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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2. 나타남

by 히말

Episode 2. 나타남


탕!

이준기의 주먹에 맞은 남자는 화장실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소변기 쪽을 향해 날아간 총알은 벽에 맞고 튕겼다.


이미 반대 방향으로 이동한 이준기는 바닥의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신장을 맞았으니까.

그런데 내가 왜 이런 걸 알고 있지?

암살자의 지식을 아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화장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뛰어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소리죠?”

의사 하경택과 설 교수였다.

이준기가 대답했다. “이 사람이 절 공격하려 했습니다.”


얼떨결에 총알을 뱉어냈던 권총은 화장실 바닥 위에 떨어져 있었다.

하경택이 권총을 얼른 주우며 말했다. “총 소리였어요?”

설 교수가 말했다. “이게 무슨?”

하경택이 바닥에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가 두 손을 등 뒤에서 붙잡았다.


***


셋은 괴한과 함께 화장실에서 나왔다.

이준기를 향해 길수연이 다가섰다.

그녀의 오른손이 하얀색 빛으로 환하게 빛났다.

그녀는 그 손을 들어 이준기의 가슴으로 가져왔다.

“괜찮네요.” 그녀가 말했다. “다치셨나 했어요.”


“오빠, 괜찮아?” 문아린이 물었다.

“네. 그 사람이 총을 쏘기 전에 제압했어요.” 이준기가 대답했다.

“이럴 땐 내가 힐러가 아닌 게 원망스럽네.” 문아린이 말했다. “다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런데 누가, 왜, 준기 씨를 공격한 거죠?” 길수연이 말했다.

“글쎄요.” 이준기가 대답했다. “전 지금 기억도 없는 상황이니까.”

“짚이는 게 하나 있기는 하지만,” 문아린이 말했다. “지금 이런 말 해도 되나.”

“네, 뭐죠?” 길수연이 물었다.

“준기 오빠가, 이 얘기는 아무한테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문아린이 말했다.

“아, 두 분이 나눈 비밀 얘기?” 길수연이 말했다.

“비밀 얘기까지는 아니고요, 그냥 남들한테 얘기해봤자 분란만 일으킬 일이라고, 공론화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준기 오빠가 그렇게 얘기했었죠. 그런데 지금 준기 오빠가 기억을 잃었으니까,” 문아린이 말했다.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준기 오빠 본인도 기억 못 하는 얘기일 텐데.”

“그것도 그렇군요.” 길수연이 동의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이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문아린이 둘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일본?” 길수연이 말꼬리를 올렸다.

“일본이 저를 죽이려 한다고요?” 이준기가 물었다.


***


“일본이라면, 포럼과 관련이 있나요?” 길수연이 물었다.

“포럼 당시에, 준기 오빠가 도톤보리 차원문을 정리했잖아요? 그때, 일본인 구원자들이 많이 죽었고요.” 문아린이 말했다.

“네, 그랬죠. 일본 구원자들이 죽은 게 준기 씨 때문이라는 건가요? 한국 구원자들도 많이 죽었잖아요?” 길수연이 말했다.

“귀국하고 얼마 안 됐을 때, 준기 오빠가 광주에서 괴한에게 미행당한 적이 있어요.” 문아린이 말했다. “그 사람도 권총을 가지고 있었죠. 쏘지는 못했지만.”

“아,” 이준기가 말했다. “이게 처음이 아니라는 거네요. 저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녔길래...”

“오빠가 아니라 그쪽이 잘못된 거야.” 문아린이 말했다. “우리 길마가 그랬단 말이야. 오빠 아니면 일본에서 죽었을 거라고. 오빠에게 목숨을 빚졌다고.”


“전용택 길마가요?” 길수연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네. 일본에서 뭔가 미심쩍은 일이 있었어요. 대외적으로는 그냥 던전 안에서 몬스터들이 몰려서 그렇게 된 걸로 발표했지만, 뭔가 일이 있었다고요.” 문아린이 말했다.

“그건, 문제가 심각한데요.” 길수연이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협회 차원에서 진상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수연 씨,” 문아린이 길수연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협회장이 이상덕이잖아요.”

“아,” 길수연이 알겠다는 듯 입을 닫았다.

“자리를 옮겨야 하는 이야기인가요?” 이준기가 물었다.

“아마도요.” 길수연이 말했다.

문아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


길수연의 렉서스를 타고, 셋은 이준기가 단골이었다는 이탈리안 식당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이준기가 말했다.

