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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7. 자소서

by 히말


"살려 주세요." 끌려가면서, 여자는 흐느꼈다.

"닥쳐." 남자가 말했다. "살고 싶으면 가만히 있어."

"약속, 꼭 지켜라." 이준기가 외쳤다. "난 얼굴을 아주 잘 기억한다."


거짓말이었다.

이준기는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이 못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를 못 알아본 적도 있었고,

두 학기 전 수업을 들었던 교수 얼굴을 잊은 적도 있었다.


"하하하!"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치면서, 남자가 말했다. "굉장히 무섭군."


어쩌면, 당연한 결말이었을까.

여자를 끌고 갈림길까지 도착한 남자는 도망쳤다.

여자를 찌르고 나서.

여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준기는 주차된 자동차들을 피하며 좁은 골목길을 달렸다.

남자를 뒤쫓을 여유는 없었다.

쓰러진 여자가 목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손으로 출혈을 막아보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구급대원도 너무 늦게 도착했다.

그렇게 그녀의 몸이 식어갔다.


현장에 경찰이 있었으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준기는 분루를 삼키며 기억을 되새겼다.

주름 하나하나까지 다 기억할 정도로, 그는 살인자의 얼굴을 기억했다.


***


그 후, 구원자로 각성하여 1년 반을 더 살았다.

구원자들 사이에서 기어이 전쟁이 벌어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잊은 지 오래다.

그 모든 기억을 가지고 회귀했다.


그런데도 그 사건은 잊지 않고 있다니.

인간의 기억에는 덮어쓰기가 없는 건가.

의식의 수면 위로 자꾸 떠 오르려는 기억을 꾹꾹 누른다.

현재 상황을 다시 정리해본다.


길수연이 나를 모른다.

비현실적이기는 해도, 과거로 시간 여행을 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차원문, 몬스터, 구원자, 그리고 이제 시간 여행.


아니, 회귀.

회귀라면, 복수하라는 거다.

뭐, 그렇게 해주지.


그렇다면 1분, 1초도 낭비할 수 없다.

조슈아 테일러가 지금 몇 레벨인지,

헬렌 카자크와 린핑 루는 몇 레벨인지 궁금하지만,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강해지는 것이다.


오늘 날짜 8월 27일이 맞는다면, 한 가지 사실은 확실하다.

조슈아 테일러의 샌프란시스코 선언까지, 9개월이 남았다는 것이다.

그날 이전에 조슈아 테일러를 쓰러뜨리든지,

아니라면 최대한 강해진 상태로 그날을 맞아야 한다.


휴대폰을 검색했다.


- 어제 오후 9시경. 국회의사당 의원회관 앞 잔디밭에 차원문 등장.

- 국회의사당 전면 폐쇄. 9월 정기국회 일정 큰 차질 예상.

- 정부, 국회 일정을 이유로 길드 협회 측에 긴급 처리 요청.

- 한국 길드 협회, 관할 길드와 연락하여 순리대로 처리할 것이라 밝혀.


차원문이고 몬스터고 모두 꿈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살아 돌아왔다.


- 국회 차원문 포함, 현재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차원문은 총 37개.

- 사설. 한국 길드 협회는 왜 차원문을 방치하는가?

- 사설. 현실을 게임이라 생각하는 길드 협회는 아이들 놀이터인가.

- 사설. 영국처럼 우리나라도 구원자들을 정부에서 직접 관리해야.


죽을 때까지 탱커였던 이준기는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버릇이 있었다.

차원문, 몬스터, 스킬, 아이템에 대한 방대한 정보가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이준기는 택시를 잡아타고 여의도로 향했다.

국회 차원문이 어떤 등급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땅에 처음 등장한 C 등급 차원문은 부산 해운대였다.

E 등급이라면 쉽게 클리어할 자신이 있었다.

D 등급이라도 조심해서 진행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의원회관 앞마당에 열린 차원문 때문에 국회 전체가 봉쇄된 상황.

택시로는 국회의사당역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택시에서 내려, 뛰었다.


국회라서 그런지, 차원문을 봉쇄한 군경 병력은 2중이 아니라 3중 동심원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준기는 달리기 시작했다.

의경과 전경으로 만든 1, 2차 봉쇄 라인을 돌파하고,

육군 소속 특수부대원들이 강강술래를 하는 3차 봉쇄 라인에 다가서는 순간.

이준기의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8월 27일 11시 45분.


이준기가 구원자로 각성했다.


차원문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이라면 구원자가 틀림없다.

