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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6. 회귀자

by 히말

이것은 이준기의 두 번째 삶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첫 번째 삶은 난폭한 방식으로 끝났다.


반-테일러 연합은 조슈아 테일러와 마지막 결전을 그의 결계 안에서 치렀다.


그 유명한 샌프란시스코 선언이 생중계되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양측 대표단은 만났다.

바로 그곳에서 조슈아 테일러는 자신의 결계, <공허>를 열고 이준기 파티를 초대했다.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버려도 되는 유리한 입장이었지만, 조슈아 테일러는 6대6의 공정한 대결을 제안했다.

모든 사람들을 납득시키려면, 분명한 힘의 우위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떻게든 이겨야 하는 싸움이지만, 승리할 공산은 이미 매우 얇았다.

이준기는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두운 밤 하늘을 배경으로, 여남은 개의 흙섬이 떠다니는 풍경.

조슈아 테일러의 결계, <공허>의 내부다.

최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준기가 빛의 방패를 들어 적들을 끌어모았다.

스티브 챈(Steve Chan), 웨이 리(Wei Li) 등 딜러들은 물론,

조슈아 파티의 탱커인 프리실라 세딘티(Priscilla Seddinti)조차 이준기를 향해 끌려왔다.

탱커인 자신이 도발에 걸렸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프리실라는 땅을 구르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전 세계 탱커 랭킹 1위인 이준기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혼신의 탱킹.

그렇게 이준기가 적의 화력을 집중하여 받아내는 동안,

힐러 길수연의 손가락 끝에서 뻗어 나온 빛줄기가 이준기를 휘감고 맴돌았다.


린핑 루의 두 손이 수화를 하는 것처럼 공중에 도형을 그렸다.

거대한 물결이 공중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린핑 루의 시그니처 스킬, 하이드로블라스트(Hydroblast).

마법의 위력과 효율을 증가시키는 하이드로펌프(Hydropump)의 상위 호환 기술.

파티원 1명이 아닌 모든 파티원을 보조하며, 위력과 효율의 증가 정도도 훨씬 더 크다.

하이드로블라스트에서 쏟아져나오는 에너지의 흐름이 길수연, 헬렌 카자크, 그리고 미겔 산체스를 향해 흘렀다.


미겔 산체스가 활을 들어 적을 겨냥했다.

7개의 화살이 한 몸처럼 적을 향해 날아간다.

그의 시그니처 스킬, 크로마틱 볼리(Chromatic Volley).

직접 대미지를 주는 것은 물론, 원소 저항을 낮추는 디버프를 중첩하는 위력적인 약화 스킬이다.


헬렌 카자크의 손끝에서 가느다랗게 불꽃이 뻗어 나와 적을 휘감았다.

헬렌 카자크의 시그니처 스킬, 헬레네의 실 뜨개(Helene's Silk Web).

일반적인 전투였다면, 불꽃의 거미줄이 십수 개체의 몬스터를 휘감아 꽁꽁 묶어댈 것이지만,

지금은 단 한 사람을 휘감고 또 휘감았다.


힐러 길수연은 적들의 집중 공격을 받아내는 탱커 이준기를 향해 겹겹이 보호막을 쏟아부었다.

그녀의 성흔, ‘보드칫의 행운’이 발동하면서 키라트 싱에게도 보호막이 씌워졌다.

순간, 키라트의 모습이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키라트의 시그니처 스킬, 그림자밟기(Shadowstep)다.

그는 공간의 틈새를 타고 적의 등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양손에 든 단검 한 쌍이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모든 공격의 목표는 단 한 사람.

조슈아 테일러였다.


***


길수연이 쓰러졌다.

이준기의 왼손바닥에서 빛기둥이 뻗어나가 그녀를 향했지만,

회전하는 검은 구체가 날아와 빛기둥을 찢었다.

조슈아 테일러의 시그니처 스킬, 반중력장(Anti-matter Field)이다.


반중력장의 검은 구체는 이준기의 보호 마법을 찢은 다음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결계의 검은 하늘을 수놓은 물결 무늬 한가운데로, 검은 구체가 던져졌다.