“뭐든지 물어 봐, 오빠.” 이준기와 함께 뒷자리에 앉은 문아린이 대답했다.

“아까, 권총 든 사람을 제압할 때, 눈앞에 녹색 스크린 같은 게 보였거든요.” 이준기가 말했다.

“아, 상태창이 보이는구나. 다행이다.” 문아린이 손바닥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리고, 나한테는 말 놨으면 좋겠다.”

“그건, 좀. 여기 수연 씨도 계시고.” 이준기가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길수연이 운전석에서 말했다.

“제가 수연 씨와 말을 놓던 사이였나요?” 이준기가 물었다.

“아니, 그건 아니긴 해요.” 길수연이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놔도 되잖아요? 준기 씨가 저보다는 연상이니까.”

“일단은 말을 높이겠습니다. 그게 편하기도 하고,” 이준기가 말했다. “더 중요한 일이 많이 있으니까요. 일단, 그 상태창이라는 것에 대해 얘기해주시겠어요, 아린 씨?”


“그래, 오빠.” 문아린이 대답했다. “상태창은 구원자 관련한 다양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건데, 구원자 자신에게만 보여.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 켜지고, 필요없다고 생각하면 사라지지.”

“그렇군요.” 이준기가 말했다. “그런데 아까만 보이고, 그 이후로는 안 보이네요. 지금 보고 싶다고 생각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상태창 여는 건 아무런 노력이 필요 없는 일인데, 참 이상하네요.” 길수연이 말했다. “지금 준기 씨 상태가 보기보다 더 안 좋은 거라면 큰일인데.”

“아까는 위험을 감지해서, 무의식 차원에서 상태창을 열어버린 걸까요.” 문아린이 길수연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위험할 때는 작동한다는 거니까 다행이네요.” 길수연이 말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준기 씨. 아까 그 암살자는 어떻게 제압하신 거죠?”

“그 사람 뒤로 돌아가서 주먹을 날렸습니다.” 이준기가 대답했다. “그런데, 그때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사람 움직임이 아주 잘 보이더라고요.”

“구원자는 일반인에 비해 신체 능력이 아주 뛰어나니까, 그래서겠지.” 문아린이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길수연이 말했다. “그런 스킬이 있잖아요. 귀검, 이라고.”

“아!” 문아린이 말했다. “상태창만 열었던 게 아니라, 스킬도 쓴 거구나.”


***


셋은 이탈리아 식당으로 들어섰다.

“예전에 오빠와 함께 왔던 식당이야.” 문아린이 말했다. “그때 오빠가 주문했던 것 그대로 주문해줄 수도 있는데. 그럴까?”

“좋은 생각인데요.” 이준기가 말했다. “좋아하는 음식들을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해 볼 수 있겠어요. 마침 배도 고프고요.”

“음, 좋아.” 문아린이 손가락을 한 번 꺾고 나서 메뉴판을 열었다. “일단 브루스케타 좀 주시고요, 피자는 마르게리타, 파스타는 알리오 올리오에 해산물 좀 넣어주세요. 이준기 스타일, 기억하시죠?”

“네, 물론입니다.” 미소를 지으며 문아린에게 대답한 웨이터가 이준기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준기 님, 정찰은 잘 다녀오셨죠?”

“네, 물론이죠!” 문아린이 대신 대답했다. “저는 알리오 올리오 주시고요, 수연 씨는?”

“전 봉골레 주세요. 링귀니로요.”


웨이터가 멀어지자, 문아린이 속삭였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대답하지 않는 게 좋겠어, 오빠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길수연이 호응했다. “준기 씨 상태가 알려져서 좋을 거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이준기가 말했다. “그런데 여긴 제가 자주 오던 식당인가 봐요? 웨이터가 절 아는 거죠?”

“우하하!” 문아린이 테이블을 가볍게 치며 웃었다. “이러면 안 되긴 하는데, 너무 웃기고 재미있다, 이 상황.”

길수연이 말했다. “준기 씨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유명인이니까.”

“아,” 이준기가 말했다. “구원자라서?”

“구원자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축에 속하지, 오빠는.” 문아린이 대답했다. “그런데, 음식은 어때?”

“커피와 마찬가지로 기억이 나는 것 같아요. 알리오 올리오 먹고 싶네요.”


***


“제기랄.”

캘리포니아 라호야(La Jolla).

길드 <101> 소유 빌딩 4층에 위치한 코너 오피스.

넓은 창 바깥으로 태평양과 푸른 하늘이 그림같이 펼쳐져 있다.

