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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3. 알아챔

by 히말

Episode 3. 알아챔


리암이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공중에 매달려 있는 백인 구원자의 머리를 향해, 리암은 팔을 뻗었다.

그의 거대한 손바닥이 백인의 머리를 감싸쥐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착지하는 리암의 궤적을 따라, 백인 구원자가 끌려 내려왔다.

그의 머리가 콘크리트 바닥에 쳐박혔다.


“사... 살려줘!” 백인 구원자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울부짖었다.


“죽여라.” 오크가 명령했다.


리암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쓰러진 백인 구원자의 머리 위로, 그것이 낙하했다.

중력가속도의 몇 배로 가속한 그 물체는 백인 구원자의 머리를 꿰뚫고 나와 콘크리트 바닥에 멈춰섰다.

피 웅덩이가 만들어지는 가운데로 굴러 나온 그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철제 주사위.


백인들이 몸을 떨었다.

만면에 희색을 드러내는 흑인들 중 하나가 외쳤다. “정의의 주사위!”


“잘했다.” 오크가 말했다. “멋도 부릴줄 알다니, 내가 잘 골랐군.”


“당신은 누구십니까?” 리암이 평소 그답지 않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확실하다.

지금 앞에 서 있는, 오크의 형상을 한 이 존재는 손가락만 튕겨서 나를 죽일 수 있다.

포식자 앞에 선 초식동물이 이런 느낌이겠지.


“나는 북부 연합의 왕자, 그래엄(Gra-Am)이다.” 육중한 저음이 골목 안 바닥으로 내리깔렸다.


“그래엄 님.” 리암은 무릎을 꿇었다. “충성을 맹세합니다.”


사람들은 리암의 행동에 어리둥절해하며 주변을 살폈다.

백인들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흑인들이 하나둘 리암의 뒤로 돌아와 무릎을 꿇었다.


“훗.” 그래엄이 말했다. “나약한 존재들, 역겨운 비겁함.”


백인들도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내 이름을 들은 이상, 너희들은 죽어야 한다.” 그래엄이 말했다.


순식간에, 리암을 제외한 모두가 제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리암은 침을 삼켰다.

주변을 돌아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리암,” 그래엄이 그를 불렀다. “일어나라.”


***


원래도 강했던 리암 화이트헤드.

그래엄의 가호를 받고 더욱 강한 구원자로 성장했다.


그래엄의 명령에 따라 리암은 솔로잉을 시작했다.

차원문을 혼자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헬렌 카자크(Helen Cossack)나 조슈아 테일러와 같은 최상급 구원자들이나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위업을, 리암은 그래엄의 도움으로 해냈다.


리암은 훨씬 빠른 속도로 레벨업을 했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레벨업에 필요한 경험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최상위권에서 달리는 구원자들은 렙업 속도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다.


리암 화이트헤드는 전 세계적인 스케일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구원자다.

미국에서는 10위권에 불과한 리암이지만, 일본이나 한국 랭킹 1위 구원자보다도 높은 레벨이다.

그런 그가 그래엄을 만나고 두 달 사이에 조슈아와의 레벨 격차를 두 개나 줄였다.

솔로잉으로 인한 경험치 싹쓸이 효과다.


그래엄이 아니었다면 솔로잉에 도전할 생각도 하지 못했을 그가, 레이싱 트랙의 최선두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더는 또라이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튀는 행동 없이도 충분히 주목을 받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


10월 말, 리암은 그래엄의 특별 명령을 받았다.

길드 사무실에서 리암은 컴퓨터를 켰다.

검색어를 입력했다.


- Jun-Ki Lee


익숙지 않은 동양인 이름이지만, 대소문자와 하이픈까지 완벽하게 기억했다.

주인님의 명령이니까.


그런데 인터넷 검색 결과가 시원치 않았다.

아직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길드 내부망에 연결했다.

그 이름을 철자 하나하나, 다시 쳐내렸다.

내부망에도 아무런 정보가 없다.


정보를 모아야 한다.

그래엄을 만나고 나서 진중해진 성격이라 그런 측면도 있지만,

원래의 리암도 나름 신중한 성격이다.

이렇게 중요한 임무라면 더욱 그렇다.

리암은 전화를 걸었다.


“어, 리암? 웬일이에요? 나한테 전화를 다 하다니?”