린핑 루가 목숨을 버려가며 켜 놓았던 하이드로블라스트의 물결이 사그라졌다.


그 물결에 의지해서 공중에 떠 있던 헬렌 카자크가 중심을 잃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조슈아 테일러의 손 끝에서 또 하나의 검은 구체가 튕겨나왔다.


헬렌이 낙하하는 지점을 향해, 이준기가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반중력장의 검은 구체가 둘 사이의 공간을 밀어내고 있었다.


왼손으로 반중력장을 통제하면서, 조슈아는 오른손의 사복검을 내질렀다.

사복검의 검날 끝이 뱀처럼 날아와 추락하는 헬렌을 타격했다.


“헬렌!” 이준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준기...”

땅위로 사납게 내팽개쳐진 헬렌은 그의 이름을 끝까지 부르지 못했다.


조슈아 테일러가 땅 위로 내려와 검을 휘둘렀다.

그의 손끝에서부터, 검날이 길게 늘어져 나왔다.

검날 끝이 뱀의 머리처럼 이준기를 향해 날아들었다.


전설급 무기, 아시라나르(Asi-Rana-Ru)의 사복검.

이준기가 등 뒤에 매달린 방패를 들어 아시라나르의 혀끝을 향해 던졌다.

전설급 방패 드라시카햐(Drassi-Kahya)가 날아가 아시라나르의 사복검을 쳐냈다.

길이가 줄어들며 조슈아 테일러의 손끝으로 되돌아가는 사복검의 움직임은, 공격 후 후퇴하는 코브라의 머리와도 같았다.

드라시카햐 역시 부메랑의 궤도를 그리며 이준기의 왼손으로 돌아왔다.


“이준기!”

“조슈아!”

“이제 너 하나뿐이다. 항복해라.”

“네가 원하는 세상은, 절대 오지 않아!”

“누가 날 막을 수 있을까? 너도 실패했는데.”


“루카 빈디카타(luca vindicata)!”

조슈아를 향해 사선으로 세운 이준기의 검 끝에 빛이 모여들었다.


“이노르디나타(inordinata)!”

조슈아의 사복검 끝이 검은색으로 물들고, 이준기를 향해 뱀처럼 날아들었다.


빛과 어둠이 충돌하며 발생한 충격파가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조슈아를 돕기 위해 모여들던 그의 파티원들이 충격파를 맞고 쓰러지거나 튕겨나갔다.


빛과 어둠이 서로를 붙잡고 씨름하는 것 같았다.

휘황찬란한 빛과 칠흑 같은 어둠이 서로를 감싸며 맴돌았다.

스트라치아텔라 아이스크림 덩어리처럼.


마치 블랙홀처럼 충격파를 발산하는 희고 검은 그 구체의 색이 점점 더 검은색으로 물들어갔다.

빛과 어둠의 힘을 채널링하는 두 시전자의 얼굴에 땀이 맺혔다.


마침내, 빛이 사그라들고 어둠이 구체의 모든 부피를 차지했다.


조슈아를 향해 검 끝을 세운 채 무릎을 꿇고 앉은 이준기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가 바닥에 쓰러졌다.


***

어둠속으로 의식이 사라지는 듯하더니, 이준기는 깨어났다.

땀에 절어 깨어난 그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다.


구원자로 각성하기 전, 말단 경찰로 일하던 시절에 살던, 신림동 고시원의 작은 방이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천장도, 벽도, 작은 창문도.


휴대폰에 표시된 날짜가 8월 27일이다.

조슈아와의 결전을 위해 결계에 진입하기 직전, 날짜는 2월 28일이었다.


‘조슈아의 흑마법?’


그러나, 모든 것이 이상했다.

무엇보다, 상태창이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열었다.

2월말 바깥 공기가 이렇게 따뜻할 수는 없다.


차원문, 던전, 몬스터, 구원자.

예전이라면 헛소리로 치부해버려야 할 개념들이 넘쳐나는 시대.

시간이 되돌려졌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


마침 일요일이었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날.

