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는 개연성 에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100세 노인> 대 <아우슈비츠의 문신가>

by 히말

한국시리즈 3차전, LG 박동원이 투런 홈런으로 재역전한 경기를 KT 박병호가 투런으로 받아쳐 7:5로 재재역전이 되었다.

9회 2사에 등장한 오지환.

쓰리런으로 8:7 재재재역전을 완성한다.

개연성 에바라고 욕먹을 시나리오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이렇게 개연성 에바지만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 중에 홀로코스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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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현장의 두 청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100세 노인>은 홀로코스트 생존자 에디 제이쿠가 기록한 넌픽션이다.

<아우슈비츠의 문신가>는 소설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랄레 소콜로프의 경험을 소설로 만든 것이다.

하나는 넌픽션, 다른 하나는 소설이지만, 어차피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니 비슷하지 않을까?

전혀 아니다.


아무리 실화를 바탕으로 해도, 소설은 진실을 이기지 못한다.

주인공의 발연기에도 불구하고, 영화 <마이 파더>의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실제 사건 기록을 보면 눈물이 흐른다.

그 이유는 "진실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100세 노인>의 주인공 에디 제이쿠는 빅터 프랭클이나 프리모 레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고생을 했다.

많은 홀로코스트 경험담이 개연성 에바라는 말을 들을 만하지만, 에디 제이쿠의 삶처럼 기막힌 사건 전개를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지는 몰라도, 그가 100세를 넘긴 것은 사실이다. 극단적 영양 결핍, 고문, 학대, 감염을 겪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반면, <아우슈비츠의 문신가>의 실제 주인공 랄레 쇼콜로프는 아우슈비츠에서 수용자 번호를 문신으로 새기는 일을 했던 사람이다.

그가 카포 수준의 특권을 누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존더코만도 이상의 특권을 누린 것은 사실이다.

그는 다른 수용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안락한 삶을 살았고, 스스로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랄레는 다른 수용자들로부터 이 사람들(존더코만도)이 특권을 누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별도의 숙소를 사용하고 배급을 더 많이 받으며 따뜻한 옷을 입고 따뜻한 담요를 덮는다고 한다. 그의 삶과 비슷하다. 그 역시 자신이 이 수용소에서 하고 있는 일을 경멸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마음이 무거워진다.(<문신가>, 157쪽)


둘 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임에도, 랄레의 고생을 에디의 고생에 비교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의 문신가>가 심금을 울리기는커녕 감동도 재미도 없는 이유가 단지 그가 고생을 덜 했기 때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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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전개라도 진실은 힘이 있다


아무리 실화 기반이라 해도,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소설>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왜 그런가 그동안 많이 생각해 보았지만, 소설이 진실을 이기지 못한다는 동어반복 외에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아우슈비츠의 문신가>를 읽으면서 서술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홀로코스트 넌픽션은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에 집중하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은 (하드보일드가 아닌 다음에야) 대개 주인공의 내면에 집중한다.

군더더기가 많아진다. 그래서 감흥이 떨어진다.


프리모 레비도 빅터 프랭클도 내면 묘사를 한다.

자기 자신의 내면 묘사는 진실의 힘을 담고 있다.

그러나 소설가가 남의 이야기를 듣고 "그때 이런 심정이었겠군"하는 묘사는 그런 힘이 없다.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소설가에게 "그때 이런 심정이었다"라고 말해봤자, 진실의 힘은 그때에만 머물 뿐이다.

소설가의 머리를 거쳐 다시 나온 이야기에는 이미 진실의 힘이 사라져 있다.


남의 머릿속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수천 년 역사를 가진 인식론이 아직도 유아론을 결정적으로 논파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거다.


또 한 가지 요인은,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보기에 너무 개연성 에바라는 점이다.

그래서 사실로 확인된 넌픽션은 감동을 주지만, 소설은 억지 감성팔이로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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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문제에 대해 오래 생각해 왔다.


천재적인 소설가 조디 피코는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하여 <이야기꾼>이라는 소설을 썼다.

분명 흥미로운 소설인데, 읽고 나서 감흥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녀의 전매특허인 개연성 에바, 억지 전개가 더 두드러져 보일 뿐이다.


그녀의 대표작, <쌍둥이별>의 후반부 전개를 보면 개연성 에바도 정도가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녀가 드러내려는 주제 의식, 극적 효과, 그리고 이것이 소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수긍이 된다.


그러나 <이야기꾼>의 경우, 비슷한, 아니 훨씬 덜한 억지 전개임에도 신경이 쓰인다.

재미도 감동도 사라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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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거리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가 문득 떠오른다.

고통 당사자는 고통의 무게, 그 주관성의 무게 때문에 소통의 대화를 하지 못하고 울부짖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곁을 지키는 이 사람의 고통도 결국에는 울부짖는 단계까지 진행할 수 있다.

그래서 고통 당사자도, 그 곁을 지키는 사람도 소통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고 만다.

이 책의 결론은, 그 때문에 고통의 곁의 곁을 지키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뒤집어 생각해 보자.

저자도 인정하듯이, 고통의 울부짖음은 돈벌이가 될 정도로 호소력이 있다.

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언어로 순화된 고통의 울부짖음은, 호소력이 떨어진다.


홀로코스트 경험은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의 고통이다.

그것을 직접 듣는 것과, 한두 단계를 거쳐 듣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다.

진실의 힘은 단계를 거치면서 희석되고 사라진다.


홀로코스트 넌픽션이 가지는 호소력을 홀로코스트 소설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