과연 그렇다.

인종차별주의자인 리암이 동양인 구원자에게 전화를 하다니.

그것도 레벨이 훨씬 낮은 녀석에게.


“너, 한국계지?” 리암이 물었다.

“네, 그래요.” 상대의 목소리에 살짝 짜증이 묻어났다. 리암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어로 검색할 일이 있어서 그런데 말야.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네?”

“영어로 검색하니 검색 결과가 아예 없어. 그래서 한국어로 검색을 좀 해서, 검색 결과를 나에게 보내줘. 번역해서 말야.”


잘 알지도 못하는 길드원에게 하는 부탁 치고는 상당한 품이 드는 내용이었지만, 리암은 상관하지 않았다.

리암은 상대보다 레벨이 배는 높다.

게다가 리암이 성질 더럽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부탁이라고는 해도, 상대방이 거절할 가능성은 없다.


“네... 알겠어요. 뭘 검색해야 하죠?”

“한국인 구원자야. 이름은 Jun-Ki Lee.”

“아, 이준기!”

“아는 사람이야?”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니지만, 나름 유명하죠.”


***


27레벨이라니, 그래엄 님은 나를 뭐로 보시는 건가.

목표 대상의 레벨을 확인하자, 순간적으로 짜증이 일어났다.

나보다 10레벨이나 낮은 녀석이라니.

그냥 한손으로 가볍게 눌러주마.

창밖으로 펼쳐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리암은 생각했다.


10월 28일 아침 6시, 인천 공항 제2활주로 중간 쯤.

바로 그 시공간 좌표를 향해 그는 이동 중이었다.

활주로 위에 발생한 차원문으로 인해 인천 공항은 폐쇄되어 있었다.

캘리포니아에서 김포 공항으로 가는 직항은 없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도쿄로, 그리고 거기에서 김포 공항으로 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동선을 계획해서 리암은 그래엄에게 보고했다.


“그건 내가 도와주마.” 그래엄이 말했다. “도쿄까지만 이동하면, 인천 공항으로는 내가 옮겨주지.”

“감사합니다, 그래엄 님.”


공간 이동, 그것도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이동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궁금하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그런 걸 물을 정도로 편한 사이가 절대 아니다.

몇 차례 느낀 것이지만, 그래엄의 성격은 리암 본인과 비교해도 꿀릴 게 전혀 없을 정도로 불같았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제가 그놈보다 레벨이 10 정도 높습니다. 그냥 벌레 죽이듯이 처리할 수 있습니다.” 자신없는 표현을 싫어하는 그래엄의 성격을 알기에, 리암은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하는 대신 단정적으로 대답했다.

“좋아. 아주 마음에 드는 태도다. 하지만 명심해라.”


그래엄의 위압적인 목소리에 리암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실수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던 그래엄의 표정을 떠올리니 리암은 오금이 저려왔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토록 두려운 느낌은 처음이었다.


***


나름 유명하다니, 웃기는군.

27레벨인 녀석이 유명하다니, 역시 작은 나라라서 그런가.


“27레벨이 왜 유명해?” 리암이 물었다.

“각성한 지 두 달 됐대요.”

“흠.” 약간 놀랐지만, 리암은 태연한 척했다.

“안 놀라시네요.” 상대방은 조금 실망한 투로 말했다. “하긴, 리암도 요즘 렙업 속도 장난 아니죠.”

“충분히 놀라고 있어. 엄청난 렙업 속도군. 그런데 영어 검색 결과는 없다?”

“렙업 속도가 빠르기는 해도, 아직 저렙... 이라서겠죠? 저보다는 훨씬 높지만.”

“구원자라는 존재, 그냥 어느날 죽어 없어지면 그만인 존재니까.”

“리암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군요. 언제나 자신만만하시니, 그런 생각은 아예 안 하실 것 같은데.”

“흐흐흐.” 리암이 음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죽는다고는 안 했어.”

“아, 예.” 떨떠름한 목소리였다.


활주로 옆 화물창고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차원문을 바라보며 리암은 이틀 전 전화 통화를 떠올렸다.

전화 상대는 겨우 20레벨 짜리 초짜 구원자, 게다가 한국계다.

거드름을 피우기에 더 좋은 상대도 없을 것이다.


