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어제 아침.
동 트기 직전 새벽 빛을 받은 인천 공항 차원문의 푸른 소용돌이에 잔물결이 일었다.
누군가 나오려는 것이다.
차원문 옆으로 나타난 180센티미터 높이의 실루엣이 조금씩 진해졌다.
차원문을 드나드는 3초 남짓의 시간 동안, 시각은 뿌옇고 흐릿하다.
그렇게 시각을 거의 박탈당한 상태였지만, 이준기는 위협을 감지하고 몸을 낮췄다.
구원자의 공격이라 해도, 일반적인 스킬이었다면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날아온 것은 일반적인 공격이 아니었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리암 화이트헤드의 시그니처 스킬, 스팅.
실루엣의 머리를 겨냥한 리암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공기 중에서 흩어진 타격의 운동 엔너지는 다른 차원의 공간에서 다시 하나로 뭉쳤다.
그리고, 이준기의 무게중심을 향해 날아들었다.
“헉!”
복부에 느껴지는 둔탁한 타격에 이준기는 소리를 질렀다.
예상치 못한 타격에 놀라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고유 스킬 스팅은 단지 빗나간 타격을 적중시키는 데 멈추지 않았다.
복부로 꽂힌 타격은 피부 안쪽 5센티미터 정도의 위치에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직 당해본 적이 없어 확실치는 않지만, 내장이 파열되는 느낌이 분명했다.
내파 피해(implosive damage)를 입히는 걸 보니, 아까 적의 주먹을 감돌던 흙 원소 오라는 인챈트였던 모양이다.
이준기는 신음을 토해내지 않으려고 이를 꽉 물었다.
“귀검!”
이준기는 민첩성을 폭발시키는 스킬을 발동했다.
눈앞에서 이준기의 모습이 사라지자, 리암의 귓가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주인님이 특별히 지시한 임무다.
게다가 10레벨이나 낮은 상대다.
실패한다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두려움이 일었다.
굉음이 그의 귀를 강타했다.
잠시 동안 모든 소리가 차단되고, 뒤이어 삐 하는 소리가 그의 청각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귀를 찢는 이명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가운데,
리암과 이준기의 사이의 한 점에서 작고 반투명한 정육면체가 나타났다.
정육면체는 급속한 속도로 크기가 커졌다.
마치 우주가 폭발하는 것처럼.
“으하하하!”
호쾌한 오크의 웃음소리.
적어도 소대장급이라고, 이준기는 생각했다.
반사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정보였지만, 차원문 바깥에서 오크 소리라니?
조금 전에 차원문을 나왔으므로, 차원문읕 통해 오크가 바깥으로 나오려면 적어도 24시간 이상이 지나야 한다.
그러니까, 이 오크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나타난 것이다.
어쨌든 이준기는 계산대로 움직였다.
귀검을 발동했으니 2초밖에는 시간이 없다.
그사이에 도망을 치든지 적을 쓰러뜨려야 한다.
물론 이준기는 언제나 적을 쓰러뜨리는 쪽을 선택해 왔다.
하지만 내상을 입은 상태다.
게다가 적은 고수가 틀림없다.
성흔을 발동해 적의 상태창을 확인하지 않아도, 적의 강함이 충분히 감지된다.
여전히,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이준기는 자신의 머리 위로 내뻗어진 적의 주먹을 아래에서부터 가볍게 쳐올렸다.
리암의 손목이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동작과 거의 동시에, 이준기는 적의 발목을 향해 달려들었다.
손에는 주머니에서 꺼낸 신용카드가 들려 있었다.
그걸 두 손가락 사이에 쥐고 적의 아킬레스건을 향해 그으려는 순간.
그의 몸이 얼어붙었다.
‘엇?’
적에게 맞아본 것도 오랜만이었지만, 이런 느낌은 아예 처음이었다.
움직이는 도중에 몸이 경직되다니.
그것도 스킬 발동 도중에.
“하하하하!”
다시 오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준기, 네놈은 여기서 죽는다!”
이준기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긴장했던 리암은,
그의 뒤에서 모습을 다시 드러낸 이준기를 보고 당황했다.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주변 공간을 완전히 둘러싼 정육면체 안에서 나타난 그의 주인, 그래엄의 모습이었다.
