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세동기가 남자의 몸을 난폭하게 공중으로 던져올린다.
“300줄, 준비해주세요. 물러서세요. 샷!”
다시 그의 몸이 공중으로 뜬다.
“아아... 제발.” 간호사가 두 손 모아 기도한다.
“300줄로 다시 갑니다. 아니, 최대로... 360줄 준비해 주세요.” 의사가 말한다.
“360이라고요?” 간호사가 물었다.
“일반인이 아니니 한번 해보죠.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나아요.”
“360줄... 준비됐습니다.”
“다들 물러...” 의사가 말을 멈추었다.
"헛!"
남자가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죠?”
***
“기억이 안 난다고요?” 의사가 물었다.
“안 나요.” 남자가 대답했다. “이곳이 병원인 건 알겠지만, 제가 왜 여기 있는 건지,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이름이 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다른 건요?”
“모르겠어요. 제세동기를 들고 계셨던 건 기억나요. 제가 심정지 상태였나요?”
“네, 그렇습니다.” 의사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세요? 이름은 몰라도, 병원이라든가 제세동기 같은 개념은 기억하시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남자가 대답했다.
“뭔가 기억하시는 게 있을 거예요.” 의사가 말했다. “예를 들면, 하시던 일이라든가.”
“모르겠어요. 제가 뭘 하던 사람이죠?” 남자가 물었다.
의사는 벽에 죽 늘어선 채 둘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 두 명, 그리고 다양한 일상복을 입은 사람 대여섯 명이 늘어선 탓에, 1인실이 좁아 보였다.
“말해도 되겠죠?” 의사가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말해야 하는 거죠?”
검은색 정장을 입은 여자가 무리에서 이탈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준기 씨.”
남자는 의사 가운을 바라보았다.
- 전문의 하경택.
그러니까, 준기는 나다.
남자가 여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제 이름이 준기... 군요?”
“네, 준기 씨. 정말 기억이 안 나는군요?” 여자가 한숨 섞인 말투로 말했다. “저도 기억 안 나시고요?”
“죄송합니다.” 남자가 대답했다.
“그래도,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슬픔이 섞인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여자가 말했다.
여자가 뒤로 물러서고, 노타이 턱시도의 남자가 다가왔다. “이준기.”
“그게 제 풀네임이군요.” 남자가 말했다.
“정말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건가? 당장 처리해야 할 큰일이 있는데, 이거야말로 큰일이군. 설상가상이라더니.”
뭐라 할 말이 없어, 이준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협회장 이상덕이다.” 턱시도 남자가 말했다. “기억 안 나?”
“협회장?” 이준기가 말했다.
“좋아. 아니, 좋지는 않지만, 제기랄.” 턱시도 남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알겠군. 그러니까 이준기는 지금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 거야. 처음부터 모든 걸 설명해야 하는 거지. 초짜를 교육시키는 것처럼 하나하나 가르쳐야 하는 거야. 지금 이 상황에서 말야.”
“이봐요, 협회장!”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가 말했다. “사람이 살아난 게 우선이잖소.”
“아아, 설 교수님.” 이상덕이 말했다. “나도 사람이에요. 나도 이준기가 살아나서 아주 기쁩니다. 기뻐 날뛸 지경이에요. 하지만 상황이 아주 거지 같이 돌아가게 됐잖습니까. 오후에 총리 만나야 하는데, 뭐라고 설명하죠? 하루 경제 손실이 수천억 원이라는 뉴스 기사 못 보셨어요?”
“회장님,” 아까의 검은색 정장 여자가 끼어들었다. “그런 얘기는 지금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 수연 씨!” 이상덕이 말했다. “역시 옳은 말만 하시는군. 내가 길수연 씨한테 회장 대우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수연 씨가 내 입장이었으면 어땠을까? 사람이 살아났으니 다행이다, 급할 거 없으니 한 일주일 푹 쉬면서 기억이 돌아오게 산책이라도 해봐요.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상덕은 혀를 차며 밖으로 나갔다.
의사가 말했다. “평소 상황이라면, 충분한 안정가료를 권고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 그렇게 하는 게 맞는지, 정말 모르겠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원장님?”
원장이 대답했다. “내 생각이 있기는 하지만, 우선 박과장 의견을 묻고 싶군.”
