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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4. 부딪힘

by 히말

길수연, 문아린, 그리고 이준기는 조금 이른 점심 식사를 마치는 중이었다.


“저는 참, 느끼한 남자였군요.” 이준기가 기름이 잔뜩 남은 알리오 올리오 접시에 빵을 문지르며 말했다. “피자에, 알리오 올리오에, 지방 범벅 식단인데요.”


“아하하, 그건 유머야?” 문아린이 말했다. “썰렁한 건 여전하네. 오빠다워서 좋다!”


“썰렁한 건 죄송하네요.” 이준기가 과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숙녀 두 분 앞에서 너무 게걸스럽게 먹은 것 같아서요.”


“그건 저도 마찬가진데요.” 길수연이 말끔히 비워진 접시를 살짝 들어 보였다.



“커피에, 좋아하는 음식까지 먹었는데 기억이 안 돌아오다니, 또 뭘 해야 하죠?” 이준기가 물었다.


“잠을 자야 할까?” 문아린이 대답했다.


“그것도 괜찮은 생각인데요.” 이준기가 말했다. “졸리지 않아서 문제지만.”


“게다가, 24시간이 넘게 주무셨는데.” 길수연이 말했다.



“그렇다면, 잠깐 바람이라도 쐬는 건 어때?” 문아린이 이준기를 돌아보며 말했다. “광주까지 다녀오자.”


“광주?” 길수연이 물었다.


“수연 씨는 모르시겠군요. 아차, 지금은 준기 오빠도 마찬가지지.” 문아린이 말했다. “저, 광주에서 작은 카페 하던 사람이에요. 지금은 동생이 맡아서 하고 있고요. 알바도 한 명 두고 있지만.”



“아린 씨 카페 가는 거예요? 너무 폐 끼치는 거 아닌가요?” 길수연이 말했다.


“괜찮아요. 전 사장 월권이죠 뭐.” 문아린이 말했다. “카페인 충전도 하고, 오다가다 바람 좀 쐬다보면 기억이 돌아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좋은 생각 같아요.” 길수연이 말했다. “준기 씨는 어때요?”


“저도 좋습니다.”



***



일행은 문아린의 빨간색 머시디즈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문아린은 교통 신호를 지키는 것은 물론, 고속도로 속도 제한도 철저히 지키면서 운전했다.



“교통 규칙을 이렇게 철저히 지키는 구원자는 처음 봐요.” 길수연이 말했다. “저도 교통 규칙을 지키는 편이지만, 속도는 한 10킬로미터 넘기기도 하는데.”


“아, 그거요.” 문아린이 대답했다. “저도 원래는 시속 200킬로미터 넘게 밟고 그랬어요.”


“그랬군요.” 길수연이 대꾸했다. "다들 그러니까."


“그런데, 준기 오빠가 지하철 타고 다니는 거 보니까, 왠지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하.” 길수연이 호응했다.



“그건 그냥, 제가 가난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이준기가 얼른 말했다.


“아하하! 오빠는 아무튼 어색한 분위기를 못 참는 거 같아. 별로 칭찬한 것도 아닌데.” 문아린이 말했다. “그런데, 뭐가 생각나기라도 한 거야? 아니면 또 그냥 썰렁한 유머?”


“준기 씨가 가난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길수연이 말했다. “뭔가 생각나신 거예요?”



잠깐 기다렸다가 이준기가 대답했다. “우리 집, 돈이 없었던 것 같기는 해요.”


“구원자 각성 전 얘기죠?” 길수연이 물었다.


“구원자 관련된 것들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니, 그 전이겠죠.”



“경찰로 일하던 때는 기억나는 거야?” 문아린이 물었다.


“아뇨. 그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이준기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대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서 큰 빚을 진 것은 기억이 나요.”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길수연이 말했다.


“나도 처음 듣는 얘기다. 그건.” 문아린이 말했다.


셋은 잠시 조용해졌다.



***



카페 <별>은 사무실 빌딩이 밀집한 지역에 있었다.


좋은 위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주변을 한번만 둘러봐도 생각이 바뀐다.


근처가 온통 카페 천지다.



“그래도, 점심 시간에는 줄 서는 카페예요. 지난 9월말에 갑자기 유명해지기 전에도 말이죠.” 문아린의 동생, 문아영이 말했다.


“9월말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이준기가 물었다.


“네?” 문아영이 되물었다.


“아하하, 오빠, 또 썰렁하기는.” 문아린이 끼어들었다. “우리, 저쪽 자리에 앉아 있을게. 진동벨로 알려줘.”



문아린은 길수연과 함께 이준기를 끌고 안쪽 테이블로 이동했다.


작은 테이블 여섯 개밖에 안 되는 작은 카페다.



“잘 하셨어요, 아린 씨.” 길수연이 말했다. “동생이라고는 해도, 지금 상황을 더 많은 사람이 아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또 말 실수를 한 거군요.” 이준기가 말했다. “가만히 있겠습니다.”


“오! 이건 또 새로워. 하하.” 문아린이 말했다. “의기소침한 준기 오빠라니, 짤방 감이네.”


“듣고 보니 그렇군요.” 길수연이 말했다. “소극적인 모습의 준기 씨라니, 상상도 못 해봤어요.”



“그것 참 이상하네요.” 이준기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지금 기억으로는, 저는 저 자신이 내향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저엉말?” 문아린이 말했다. “구원자로 각성하면 성격이 바뀌기도 하는 걸까? 아니면...”


“기억상실증의 영향일 수도 있겠죠.” 길수연이 말했다.



“그렇다면 좀 곤란하네요.” 문아린이 말했다. “오빠의 색다른 면을 본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네요.”