그래엄의 육중한 손아귀에서 뻗어 나온 염력에 붙들린 것처럼, 이준기는 달리는 자세 그대로 얼어 있었다.
“넌 뭐냐?” 이준기가 물었다.
“죽어라.” 그래엄이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리암을 향해 말했다. “뭐 하고 있느냐? 죽여라!”
“네... 네! 주인님!”
리암이 이준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주먹에 장착된 너클의 징이 금속성 광채를 번뜩였다.
***
“스팅!”
리암 화이트헤드가 앞으로 내지르는 주먹이 녹색으로 빛났다.
이번에는 물/흙 혼합 속성인 독성 인챈트다.
단 한 번의 타격도 허용하지 않고 리암 화이트헤드를 발라버렸던 이준기의 기억이 혼란을 가중시켰다.
방대한 조사로 늘 데이터베이스를 꽉꽉 채우고 있던 반(反)-테일러 연합의 리더, 이준기.
조슈아 테일러의 심부름꾼이자, 같은 길드 2인자였던 리암 화이트헤드에 대한 조사는 물론 철저히 되어 있었다.
전투는 1분도 지속되지 못했다.
단 한 번의 타격도 성공하지 못하고 피투성이가 된 리암 화이트헤드가 소멸 스킬을 써가며 꽁무니를 빼는 것이 결말이었다.
그를 추격해서 마무리하고 돌아온 키라트 싱(Keerat Singh)이 말했다.
“준기한테 일방적으로 털려서 그런지, 나한테도 꼼짝 못 하던데. 죽이기가 미안할 지경으로 떨고 있었다고.”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그림과는 전혀 달랐다.
이준기는 결국 성흔을 발동했다.
이르헬의 눈.
구원자든 몬스터든, 상대의 상태창을 훔쳐보는 능력.
- 리암 화이트헤드. 37레벨. 스킬 트리는 어둠, 불, 흙, 마나. 시그니처 스킬은 스팅. 성흔은 래리얼의 강타.
래리얼의 강타(Larial's Heavy Blow).
타격 시 일정 확률로 상대의 무기나 방어구를 땅에 떨군다.
무장 상태를 흐트러뜨리는 강력한 전설급 성흔.
시그니처 스킬 스팅, 장신구 운명의 주사위(Dice of Destiny)와 함께 리암 화이트헤드를 정의하는 세 가지 중 하나다.
그러나, 타격을 주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다.
그가 기억하는 전투에서 리암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어디선가 나타난 오크의 염력 손아귀에 잡혀, 이준기는 꼼짝도 못 하는 상태다.
‘얼어 죽을.’
마음속이지만, 이런 욕설을 해보기는 정말 오래간만이다.
눈앞으로 날아드는 주먹 위에서 번쩍이는 너클을, 이준기는 두 눈 똑똑히 뜨고 응시했다.
파칭!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새벽녘 아스팔트 바닥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몸 쪽으로 파고들었다.
이준기는 두 손바닥으로 바닥을 지지한 채, 뒤로 넘어져 있다.
앞쪽으로 20미터 쯤 떨어진 거리에는, 리암 화이트헤드가 비슷한 자세로 바닥에 쓰러져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갑자기 난입했던 오크는 공중에 매달려 있다.
거대한 거품이 몸을 감싼 채, 오크는 제뜻대로 되지 않는 사지를 버둥거리는 중이다.
“뭐냐!” 오크가 성난 목소리로 포효했다.
오크와 이준기, 그리고 리암을 세 꼭짓점으로 하는 이등변 삼각형의 밑변에 한 여자가 서 있다.
짧은 은발 곱슬머리 사이로 아침 바람이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바깥이 쌀쌀한 걸 몰랐는지, 민소매 셔츠에 반바지 차림이다.
그녀는 리암을 바라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을 튕기자, 리암이 뒤로 날아갔다.
공중을 날아간 리암은 거대한 정육면체의 벽에 부딪히고, 사라져버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공중에 매달린 오크가 성난 목소리로 일갈했다.
대꾸 없이, 여자는 오크를 쳐다보았다.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가 자기 입술 위에 댔다.
순간, 마치 음 소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오크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여자는 오크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오크는 하늘 방향으로 날아가다가 반투명 정육면체의 천장에 부딪히고, 사라졌다.