매뉴얼에 따라 멈추라고, 다가오지 말라고 외치기는 했지만,

군인들은 이준기를 막아서기를 주저했다.

머뭇거리는 군인들을 피해, 이준기는 푸른 소용돌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


다이빙을 한 탓에, 이준기는 흙바닥 위로 엎어졌다.

초가지붕 사이로 햇빛이 새어 들어오는 작은 오두막.

앞뒤로 문이 하나씩 있다.

던전의 출입구이자 대기 공간이다.


왼쪽의 선반 위에서 이준기는 무기와 기본 물품을 챙겼다.

숏 소드, 작은 버클러, 가죽 갑옷 한 세트, 그리고 활과 화살.

자판기는 그냥 한번 쳐다보기만 했다.

골드가 없으니 그림의 떡이다.


첫 던전은 힐링 포션과 기본 식량 패키지 없이 진행해야 한다.

군경을 피해 뛰어 들어오느라 확인하지 못한 차원문 정보를 확인해야 했다.

이준기는 상태창을 켰다.


- 차원문 고유번호 09487. 랭크 D. ‘부두 술법사의 오두막’

- 차원문 소멸 조건: 부두 술법사의 사망.

- 차원문 소멸 보상: 레어 등급 아이템 1 개 이상.

- 퇴각 페널티: 인벤토리 물건 랜덤 1 개 소멸. 레벨 업 이후 경험치 소멸.


국회 앞마당 차원문은 D 등급이었다.

E 등급이라면 민간 길드에서 맡기를 꺼리지만, D 등급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오늘이 일요일이라서 그렇지, 평일이었다면 벌써 관할 길드가 정해졌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 안에 끝장을 봐야 한다.


이준기는 곧바로 바깥으로 나왔다.

넓은 맵 어딘가에 숨어 있는 부두 술법사를 찾아 죽여야 하는 던전.

현재 이준기의 상황에 참 좋은 포맷이다.


'오크 도시 공략' 같은 던전이라면 오크가 군대 단위로 돌아다닌다.

'고블린 광산' 포맷 정도만 돼도 고블린 광부들 여럿이 몰려온다.

그런데 이 맵에는 그냥 혼자 다니는 고블린도 있으니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포맷은 쉬운 포맷도 아니며, 파티가 전멸하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부두 술법사를 찾는 것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그의 은신처에 강한 적들이 모여 있고,

무엇보다 최종 목표인 부두 술법사가 랭크 D 수준에서는 상당히 강력한 몬스터이기 때문이다.


이준기는 오두막을 나가 던전으로 진입했다.

제주도 비자림을 떠올리게 하는, 울창하고 쾌적한 숲이 펼쳐졌다.


'오크어로 바레도라고 부르는 나무들의 숲이다. 주로 서식하는 몬스터는 고블린. 중립 크리처로는 늑대나 곰이 존재하지만, 많지는 않다.'


나무, 풀, 늑대, 곰이라고 부르기는 해도,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하늘 색깔에 미묘하게 보라색이 섞여 있어서다.


처음에는,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을 카메라로 찍었을 때 나타나는 색수차 현상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숲 바깥으로 나가서도 하늘색에는 보랏빛이 섞여 있었다.

이런 생경한 풍경만으로도, 풋내기 구원자들은 겁을 집어먹고는 한다.


'이 공간을 만든 자가 누구인지 몰라도, 지구와 다른 물리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슈아 테일러의 결계 안에 떠다니는 흙 섬이야말로 물리 법칙을 위배하는 것들이지.'


우선 스킬 트리부터 찍어야 한다.

물, 불, 흙, 바람, 빛, 어둠, 그리고 마나.

일곱 개의 영역에서 레벨마다 1권의 책이 주어진다.


책을 소모해서 스킬을 사용한다.

스킬에는 레벨업과 책 여유에 따라 저절로 주어지는 기본 스킬,

그리고 아이템처럼 노획해야 하는 희귀 스킬이 있다.


이준기는 첫 번째 책으로 마나를 골랐다.

눈 앞에서 빙글빙글 돌던 일곱 색깔 책들 중, 투명한 빛깔의 마나 책이 품속으로 날아들었다.


지난 번에는 첫 책으로 빛을 골라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


이준기는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기고 몬스터들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홀로 다니는 고블린 두 마리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이준기는 둘 중 하나를 추적했다.

활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탱커로서 전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이준기는 주로 활을 써서 풀링을 했다.