책상 위에는 상아가 장식되어 있고, 벽에는 서부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숫사슴 머리 박제가 걸려 있다.


책상 뒤 회전 의자에 앉은 리암 화이트헤드(Liam Whitehead)는 오른손에 감겨 있던 붕대를 풀었다.

힐러에게 치료를 받아,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아주 희미하게 욱씬거리는 느낌이 남아 있다.

상처가 다 낫지 않은 건가 해서 길드 힐러에게 손을 내보였지만, 아무 이상 없다고 했다.

찜찜해서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불편하기만 하다.


아까, 조슈아(Joshua)가 붕대를 보고 물었다. “뭐야, 리암, 다쳤어요?”

“아냐, 조쉬. 손에 땀이 많이 나서.” 급조한 대답이 허접하다고 생각했다.

“아, 뭐야. 놀랐잖아요.” 조슈아가 웃었다. “다치면 안 돼요, 리암. 당신은 우리 길드 기둥이니까.”


히틀러 유겐트(Hitlerjugend).

금발 벽안의 조슈아 테일러(Joshua Taylor)를 보면 자꾸 나치 독일 말기에 만들었다는 포스터가 떠오른다.

나치 완장을 그 호리호리한 팔에 둘러보고 싶다.

왜 그런 상상을 하는 걸까.

조슈아는 전 세계 최상위권 구원자다.

리암 본인도 랭킹 최상위권이지만, 조슈아 테일러는 완전히 다른 수준이다.

언제나 싱글거리는 얼굴이지만, 까불어볼 상대가 아니다.


길드 101은 큰 길드라고는 할 수 없다.

멤버는 다 해서 40여 명 정도지만, 사람 구실 하는 수준은 20명이 채 안 된다.

그래도, 전형적인 강소길드다.

조슈아 테일러라는 존재 때문이다.

비공식적으로 현재 전 세계 랭킹 4위.

잠재 역량으로는, 분명히 1위다.


조슈아 테일러라는 변수는 내 운명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든든한 조력자일까.

아니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지만, 나를 막아서는 존재가 될까.


지금까지는 그냥 멋대로 살아왔다. 인정한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그분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운명의 소환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신의 선택?

리암은 그분을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


두 달 전, 보스턴이었다.

형제 몇 명이 백인쓰레기 놈들과 시비가 붙은 현장을 우연히 지나쳤다.

백인쓰레기 중 한 놈이 화염을 감은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숫적으로 우세하던 흑인 형제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주춤거렸다. "쳇, 구원자라니."


멀리서 길을 가던 리암이 그들을 향해 방향을 틀며 외쳤다. “그 손, 내리지 않으면 후회할 거다.”

화염을 감고 있던 녀석이, 네놈은 뭐냐는 듯한 표정으로 리암을 쏘아보았다.


그때, 흑인들 무리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리...리암! 리암 화이트헤드!”

그를 쏘아보던 백인은 급히 화염을 거둬들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주변의 동료들을 한번 둘러보고 나서, 그는 황급히 말했다. “여... 여긴 동부연합 관할이다! 네... 네가 끼어들 일이 아냐!”


“일반인 상대로 린치하는 게 동부연합에서는 허용되는 건가?” 리암이 위압적인 저음으로 물었다.

“시... 시비를 걸어온 건 이 녀석들이다..” 그가 대답했다.

형제들이 그런 적 없다고, 시비는 네놈들이 먼저 걸지 않았느냐고 외쳤다.


당장 죽여버릴 수 있다.

법 따위는 무시할 수 있다.

그러나 길드 규칙은 그럴 수 없다.

길마가 문제가 아니라, 조슈아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패주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그분이 강림하셨다.


***


8월 말 따뜻한 공기가 갑자기 냉랭해졌다.

실내였다면 누군가 에어컨을 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주변이 갑자기 싸늘해지자 모두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거대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바닥이 파였다.

리암과 백인들 사이에서 거대한 오크가 몸을 일으켰다.


“오... 오크?” 백인 구원자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오크가 뭐라고 말하면서 오른손을 들었다.

멱살을 잡힌 듯한 포즈로, 백인 구원자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켁... 켁... 사... 살려줘...!” 백인 구원자가 질식하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머리를 터뜨려라.” 오크가 영어로 말했다.


백인 구원자는 겁먹은 표정을 지었고, 리암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오크를 쳐다보았다.


오크가 다시 영어로 말했다. “리암, 너에게 말하는 거다.”


문아린.png 문아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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