그 옆에 선 의사 가운의 남자가 대답했다. “안정가료가 정답이기는 하죠. 하지만 지금은 공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생각도 같아.” 원장이 말했다. “환자 분 바이탈은 모두 정상이잖아?”
“네, 그렇습니다.” 의사는 원장에게 대답하고 나서, 이준기를 향해 말했다. “기억이 자연스럽게 돌아오면 좋겠지만, 지금 상황이 워낙 다급합니다. 기본적인 것은 아셔야 할 것 같아요. 다행히도, 이준기 님 바이탈은 아주 좋으니, 딱히 충격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요.”
***
“환자 분 이름은 이준기. 직업은 구원자입니다. 과거에는 경찰 공무원이었죠.” 의사가 말했다.
“구원자?” 이준기가 물었다.
“지금 세상에는 차원문이라 불리는 위험한 지역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른 차원과 연결되는 문 같은 것인데, 가만히 놔두면 괴물들을 뱉어냅니다. 이것도 기억 안 나세요?”
“네?” 이준기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차원문 안쪽 세계를 던전이라 부르는데, 던전 안 몬스터들을 소탕하면 차원문은 소멸합니다. 그런데 차원문 안으로 진입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구원자라는 존재들만 가능합니다.”
“너무 황당한 얘기군요. 설마,” 이준기가 물었다. “제가 그런 사람들 중 하나라는 겁니까?”
“네. 준기 씨는 우리나라에서 10위권 안에 드는 대단히 강력한 구원자입니다. 현재 27레벨이셨죠, 아마?”
“최근 정찰 미션에서 퇴각하셨으니까, 조금 낮아졌을 거예요.” 길수연이 대답했다.
“아, 그렇겠네요. 그럼 살짝 10위권 바깥이실 수도 있겠군요.” 의사가 말했다. “그래도, 준기 씨는 대단히 중요한 존재입니다.”
“무슨 뜻이죠?”
“길수연 구원자님이 얘기하신 것처럼, 준기 씨는 최근에 아주 중요한 차원문에 정찰을 다녀오셨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차원문 밖에 쓰러지신 채로 발견되었죠.”
“하루 넘게 혼수상태였어요. 오늘 아침엔 갑자기 심정지가 왔죠.” 길수연이 말했다.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
진찰실 밖으로 나오자, 한 여자가 이준기에게 달려와 덥썩 안겼다.
이준기는 어쩔 줄 몰라 그대로 서 있었다.
여자가 팔을 풀고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아, 오빠 기억 상실이라고 했지.”
그녀 눈에 눈물 자국이 있었다.
길수연이 말했다. “아린 씨도 기억 안 나요?”
“죄송해요.” 이준기가 말했다.
“저한테 죄송할 건 없지만,” 길수연이 말했다. “아린 씨한테는 죄송해야겠네요.”
“설마?” 이준기가 말했다. “이 분이 제 여자친...”
“아냐, 오빠, 아냐.” 안겼던 여자가 얼른 말했다. “그냥 나 혼자 좋아하던 거야. 내 이름은 문아린이고, 준기 오빠 광팬이지.”
“아,” 길수연이 말했다. “그런 거예요?” 재미있다는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살짝 떠올랐다 사라졌다.
“일단,” 문아린이 말했다. “커피라도 마시면서 얘기해요. 오빠, 커피 좋아하던 건 기억하지?”
“그런 것 같네요.” 이준기가 드디어 웃었다. “커피라는 단어를 들으니, 커피가 급 당기네요.”
***
“라테 받아.” 문아린이 이준기에게 라테가 든 컵을 밀었다. “나도 라테. 수연 씨는 아메리카노.”
“아, 맛있네요.” 한 모금을 마신 이준기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입맛은 안 변했네.” 문아린이 말했다. “다행이다.”
“이제 조금 편해졌어요?” 길수연이 물었다. “바이탈이 좋다고는 해도, 심정지까지 왔던 사람을 이렇게 끌고 나와도 되는지 조금 걱정돼서요.”
“머리가 좀 멍한 것 같기는 한데, 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아요.” 이준기가 대답했다.
“그럼, 염치불고하고 설명을 시작할께요.” 길수연이 말했다.
