는 이유다. (테드 창 단편에 나오는 존재는 물론 인간이 아니다. 우리 시각에서 보자면, 기계 인간 정도랄까.)



HM 유산


뇌과학에 관심이 있다면 HM이란 이니셜이 익숙할 것이다. 영화 <메멘토>로도 유명해진 바로 그 사람이다. 해마 절제술로 인해 단기 기억을 형성하지 못한다. 다른 쪽에서는 전혀 이상이 없다. 그의 사례를 통해, 뇌가 부위별로 기능을 분담하고 있다는 가설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HM에 대해 놀라운 사실 두 가지를 새로 알게 되었다. 하나는 이 사람이 2008년까지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람에 대한 논문은 1957년에 나왔으니, 그가 해마 절제를 받은 시점은 그 이전이다. 게다가 이 수술을 했던 의사는 HM에게 위험 부담에 대해 알리고 동의를 받았다. 그리고 HM의 증세에 대한 논문 서두에서 그는 이런 종류의 수술이 가져오는 위험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우고 싶다는 취지를 밝혔다. 이런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가 50년 넘게 그 상태로 살아 왔다는 것, 불과 10여 년 전까지 우리와 같은 공기를 숨쉬고 있었다는 사실이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더 놀라운 것은 두 번째 사실이다. HM은 사망하면서 자신의 뇌를 기부했다. 그렇게 고통을 받고도 의학 발전을 위해 용감한 결정을 하다니, 훌륭한 사람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의 뇌를 해부한 결과, 그의 해마는 상당 부분 살아 있었다!


특히 왼쪽 반구에 있는 해마는 상당 부분 정상 세포가 발견되었다. (169쪽)


그간 이루어진 HM의 사례 연구는 그의 해마가 완전히 소실되었다는 가설 하에 진행된 것들이다. 그 근간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아무튼, HM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참, 2008년 그의 사망과 함께 공개된 그의 이름은 헨리 몰레이슨(Henry Molaison)이다.



우리는 정말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해마는 영어로 hippocampus라고 쓴다. 처음 뇌과학 강의를 들었을 때, 교수가 캠퍼스에서 어디로 가야 하나 생각할 때 hippocampus가 관여한다고 외우면 된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는 이게 썰렁한 농담이기는 하지만, 나중에 정말 그렇게 기억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과연 그렇다.


그렇다면 해마는 어떻게 공간 정보를 다루는 걸까?


2014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오키프(O'Keefe)와 모저(Moser) 부부에게 수여되었다. 오키프는 해마에서 '장소 세포(place cell)'를 발견했고, 모저 부부는 내후각피질에서 '격자 세포(grid cell)'를 발견했다.


오키프는 쥐 실험을 통해, 특정 해마 뉴런이 특정 장소를 방문할 때만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가 이런 생각을 논문으로 낸 것이 1971년인데, 노벨상 수상까지 40년이 넘게 걸린 것이다. (물리학자들만 불쌍한 게 아니었다.)


내후각피질은 감각 정보를 종합하여 해마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바로 여기에서 모저 부부는 격자 세포를 발견했다. 내후각피질에서 x, y축 좌표 값을 기록하여 이를 해마에 전달하는 것이다. 격자 세포의 작동 방식은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영상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P7neeymcUY



책에는 x,y 좌표라고만 쓰여 있어 조류나 수중 포유류는 z좌표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위 영상을 보면 궁금증이 풀린다. 하나, 격자 세포는 박쥐 실험에서도 발견되었다. 둘, 격자 세포는 x, y축 방식의 교차 좌표계가 아니라 벡터좌표계로 작동하는 듯하다. 즉, 3차원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위 영상에서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조명을 끈 상태, 즉 암흑 속에서도 실험 쥐의 격자 세포는 똑같이 발화했다는 사실이다. 시각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똑같이 작동했다는 것에서, 격자 세포가 자체적으로 계산을 수행한다고 의심해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 더. 격자 세포는 물리 공간뿐 아니라 개념적 공간에도 대응하여 발화한다. 우리는 물리적 세계뿐 아니라 다양한 다른 개념들도 공간적 감각으로 변형하여 받아들이는 것일 수 있다. 어쩌면 <마인드 맵>이라는 게 뇌과학적으로 꽤 말이 되는 도구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어쩌면 <매트릭스>에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철학자들이 좋아하는 비유로, <통 속의 뇌>일 수도 있다. 쥐에게 가상 현실을 보여주는 실험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쥐가 몸이 고정된 채로 공중에 떠 있는 공을 굴려 자신의 앞에 파노라마 스크린처럼 펼쳐진 2차원적 평면 스크린에 보이는 가상현실 공간을 돌아다닐 때 해마의 장소세포 활동을 측정하는 것이다. (208쪽)


쥐의 장소세포는 물리적 공간을 돌아다닐 때처럼 발화했다.  뇌가 실제 공간과 가상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니, VR 기기 개발에는 꽤 좋은 소식이다.




즐거운 경험


원래는 가볍게 메모만 남기려고 했다. 그런데 줄 친 내용도 많은 편이고, 메모도 꽤 길었다. 그래서 글로 쓰다 보니, 격자 세포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고, 흥미로운 내용을 배우게 되었다. 뇌로 뇌를 공부하는 것이니, 뇌과학은 재미없을 수가 없다. 심심할 때는 뇌과학이 제맛이다.


나머지 메모 모음은 아래와 같다.


- 상상력을 키우려면 경험을 찾아 나서라. 상상력도 해마가 담당하기 때문이다.


- 뇌과학의 영원한 미스터리 중 하나는 뉴런이 어떻게 흥분된 시냅스 패턴을 기억하는가다.


- 파킨슨병 환자들도 음악을 듣거나 춤을 출 때는 보통 사람처럼 부드럽게 움직이고 장단을 맞춘다. - 파킨슨병은 뉴런의 동시 발화 기제에 문제가 있다는 가설이 맞는 듯. 다시 말해, 음악이 메트로놈 내지 지휘자 역할을 해주니 파킨슨병의 증세가 완화되는 것 같다.



- 덤불어치라는 새가 먹이를 묻어두고 다시 찾아먹는 패턴을 보면, 사람이 가진 일화기억과 매우 유사하다. 니키 클레이턴이라는 학자의 실험은 다음과 같다. 덤불어치가 나중에 먹기 위해 먹이를 묻어두는 습성이 있다. 덤불어치에게 땅콩이나 벌레를 주고 먹이를 묻어두게 하고, 그 장소에서 새를 격리시킨다. 나중에 새를 놓아주고 다시 먹이를 찾아가게 하면, 격리 후 경과 시간에 따라 새의 행동이 달라진다. 몇 시간 밖에 안 지난 경우라면, 더 맛있는 먹이인 벌레를 찾아가지만, 24시간이 지난 다음 새를 놓아주면, 벌레 먹이는 이미 상했다고 생각하는지 땅콩을 곧바로 찾아간다.


- 시각 정보는 후두엽이 담당하는데, 하나의 감각에 하나의 엽을 통째로 할당한 것을 볼 때, 시각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정보인지 짐작할 수 있다.


- 포유류의 해마는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


- 현대 뇌과학에서는 줄기 세포를 이용해서 매우 단순화된 신경 조직을 만들어 실험한다. '뇌 오가노이드'라고 부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둔필승총 23072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