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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Nov 05. 2022

기발한 노잼

[책을 읽고] 찬호께이, 미스터펫, <S.T.E.P>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13.67>을 읽고 나서 찬호께이를 검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손에 잡힌 것이 이 책이다. 다만, 합작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선장이 둘인 배가 제대로 뜨는 걸 본 적이 없어서다.



찬호께이, 소설의 본질을 안다


이 소설은 4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1, 3번은 찬호께이, 2, 4번은 미스터펫이 썼다. 찬호께이가 쓴 1, 3번 에피소드는 칭찬하는 데 입만 아플 뿐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어떤 출소자의 범죄 행각을 다룬다. 진실은 맨 마지막에 폭로된다. 이런 식의 '반전'이 용납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 소설의 경우에는 용납될 수밖에 없는데, 그 반전이 이 소설의 뼈대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중요한 포인트는 그 반전이 아니다. 그 전에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전개다.


3번째 에피소드에서도 이 패턴은 그대로 반복된다. 첫 번째 에피소드와 마찬가지로, 3번째 에피소드의 뼈대 역시 다른 서사에서 수 없이 봐오던 것들이다. <Groundhog Day>부터 <인셉션>까지 흔해 빠진 구조다. 그러나 포인트는 역시 재미에 있다. 3번쨰 에피소드 역시 재미만으로 읽을 가치가 있다. 


더욱 중요한 점은, 3번째 에피소드의 전개 구조가 2번째 에피소드의 전개 구조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미스터펫이 쓴 2번째 에피소드는 하품만 나오는 이야기지만, 찬호께이가 쓴 3번째 에피소드는 흥미롭기 그지 없다. 같은 패턴으로 글을 쓰는데 이 정도 차이가 난다면 그건 그냥 실력 차이다.



미스터펫, 기발하다고 다가 아니다


미스터펫의 에피소드 두 개는 찬호께이의 에피소드와 연동되며, 전체로서 소설의 줄거리를 이룬다. 문제는 미스터펫의 파트가 아주 재미없다는 점이다.


<소년 탐정 김전일 시즌 2>는 전편에 비해 매우 인기가 없었다. 트릭의 기발함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스토리가 감동을 잃는 것은 물론 아예 개연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김전일> 시리즈가 인기 있었던 요인에는 무엇보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범인들의 사연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억지 트릭을 억지로 다시 꿰어맞추는 식의 '두뇌 싸움'이 주가 되면서 독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미스터펫의 파트가 딱 그런 식이다.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만을 가지고 억지로 스토리를 이어나가려 하니 재미가 하나도 없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 억지 아이디어마저 한없이 얄팍하고, 심지어 틀렸다는 데 있다.



오류 투성이


그냥 재미만 없으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독자를 상대로 강의를 하려고 든다. 더구나 그 강의 내용은 오류 투성이다. 미스터펫이 이공계 출신이라는 것이 의심스럽다.


이 책이 SF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면 그건 사건 발생 시기가 미래로 되어 있다는 점뿐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인공지능은 책이 발간된 2015년 기준으로도 업데이트가 되어 있지 않다. 그 점에서는 찬호께이 역시 틀렸다. 대표적으로 다음 문단을 보자.


컴퓨터에게 아치형 문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인지시키려면 다양한 사례를 입력해야 합니다. 아치형 문은 두 개의 직립한 기둥 위에 가로로 또다른 기둥을 올린 것이지만, 두 개의 직립한 기둥 사이에 공간이 없으면 아치형 문이 아니다 등등, 이렇게 대량의 사실을 입력해서 시스템에게 무엇이 맞는지 무엇이 틀린지 알려주는 겁니다. (338쪽, 에피소드3 중에서)


적어도 2010년대 중반 이후에 이런 식의 인공지능을 쓰는 사람은 주류에 없다. 탁 까놓고 말해서 1960년대에 쓰던 방법이다. 인공지능이 이런 식이었다면 이세돌이 알파고한테 질 수가 없었다.


오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시뮬레이션이 주 소재인 소설에서 시뮬레이션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하다.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이 아닌 다음에야 변수들 사이의 상호의존성(보통 공선성(colinearity)이라 부른다)을 고려하지 않는 시나리오를 짜면 학점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F.M.G 같은 아이디어는 코웃음밖에 안 나온다.



소결


너무 비판만 한 것 같아 속이 쓰리다. 찬호께이의 <13.67>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합작'이라는 이상하고 의심스러운 포맷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이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찬호께이 파트만 따로 떼어 단편으로 낸다면, 이 소설은 수작이다. 첫 번째, 세 번째 에피소드는 각각 영화로 만들 수 있는 분량이고, 영화든 드라마든 만든다면 분명 재미있을 것이다.


아무튼, 찬호께이는 소설의 본질을 아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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