“네. 부탁합니다.” 이준기가 말하자, 문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하경택 구원자가 얘기한 대로, 세상에는 차원문이라는 것들이 많이 있어요. 대략 2년 전부터 세계 각지에 생겼죠. 주로 사람들 많이 사는 곳에 생긴다고는 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래요. 아무튼, 사람들에게 큰 위협이죠. 그냥 두면 안에서 괴물이 튀어나와 사람들을 해치니까요.”
“아까부터 말씀하시는 괴물 말인데요, 맹수 같은 건가요?” 이준기가 물었다.
“주로 오크(orc)나 고블린(goblin) 정도?” 문아린이 대답했다. “고블린이라고 해도, 보통 사람들은 감당 못할 정도로 강해. 총으로 죽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한테 총을 보급할 수도 없잖아? 게다가 총도 여러 방 맞아야 죽거든.”
“오크나 고블린이라면... 게임에 나오는 그런...” 이준기가 말했다.
“응, 맞아. 오크니 고블린이니 하는 건, 괴물들 생김새를 보고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부르는 거지.” 문아린이 대답했다.
“정말 기억이 하나도 안 나시는군요.” 길수연이 말했다. “이야기하다보면 기억이 나실까, 살짝 기대도 해봤는데.”
“죄송해요. 기억하려고 노력해보겠습니다.” 이준기가 말했다.
“뭘 자꾸 죄송하대. 다친 게 오빠 잘못도 아니고.” 문아린이 말했다.
“모든 전투가 그렇듯, 던전 전투도 정보가 중요합니다.” 길수연이 말했다. “정보의 중요성을 널리 알린 게 사실은 이준기 구원자님이에요.”
이준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야, 오빠.” 문아린이 말했다. “정보를 활용하면 던전 공략이 얼마나 쉬워지는지, 그걸 몸소 입증했다고나 할까.”
“이준기 구원자님은 인천 공항 던전 정보 수집을 자원하셨어요.” 길수연이 말했다. “다들 그 정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고가 난 거예요.”
“아,” 이준기가 말했다. “기억을 되찾지 못한다면, 정찰이 소용없게 되는 거군요.”
“네.” 길수연이 말했다. “이번 던전은 하필 인천 공항 활주로에 생겼고, 그래서 공항이 마비 상태예요. 하루에 수천억 원의 경제 손실이 있다고 말들 하죠.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차원문을 없애야 하는 상황인데, 정찰 갔던 준기 씨가 기억을 잃었으니, 일이 아주 늦어지게 됐어요. 이상덕 협회장이 조급해할 만하죠.”
“아뇨, 수연 씨, 난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문아린이 말했다. “이번 정찰은 준기 오빠가 자원한 거고, 준기 오빠가 아니었음 정찰할 사람 아무도 없었을 거예요. 전 세계로 봐도 몇 안 되는 B 등급 차원문이잖아요.”
***
이준기는 화장실에 가려고 나왔다.
화장실에 들어서는데, 수상한 기운을 풍기는 남자가 따라 들어왔다.
설마 아니겠지.
이준기는 소변기로 다가섰다.
문득, 그 남자가 품에서 권총을 꺼냈다.
1초도 안 걸렸을 그 동작이, 이준기의 눈앞에서 수십, 수백 개의 프레임으로 분해되어 펼쳐졌다.
남자의 수상쩍은 눈빛, 눈동자의 불안한 흔들림, 이어지는 입매의 굳어짐, 팔 근육의 움직임, 그리고 품에 손을 넣어 어떤 물건을 붙잡고 다시 빼내는 동작 하나하나가 영화 콘티처럼 마음의 눈앞에 죽 늘어섰다.
품속에서 나온 손이 쥔 물건이 총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이준기의 눈앞에 글자들이 떠올랐다.
- 귀검.
- 어둠 4, 바람 6 소요. 즉시 시전. 자신의 이동 속도를 400%, 공격 속도를 100% 증가시킵니다. 2초 동안 지속됩니다.
화장실의 비좁은 공간을, 이준기의 몸은 물 흐르듯, 바람 불듯 유연하게 움직였다.
총을 든 남자가 슬로 모션 비디오처럼 총을 앞으로 뻗고 방아쇠를 당기는 동안,
이준기는 벌써 그의 등뒤로 돌아가 오른손을 내뻗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