“자꾸 재촉하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어때요, 준기 씨? 이 카페에는 예전에도 오신 일이 있었잖아요. 뭔가 떠오르는 것, 없나요?” 길수연이 이준기에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이준기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하루 정도 쉰다고 생각해.” 문아린이 말했다. “그동안 뭐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달렸잖아. 푹 자고 나면 뭔가 생각날지도 모르니까, 마음 편하게 가져.”


“고마...워.” 우물쭈물하면서, 이준기는 말을 놓았다.


“헤헤. 좋다.” 문아린이 말했다. “말 놓으니까 조금 더 준기 오빠 같아.”



***



“여기?” 이준기가 물었다.


“응.” 문아린이 대답했다. “내가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경찰서 기록에 의하면 여기라고 해. 오빠도 그렇게 말했고.”



셋은 광주에서 나름 유명한 호텔 옆 골목에 서 있었다.


문아린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 이준기가 권총을 든 괴한에게 미행당했던 곳이다.


오전에 병원 화장실에서 괴한에게 습격당할 당시, 기억의 일부가 돌아왔다.


광주에 온 김에 비슷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장소로 와본 것이다.



“모르겠어. 아무 기억도 안 나.” 이준기가 체념하는 투로 말했다.


“역시, 좀 쉬어야 하는 걸까.” 문아린이 말했다.


“미행 사건이 일어난 게 늦은 저녁이라고 했지.” 이준기가 물었다.


“그래.” 문아린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 시간에 다시 와보는 게 좋겠어.”



***



“후후,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골목을 나가려는 그들의 등 뒤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문아린은 상대를 알아보고 소리 질렀다. “주석!”


“반가워요, 아린 누나.” 머리를 빨갛게 물 들인 남자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채 이쪽으로 걸어오며 대답했다. “준기 형도 안녕하세요.”


“잠깐, 기다려봐.” 인사에 답하려는 이준기를 막아서며 문아린이 앞으로 나섰다. “주석, 무슨 일이야? 우리가 서로 반가워 할 사이는 아니잖아?”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것은 길수연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녀는 이준기와 함께 문아린과 주석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하잖아요. 할아버지가 저한테 그런 얘기 많이 하셨죠. 제가 하도 말썽만 부리니까.” 주석이 싱긋 웃으며 멈춰 섰다.


주석과 세 사람 사이의 거리는 5미터를 살짝 넘는다.



“우린 바빠. 할 말 없다면 이제 가봐.” 문아린이 손사래를 쳤다.


“후후후. 할 말이 왜 없겠어요. 말씀드렸잖아요.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무슨 얘기야?” 문아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도와드릴게요.” 주석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준기 형한테는 빚진 것도 있으니까.”



“뭘 도와줘?” 방어 자세로 선 문아린이 물었다.


“갑니다.” 여전히 두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주석이 오른발 끝으로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뭐 하는 거야? 가만히 있지 못해!” 문아린이 방어 자세를 취한 상태로 왼손을 들었다.


흙바람이 그녀의 왼손을 감싸고 돌았다.



“소용없어요, 아린 누나.” 주석이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목표는, 준기 형이니까.”


“우릴 상대로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우린 셋이야.”


“제 속도를 아시잖아요. 기억나게 해드려요?”



문아린이 마른 침을 삼켰다.


흙바람을 휘감은 왼손을 앞으로 든 채, 그녀는 주석의 발걸음을 주시했다.



“귀검!”


주석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



“불워크(Bulwark)!”


문아린이 왼손을 앞으로 내뻗으며 소리쳤다.


보도블럭이 깔린 골목길 바닥에서 흙벽이 일어났다.


추켜세워진 흙벽은 전방으로 물결치듯 전진했다.



“하하하!”


주석의 웃음소리가 오른쪽 벽을 타고 흘렀다.



“이런, 벽을 타고 달리는 거야?” 주석을 저지하는 데 실패한 문아린이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뭐죠, 저 사람?” 길수연이 물었다. “우릴 공격하는 거예요?”


“그런 거겠죠?” 문아린이 말했다.



“아뇨. 목표는 접니다.” 손을 들어올리려는 길수연을 이준기가 막아섰다.


오른쪽.


아니, 왼쪽 귓가로 미세한 공기의 떨림이 전해졌다.



녹색 화면이 떠올랐다.


병원 화장실에서 습격당할 당시 봤던 그것.



- 텔레키네시스. 마나의 책 5권 소요. 일정 시간 동안 원격으로 힘을 가합니다. 지속 시간, 조작 가능한 대상의 수, 조작 가능한 힘의 종류와 섬세한 정도는 모두 시전자의 숙련 수준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웅.


이준기의 왼쪽 옆구리 근처에서 주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손에는 군용 단검이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바닥을 딛는 자세에서 그의 움직임은 멈춰진 채였다.



잠시 동안, 주석은 몸을 미세하게 떨었다.


보이지 않는 힘에 저항하려고 이를 악물었다.


눈동자는 이준기를 향해 움직였지만, 팔다리는 공중에 묶인 상태 그대로였다.



팡!


다음 순간, 주석의 몸이 뒤쪽으로 멀리 날아갔다.


호텔 벽을 부딪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양팔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는 듯 싶더니, 주석은 다시 털썩 쓰러졌다.



얼굴을 바닥에 깔고 엎어진 채, 주석이 웃어젖혔다. “으하하하!”


앞으로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이고 이준기는 잠시 자기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이준기는 고개를 들고 쓰러진 주석을 바라보며 외쳤다.


“주석!”


KMAMcP27juL2fG76brZw3XyGMUU.png 주석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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