과거로 돌아왔지만, 이준기의 몸은 활과 화살의 감각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멋모르고 돌아다니던 고블린이 화살 두 개를 연이어 맞고 빈사 상태에 빠졌다.

이준기는 양쪽 허벅지에 화살을 맞아 일어서지도 못하는 고블린을 숏 소드로 가볍게 제압했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최단 시간 첫 킬 달성. (각성 후 1시간 38분 27초)


각성 후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첫 킬을 달성했다.

헬렌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내가 달성했던 첫 업적은 그거였어. 최단 시간 첫 킬 달성."

"그런 업적도 있구나?" 이준기가 물었다.

"그렇더라고." 헬렌이 웃었다. "그 최단 시간이라는 게 얼마나 됐을 거 같아?"

"글쎄." 이준기가 대답했다. "사상 처음으로 차원문을 닫은 게 헬렌이니까. 처음이라 어렵기는 했겠네."

"그래서 얼마? 아무 숫자나 찍어 봐." 헬렌이 눈을 반짝이며 재촉했다.

"음, 한 48시간 정도?"

"126시간 38분."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헬렌 카자크.

구원자가 차원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은 그녀가 아니었지만,

던전 안에서 몬스터를 처음 죽인 것, 그리고 차원문을 소멸시킨 것 모두 그녀가 처음이었다.


거의 모든 길을 선두에서 걸어간 그녀다.

힘들었지만, 그에 따른 보상도 많았다.


이준기의 지금 기록은 또 언젠가 깨질 것이다.

그러나 당분간은 아닐 것이다.

직전 기록도 12시간 이상이었을 테니까.


던전 밖에서 아무리 공부하고 조사해도,

실제로 숨을 쉭쉭 거리는 고블린을 마주하면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이 보통이다.

사망하는 구원자의 절대다수가 레벨 1이고, 아무런 경험치 없이 죽는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최단 시간 첫 킬 달성' 업적 보상은 무려 10 스탯 포인트(stat points)다.


레벨 1 구원자는 강인함, 민첩성, 통찰, 집중 모두 10으로 시작한다.

1레벨 올라갈 때마다 받는 스탯 포인트는 겨우 5다.

따라서 아직 2레벨도 되지 못한 구원자가 10포인트를 추가로 찍는 것은 사기에 가깝다.


스탯에 따른 대미지 보정 계수, 치명타율, 회피율 등은 이미 공식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걸 쳐다보는 구원자는 많지 않다.


이준기는 처음으로 얻은 보너스 스탯 포인트 10을 전부 민첩에 몰아넣었다.


- 강인함 10. 민첩성 20. 통찰 10. 집중 10.


강인함은 대미지 보너스, 물리 저항, 치명타율을 상승시키고,

민첩성은 적중률, 회피율, 그리고 치명타율을 상승시킨다.

통찰과 집중은 마법 스킬과 관련되는 스탯이므로 관심 없다.


다만, 스탯에 의해 계산되는 각종 계수들은 그 스탯 배분에서 최적화된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치명타율을 45%로 찍었다고 해서, 설렁설렁 칼을 휘두르는 것이 치명타로 박히지는 않는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스탯 배분 따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준기는 곧바로 두 번째 싱글 고블린을 사냥했다.

사냥 방식은 마찬가지.

다만, 죽어 가는 고블린에게 이준기는 스킬 '마나 폭발'을 사용했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첫 번째 오버킬(Overkill).

- 업적 보상: 스탯 보너스 5포인트.


보너스로 얻은 5포인트는 모두 민첩성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 혼자 다니는 몬스터는 없다.

이준기는 쌍 단검 고블린과 방패 고블린이 한 조로 움직이는 고블린 추적꾼 무리를 찾아다녔다.


먼 거리에서 쌍 단검 고블린의 허벅지를 화살로 맞췄다.

둘이 달려왔지만, 허벅지를 맞은 공격수 고블린은 뒤처졌다.


이동하면서 적에게 화살을 쏘는 카이팅(kiting)이라면 탱커의 기본 소양이다.

이준기는 쫓아 오는 적들을 피해 도망치면서 공격수 고블린에게 또 하나의 화살을 적중시켰다.


쓰러진 공격수 고블린은 출혈로 죽을 것이다.

이준기는 방패수 고블린과 근접 전투를 벌였다.

민첩성이 무려 25나 되는 1레벨 구원자, 이준기.


방패수 고블린에게 단 한 번의 타격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가볍게 제압했다.

고블린 둘을 처치하고 나자, 이준기는 2레벨이 되었다.


그구된표지.png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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