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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를 다시 써야 하는 이유

[책을 읽고]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by 히말

나는 이미 <사피엔스>의 주제를 안다. <호모 데우스>를 이미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워낙 유명한 책이니 이 책에 대한 이야기가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책 57쪽에는 무려 3.2만 년 전에 만들어진 사자-남자(또는 사자-여자)라는 공예품이 등장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고, 그것을 형상화하기까지 한 것이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 공예품이 자기 부족의 수호신이라고 믿는다면, 그들은 이 하찮은 나무 토막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도 할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이 멸망한 것은 어쩌면, 사피엔스인들이 믿었던 신령이 그들을 악귀라고 규명했다는 믿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적벽대전의 결말을 안다고 삼국지 읽기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나는 <사피엔스>를 집어들었다. 숙제는 해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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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질서


이 책의 주제는 아래 구절로 요약된다.


상상의 질서란 사악한 음모도 무의미한 환상도 아니다. 그보다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178쪽)


위 글에서 저자는 기원전 1776년의 함무라비 법전과 기원후 1776년의 미국 독립선언을 비교한다. 전자가 주장하는 계급 사회만큼, 후자가 주장하는 평등 사회 역시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의 주장은 이미 유명하다. 사피엔스의 성공 비결은 "집단적 허구"를 믿는 능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국가, 종교, 돈, 가족, 소유권... 모두가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공통으로 믿는 허구에 붙인 이름이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하는 질문이다. 놀랍게도,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답도 한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훌륭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만일 흑인과 백인, 브라만과 수드라의 구분이 생물학적 실체에 근거를 두었다면 어떨까? (중략) 그렇다면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데는 생물학으로 충분할 것이다. (223쪽)


즉,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역사학의 존재 이유를 제시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역사학자 주제에 유전자나 AI 이야기는 왜 하느냐는 사람들에게 내놓을 만한, 아주 훌륭한 대답이다.



돈, 제국, 종교, 그리고 과학


파트3에서, 저자는 인류의 역사가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문화적 통일이다. 공통된 서사가 융화하는 것이다. 통일이라는 방향성은 돈, 제국, 그리고 종교의 힘에 의해 유지된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역사는 굴러갔고, 사실은 아주 잘 굴러갔다. 화폐의 유통, 제국의 행정 시스템, 그리고 종교라는 이름 아래의 화합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례없는 풍요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던 중,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더욱 강력한 힘이 역사의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과학혁명이다.


잘 알려져 있듯, 중국은 아주 오래 전에 화약을 발명했다. 그러나 그걸로 불꽃 놀이를 할 생각만 했을 뿐, 이웃 나라를 공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안토니오 가리도의 소설 <시체를 읽는 남자>를 보면 송나라 때 총을 발명한 사람이 나온다. 작가는 이것이 역사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라 말하고 있으니, 송나라 때 총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총은 딱 한 자루였으며, 한때의 신기한 사건으로 치부되었을 뿐, 그걸 더 만들려는 사람은 없었다. 중국이 화약, 나침반, 종이를 만들고도 총포류, 항해술, 인쇄술 혁명을 이룩하지 못한 것을 많은 학자들은 중국 사회의 후진성, 특히 인간의 노력이 값싸게 치부되었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아직도 사실상 카스트가 남아 있는 인도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하라리는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한다.


과학과 산업과 군사기술은 자본주의 체제와 산업혁명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서로 얽히기 시작했고, 일단 그 관계가 정립되자 세상은 급속히 변했다. (386쪽)


그렇다. 과학이 실용화된 배경에는 돈의 힘이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화약이나 종이를 돈과 연결시킬 믿음이 부족했다. 또다시 "공통의 상상력" 이야기다. 화약이나 종이가 돈이 된다는 생각을 단 한 사람만 해서는 곤란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걸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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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무엇일까