20레벨 짜리와 말을 섞는 일 자체가 없어서 몰랐는데, 저레벨 구원자를 상대로 으스대는 것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길드 2위인 리암이지만, 1위 조슈아는 넘사벽이고, 3위인 길마도 만만찮은 존재다.

그래서 밖으로 떠도는 것이었고, 그러던 중 동부 연합 관할구역에서 알짱거리다가 그분을 만났다.


오크. 리암은 생각했다. 그래엄도 오크다.

하찮은 존재다, 오크라는 건.

코볼드(kobold), 고블린에 이어 나타나는 소위 티어 3 몬스터.

주술사, 광전사, 족장 정도 되는 오크는 확실히 더 강하기는 하지만, 더는 위협이 되지 않는 몹.

30레벨 이후에는 티어 4로 불리는 놀(gnoll) 종족을 점점 더 많이 만나고 있다.


그래엄이 과연 오크일까.

영어로 말하는 오크를 본 것도 처음이고, 영어든 오크어든 오크와 대화를 해본 것도 처음이다.

그러나 대화를 하지 못했더라도, 리암은 그래엄에게 감히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존재 자체가 뿜어내는 위압감이 대단했다.


하긴, 족장도 아니고 왕자라고 했지.

오크 왕자라면, 오크 전체에서도 탑 티어겠지.

강한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차원이 다른 강함이다.


도쿄 나리타 공항에서 인천 공항 활주로 인근까지, 리암은 사뿐하게 날아왔다.

날아왔다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다.

바깥 풍경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뭔가 다른 차원의 통로 같은 걸 지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공항까지 옮겨온 기술도 신비하지만, 제일 불가사의한 것은 처음 만났던 그때의 느낌이다.

깡패들과 대치하던 보스턴 골목이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그래엄이 사라지고 나자, 시체들도 싹 없어졌다.

텅 빈 골목에 리암 혼자 남겨져 있었다.


백인 구원자를 공중에 띄운 기술은 아마도 텔레키네시스(Telekinesis)겠지만,

예닐곱의 깡패들을 한 순간에 죽여없앤 기술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런 상대라면 조슈아 테일러나 헬렌 카자크도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처치하라는 상대가 겨우 27 레벨 짜리 구원자라니.

왜 스스로 하지 못하는 걸까.

감히 묻지는 못했지만, 그게 궁금하기는 하다.

그래엄이 하지 못하는 것도 있나 보다.


‘그분에게 내가 쓸모가 있으려면, 그 편이 낫긴 하지.’


그때, 차원문 소용돌이 물결에 간섭 무늬가 나타났다.

누군가 나오려고 하는 것이다.


탓!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리암이 바닥을 박차고 번개같이 튀어나갔다.

차원문을 포위하고 있던 경찰들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외쳤다.


“멈춰라! 스톱!”


그런 말을 들으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니다.

리암은 원형으로 늘어서 있던 경찰 중 한 명을 가볍게 팔꿈치로 툭 치며 나아갔다.


“으악!” 맞은 경찰이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감싸쥐고 쓰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깨진 헬멧이 뒤쪽으로 날아갔다.


“멈춰라! 사격하겠다!”


이중 포위망의 안쪽에 있던 군인들이 사격자세를 취하며 위협했다.


“흑인인 것 같은데? 영어로 해야 하나?”

“스... 스톱!”


“모래 폭풍!” 리암이 자세를 낮추고 멈춰서며 외쳤다.


활주로 위로 모래 폭풍이 일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모래 알갱이가 아니라 스키틀즈 크기의 칼날들이 날아다닌다.

군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모래 폭풍에 맞은 방탄복이 걸레처럼 해졌다.


포위망이 뚫리자, 군인 지휘관이 무전기에 대고 소리쳤다. “탱크! 탱크 사격 준비!”

이중 포위망의 바깥에서 대기하던 탱크의 포탑이 돌기 시작했다.


“정말 귀찮게 구는군!” 리암은 포탑이 도는 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염 폭풍!”


탱크가 화염에 휩싸였다.

해치가 열리고, 몸에 불이 붙은 병사들이 탱크 밖으로 기어나왔다.


드디어 차원문 바로 앞까지 다가온 리암.

그의 앞에 사람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스팅(sting)!”


리암이 복서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오른손 주먹을 앞으로 내질렀다.


리암.png Liam Whitehead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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