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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Apr 16. 2018

분산원장과 그 적들

[서평] 마이클 케이시 & 폴 비냐, <트루스 머신>

전작 <비트코인 현상, 블록체인 2.0>이 비트코인에 무게중심이 있다면, 후속작인 이 책은 블록체인에 무게중심이 있다. 탭스콧의 <블록체인 혁명>부터 시작해서 블록체인의 무한한 가능성에 관한 책은 많다. 하지만 2017년 암호화폐 투기 광풍이라는 '역사적 시점'을 지나면서 블록체인에 관한 논의는 분명 전환점을 맞이해야 한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블록체인의 양면성을 재조명한다.

2017년은 암호화폐 가격 대폭등과 ICO 광풍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암호화폐 역사에 남을 것이다. ICO 광풍에는 투기와 사기라는 그림자가 존재한다. 저자들도 이를 인정한다.

"대부분은 실패로 끝날 것입니다." 폴리체인 캐피털의 CEO 올라프 칼슨-위는 이렇게 말하면서 많은 프로젝트들이 솔직히 아이디어도 형편없고 코딩 수준도 매우 낮다고 언급했다. (172쪽)

<트루스 머신> 표지 © 미래의창



그러나 구더기 무섭다고 장을 담그지 않는다면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가. ICO는 수많은 아이디어가 경쟁하는 장이다. ICO에는 분명 부작용이 많으며, 사기에 가까운 프로젝트가 많지만, 그 기본 바탕은 혁신이다. 더구나 저자들이 지적하듯 ICO는 "투자의 민주화에 기여한다." 벤처캐피털이라는 전문 투자자의 개입과 수수료 없이 누구라도 직접 투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난무하는 ICO가 어떤 미래를 약속하든, 우선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암호화폐의 정착이다. 절대다수의 ICO가 이더리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더리움이 먼저 정착하느냐, 아니면 어떤 이더리움 기반 암호화폐가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이더리움이 덩달아 성공하느냐는 별개의 문제고, 그다지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암호화폐 정착이 관건인데, 이를 가로막으려는 세력으로 저자들은 은행권과 중앙은행을 든다. 

분산원장은 기본적으로 탈 집중화된 의사결정이 그 핵심이다. 다시 말해, 중개자가 필요 없어진다는 이야기인데, 그동안 짭짤한 수익을 거두던 중개자가 얌전히 시장에서 물러날 리 만무하다. 그래서 은행권은 '암호화폐 없는 블록체인'을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암호화폐가 없다면 거래 검증에 참여할 인센티브가 없다. 따라서 암호화폐 없는 블록체인은 '프라이빗 블록체인'이 될 수밖에 없다. 허가된 자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닫힌 형태의 블록체인이다.

어떤 사람들은 '프라이빗 블록체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모순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블록체인 기술의 핵심은 바로 공개성, 접근성, 공공성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블록체인을 '분산원장 기술'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238쪽)

나도 백 번 동의한다. 프라이빗 블록체인의 문제는 중앙통제다. 참여가 제한된 공간에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오픈 소스 협업 방식으로 개발 중인 프로젝트 '하이퍼레저'에는 많은 수의 대기업이 참여하고 있는데, 그중 단연 돋보이는 존재는 IBM이다. IBM은 통 크게도 하이퍼레저 초기 단계에 무려 4만 4000줄로 된 코드를 '기부'해서 프로젝트의 순조로운 출발에 크게 기여했다.

IBM이 가장 초기에 움직였기 때문에 IBM은 하이퍼레저 생태계의 가장 강력한 선수가 되었다. IBM이 가장 먼저 코드를 기부한 덕분에 IBM은 시스템의 기반 코드를 지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으며, 이는 곧 비즈니스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264쪽)

IBM은 심지어 BAAS(Blockchain as a Service)를 론칭했는데, 프라이빗 블록체인을 만들어주는 이 서비스는 IBM의 기존 클라우드와 완벽하게 호환되도록 설계되었다. 즉, BAAS를 이용해서 프라이빗 블록체인을 만들면 IBM 클라우드를 사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현대차를 샀는데 닛산차 부품을 쓸 생각이 들겠는가?

'클라우드'라는 명칭이 얼마나 사실왜곡적인가에 대해 저자들은 강변한다. 당신의 데이터는 클라우드 어딘가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고 특정 사기업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다.