이어지는 챕터에서 하라리는 과학과 자본주의의 결합이 가져오는 막강한 힘을 더 상세히 설명한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단어로 설명 가능한데, 그것은 '성장'이다. 자본주의는 신용으로 굴러간다. 통화승수를 통해 우리는 가진 것의 10~20배 규모의 자본을 굴린다. 그런데 신용이란 개념은 수메르 점토판에도 등장한다. 전혀 새롭지 않은 이 개념을 사람들이 널리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 즉 신용과 성장이라는 서사가 "공통 서사"가 되지 못한 이유는, 미래가 현재보다 나을 것이라고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미래가 진보한다는 믿음이 과학에 의해 가능해졌다는 사실을 볼 때, 결국 자본주의와 과학은 함께 발을 떼어야 하는 2인3각 주자와 같은 처지였던 것이다.


이 책의 결말 부분에서, 저자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피엔스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 행복에 대한 논의에 불교 철학의 통찰을 가져오는 부분은 놀랍기는 해도, 새롭지는 않다. (이 책에서 그런 논의가 나와서 뜬금 없을 뿐이다.) 그러나 사피엔스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다소 어둡다. 내가 <호모 데우스>를 먼저 읽었기에, 그리고 그 책의 결론은 희망적 톤이 강하기 때문에 조금 의아하게 느껴진다.


안경이 등장한 시점에 이미 사피엔스는 사이보그로의 이행에 돌입했다. 감각 보조를 넘어, AI와 반도체 칩이 사고와 기억을 보조하더라도, 사피엔스의 근본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아라는 이름의 기억 전체를 사이버 공간에 업로드한다면? 그것까지 사피엔스라 부르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다만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 것인가는 해석자의 태도에 달려 있다. 사피엔스의 종말인가, 호모 데우스의 탄생인가. 정보 처리를 위한 최적의 진화가 우주의 질서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아니, 그전에 DNA의 자기 복제에는 과연 도움이 될까.



유발 하라리의 다음 책을 기다린다


이 책은 인지, 농업, 역사, 과학혁명 등 4차례의 혁명을 이야기하지만, 그 핵심은 농업혁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21세기가 다 되어서야 발견된 튀르키예의 괴베클리 테페 유적(책 150~151쪽)이다. 이 유적은 기원전 9500년 경 건설된 것으로, 스톤헨지와 유사한 구조지만 훨씬 더 복잡하다. 게다가 부조까지 남아 있다.


7000년 뒤에 건설된 스톤헨지보다 훨씬 더 문명적인 유적이다. 농업혁명을 우리는 약 1만 년 전의 사건으로 본다. 그런데 괴베클리 테페 유적은 거의 1만 2천 년 전의 것이다. 다시 말해, 농업혁명 이전에 이미 문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농업의 시작과 함께 사람들이 모여 산 것이 아니라, 이미 모여 살던 사람들이 농업을 시작한 것이다.


2023-10-15.jpg (c) 튀르키예 정부 내지 Abdullah Sevilmis


문제는 괴베클리 테페 유적이 발굴되고 15년이나 지나 출간된 이 책이 사실상 이 새로운 가설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짧게 언급하고는 지나가지만, 이런 일도 있다는 식의 서술로 끝내버린다. 그리고 곧, 지금까지의, 아니 1995년까지의 통설인 농업혁명 설을 서술한다. 물론 괴베클리 테페에서 사람들이 머문 시간은 1년에 2~3개월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왜 새로운 발견을 무시하고 예전의 학설대로 책을 썼을까?


새로운 연구를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주로) 농업혁명에 관한 것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이 정립되고 나서 뉴턴 역학으로 천체의 움직임을 서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이 책의 중심 주장은 사피엔스의 성공이 "집단적 허구"를 믿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작은 바로 농업혁명이었다. 기존 학설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상태에서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예전의 이야기를 재탕하는 것은 실망스럽다.


농업과 집단 생활의 순서를 뒤집은 이야기에 대해 그가 다시 한번 글솜씨를 뽐 내기를 기다린다. <사피엔스>의 전면 재개정판이든, 전혀 새로운 책이든, 유발 하라리의 새 책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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