그는 가벼운 차림으로 건물을 나왔다.


영화 세트장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그곳은 진짜 신림동이었다.

이렇게 리얼하게 만들 수는 없겠지.


시간도, 공간도 그의 기억과 다르다.

2월의 샌프란시스코에서 8월의 신림동으로, 그는 흘러와버렸다.


***


그는 기억하는 단 하나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흔한 여자 목소리다.

전화기를 통해 듣는 것도 오랜만이니, 목소리가 낯설 수 있다.


“수연 씨?” 이준기가 물었다.

“네?”

“길수연 씨 휴대폰 아닌가요?”

“잘못 거셨네요.”


이준기가 사과하기도 전에, 상대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기억하는 그 번호다.


종합해보자.

시공간이 다르다는 것은 확인했다.

상태창이 켜지지 않는 걸 보면, 구원자 각성 전일 수 있다.

그는 각성하고 한참이나 지나서야 길수연을 만났다.

그 사이에 전화번호가 바뀌었다고 생각하면,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좋아, 시간여행을 했다고 생각하자.


기억은 그대로다.

자아라는 것은 어차피 기억이 만드는 것이다.

내가 나라는 사실은 내 기억만이 증명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여전히 나다.

시공간이 다르다면, 나라는 존재가 과거로 되돌아왔다고 생각하는 편이 쉽다.

거기에서부터, 하나씩 풀어나가자.


일단 가설을 세우니 이준기는 마음이 조금 상쾌해졌다.

아니, 얹혀 있던 것이 내려간 느낌이었다.


지금이 정말 과거라면, 차원문이고 몬스터고 전부 꿈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세상은 멸망하지 않는다.

몬스터에 의해서도, 조슈아 테일러에 의해서도.


강력한 적대자에 맞서는 무거운 짐을 지지 않아도 된다.

안정된 사회의 한 구석에서 그냥 말단 경찰로 착실하게 삶을 살아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지구에 사는 그 누구의 삶도 단순하지 않다.

이준기도 마찬가지였다.


2023년 3월 23일. 아직도 기억하는 그 날짜.

구원자로 각성하기 5개월 정도 전이다.


서류 정리를 마치고 늦은 시간에 귀가하던 이준기는 골목길에서 여자의 비명을 들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뛰었다.

어떤 남자가 한 손으로는 여자의 손목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여자의 입을 틀어막으려 하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이준기의 경찰복을 확인한 여자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마!” 남자는 여자의 입을 막으려던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뺐다.

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

발리송이었다.


별 미친 녀석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이준기는 상대를 향해 외쳤다. “꼼짝 하지 마! 경찰이다!”

퇴근 중이라 권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남자는 여자의 손목을 잡은 채, 발리송을 든 오른손을 현란하게 돌렸다.

아까보다 더 기가 막혔다.

사랑싸움도, 취객도 아니고, 어쩌면 사이코패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 풀어 줘!” 이준기가 상대를 향해 외쳤다. “문제를 더 크게 만들지 마! 범법자가 되고 싶은 거야?”


“움직이지 마.” 남자가 발리송 칼날 끝을 여자의 목에 가까이 댔다.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이 여자를 찌르겠어.”


“후회할 일 하지 마. 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라도 말해 봐.” 이준기가 몇 음계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 이유가 중요해? 중요한 건, 내가 이 여자를 죽일 수 있다는 거야.” 남자가 비아냥거렸다. “난 분명히 말했다. 움직이면, 이 여자를 찌를거야. 가만히 그 자리에 있어. 저기, 저쪽 골목 끝까지 간 다음에 이 여자를 놔주지. 쫓아올 생각은 하지 말고.”


“좋아.” 이준기는 양손을 들어 상대를 진정시키는 자세를 취하며 말을 이었다.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너도 약속을 지켜라.”


“걱정 마라. 나도 남자야. 약속은 지킨다.” 남자가 여자의 손목을 잡은 채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이런 여자 때문에 신세 망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 네가 가만히 있으면, 나도 골목 끝에서 이 여자를 놔줄 거야.”


조슈아.png Joshua Taylor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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