하지만 프라이빗 블록체인과 관련하여 경계해야 할 대상은 일반기업보다는 은행권이다. 분산원장의 위협에 직면하자, 은행권은 중개자로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한 채 신기술의 도입에 적응하기 위해서 프라이빗 블록체인을 선택한다. 이 점에 대해 저자들의 비판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전통적인 금융기관들은 세계 금융시스템을 난장판으로 만든 근본 원인이 중앙화된 게이트키퍼 권력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간단히 무시해버리고, 그들이 가장 옹호하는 허가형 장부 시스템을 마치 비트코인이나 다른 비허가형 시스템이 안고 있는 발전 단계상의 몇 가지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최적의 대안인 것처럼 선동하고 있다. (253쪽)

프라이빗 블록체인의 장점은 확연하다. 허가된 자들만이 들어오는 시스템이니 외부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고, 이더리움 클래식이나 비트코인 세그윗 사태에서 나타난 의사결정의 혼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들이 지적하듯, 의사결정이 쉬운 것이 능사는 아니다. 소수에 의한 결정 그 자체가 문제다.

은행이 이끄는 허가형 장부 시스템을 도입하겠다는 것은 2008년으로 되돌아가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시스템적 사회의 붕괴에 대한 반발로 암호화폐가 등장한 것인데, 어떻게 이 기술을 변형하여 구 금융권의 손으로 넘겨줄 수 있다는 말인가? (254쪽)

또 하나의 위협은 중앙은행의 암호화폐 발권이다. 저자들은 중앙은행은 필연적으로 시중은행과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중앙은행이 발행한 암호화폐를 예치하고자 한다면, 소비자는 당연히 시중은행보다는 중앙은행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기업이나 민영 기관은 지불능력도 불확실하고, 영리추구 기관이라 수수료도 높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중앙은행에 맡기는 편이 훨씬 더 안전하고 비용도 저렴할 것이다. (258쪽)

중앙은행과 시중은행의 이해관계가 서로 대립한다면 소비자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저자들도 지적하듯, 시중은행이 더 높은 금리를 지급하면 그만이다. 현재에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 암호화폐라고 차등 금리를 적용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더 큰 문제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암호화폐가 비허가형, 즉 비트코인과 같이 오픈된 암호화폐를 집어삼킬 가능성이다. 전작 <비트코인 현상, 블록체인 2.0>에서 디지털 달러에 대해서 말한 저자들은 이 책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논의를 생략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기에,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가 결국 승리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국가는 세금을 징수한다. 예를 들면, 비트코인이 일상적으로 유통되는 세상이 오더라도 미국 정부는 디지털 달러로만 세금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일상적인 거래에서는 비트코인을 쓰다가도 세금을 낼 때는 비트코인을 이용해서 디지털 달러를 구매해야 할 것이다. 이때 틀림없이 거래비용이 발생할 것이므로, 사람들은 점차 비트코인 대신 디지털 달러를 사용할 것이다.

물론, 이 논리에 대한 반대 논거로 민주주의를 들 수 있다. 논란이 있지만, 민주주의는 결국 민중에 의한 지배다. 디지털 달러로만 세금을 받겠다는 자에게서 민중이 권력을 회수하면 그만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징수 화폐를 비트코인으로 바꾸겠다는 공약을 내건 후보에게 투표하면 되는 것이다. 결국, 세상 사람들 다수에게 거래수단으로 인정되는 암호화폐가 진정한 화폐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발행 주체가 누구인지, 블록체인이 개방형인지 폐쇄형인지 여부는 결정적 변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

미래 예측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새로운 암호화폐는 지금 이 시간에도 만들어지고 있다. 이더리움 클래식 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 분산원장의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의구심은 표면화되지 않았다. 상식적인 결정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비트코인 세그윗에 반대 세력이 발생할 것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인간의 탐욕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삼성증권 직원들이 전산 오류로 지급된 가짜주식을 매도한 최근 사건은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강력한 동인인가를 보여준다. 증권과 전산에 정통한 그들이, 오류로 발생한 숫자에 불과한 그 주식이 정말 매도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만큼 돈의 위력은 강력하다. 암호화폐는 그 강력한 돈의 아성에 도전하는 일이다.

유령주식 사태에 대한 삼성증권측의 사과문 © 연합뉴스



인간의 뇌 대부분은 사회적 뇌다. 인간 개체의 생존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육식동물도, 추위도 아니고 무리 속의 다른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경제 행위도 다르지 않다. 블록체인은 분명히 우리의 미래 속에 있을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 자체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이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이해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마이클 케이시와 폴 비냐는 이 문제에 대해 정말 많이 생각한 사람들이고, 그 생각을 듣는 것은 값진 경험이다.


출판사 미래의창으로부터 책을 지원받았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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