이준기는 놀란 눈으로, 그러나 하나도 놓칠 수 없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가 이준기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준기.”
호명에 대꾸하려 했지만, 이준기는 혀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이준기는 정신을 잃었다.
***
"헤헤, 기억이 돌아온 거죠. 맞죠?" 주석이 바닥을 짚고 덤블링하듯 사뿐하게 일어섰다. "준기 형?"
일어서서 옷을 탁탁 터는 주석을, 이준기는 빤히 바라보았다.
기억이 돌아왔다.
이준기는 옆에 선 두 여자를 바라보았다.
길수연.
반-테일러 연합 메인 힐러.
현재는, 이상덕의 길드, <6PM>의 메인 힐러 포지션일 것이다.
주석의 공격에 방어 마법으로 맞대응하려던 것을, 이준기가 말렸다.
문아린.
통성명한 지 두 달쯤 된 양손 무기 특화 근접 딜러.
스킬 트리는 물, 바람, 흙.
희귀 스킬, <불워크>로 달려드는 주석을 막아보려 했다.
아쉽게도, 전투력에 있어 아직은 문아린보다 주석이 우위에 있다.
이준기는 성흔, 이르헬의 눈을 발동해서 두 사람의 상태창을 살펴보았다.
길수연은 현재 26레벨, 문아린은 25레벨이다.
"장난이 심하구나, 아직도." 이준기는 그렇게 말하며 주석을 향해 걸음을 뗐다.
"어, 왜 이래요?" 주석이 뒷걸음질 쳤다. "설마, 모르시는 거예요? 저는 도와주려고 한 거예요."
그래, 그렇다고 생각한다.
다만, 주석의 공격에도 이준기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주석은 그대로 공격을 계속했을 것이다.
이준기 따위,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을 테니까.
"그래, 나도 알아." 이준기가 걸음을 빨리했다. "하지만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 아니었어?"
"아이, 무슨 말이에요, 그게. 서운하네요." 주석은 톡톡, 가볍게 뒤로 뛰기 시작했다.
"귀검!" 이준기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귀검!" 주석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희귀 스킬, 귀검은 단지 이동 속도와 공격 속도만 빠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귀검 상태로 돌입하는 순간, 시전자는 시야에서 사라진다.
공격할 때만 그 모습이 잠깐 드러날 뿐, 이동 중에는 보이지 않는다.
"히익! 이게 뭐야!" 주석이 소리 질렀다.
이준기는 알고 있지만, 주석은 지금 처음 알게 된 사실.
귀검 상태에 돌입한 시전자들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한다.
이준기와 주석은 서로를 볼 수 있었다.
민첩성 스탯이 우월한 이준기가 귀검의 터널 속에서 주석을 따라잡았다.
이준기가 손에 쥔 것을 휘둘러 주석의 오른손, 그리고 왼손을 차례로 타격했다.
주석의 두 손에서 군용 단검이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두 사람의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
이준기의 왼손이 주석의 왼손을 붙잡고 있었고,
이준기의 오른손에는 신용 카드가 들려 있었다.
주석.
- 28레벨.
- 전문화: 어둠 10, 바람 16, 마나 2.
- 스탯: 힘 50, 민첩 85, 체력 40, 정신력 10, 물리 저항 25, 마력 저항 10.
- 성흔: 알샨도의 추적(Al Shando's Tracking).
- 획득 스킬: 귀검.
- 인벤토리: 썬더볼트(Thunderbolt), 크레센트(Crescent), 강화 국궁(Enhanced Korean Bow), 강화 화살 20 개, 세련된 가죽 장갑, 애쉬 슈라우드(Ash Shroud), 숲 지기의 장화, 중급 힐링 포션 9 개, 기본 식량 팩 4 개.
과연, 주석. 훌륭하다.
이준기는 이르헬의 눈을 통해 읽은 주석의 상태창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반갑다, 주석." 이준기가 말했다.
"너무 난폭한 거 아녜요?" 주석이 이준기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빼며 말했다.
기억이 돌아왔다.
이들에게 말해도 좋을 정보도, 말할 수 없는 정보도 머릿속에 돌아왔다.
주석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다.
다른 모든 것을 말한다 해도, 한 가지는 말할 수 없다.
나는 회귀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