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핑 현장에 안내 방송이 나왔다.
“일신상의 이유로 공격대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 이도협 딜러를 대신해서, 대체 공격대원이 지금
서울에서 헬기를 타고 오는 중입니다. 차원문 입장 시간은 두 시간 뒤, 오후 1시 30분으로
조정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뭡니까?”
공격대원 일부가 박충기 공격대장에게 항의했다.
“이도협이 나가면, 도대체 대체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다는 거죠?”
“충무공 길드 부길마가 나갔으니, 길마가 오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권영호가 온대요?”
“네.”
박충기의 한마디에 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에? 정말요?” 누군가가 묻자,
“길마로서 책임지겠답니다." 박충기가 대답했다.
유쾌한 웅성거림이 실내에 퍼졌다.
“우하하! 이거 대박인데요!"
“이거 정말 유사 이래 최고의 드림팀인데요?”
권영호의 도착을 기다리는 동안, 일단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밖에서 한 끼를 더 먹게 되어 모두 좋아했다.
지우개를 씹는 것 같은 던전 식량팩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부산, 울산, 경남 지방 전체를 나와바리로 하는 한국 최대 길드, 문경새재.
이미 줄이 잔뜩 서 있는 맛집 하나를 통째로 섭외했다.
수도권에서 합류한 인원들은 차를 두고 왔기 때문에, 문경새재 길드 차량이 동원되었다.
몇 달이나 시간을 끈 ‘해운대’ 차원문의 봉쇄는 부산광역시 입장에서도 시급한 문제였다.
부산시 교통경찰 통제 하에, 공격대원들을 실은 차량들은 카퍼레이드 대열로 통제된 시내 도로를 질주했다.
“캬. 이런 걸 또 다해보네. 이럴 때는 구원자 할 맛 난다니까.”
“그러게. 구원자 노릇도 목숨 걸어가면서 하는 건데, 가끔은 이런 특혜도 있어야지.”
“목숨 걸고 차원문 닫으러 다니는 거,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아. 맨날 방송에서는 구원자가 신종 귀족이라는 말이나 나오고.”
“아까 그 사회자 녀석 말야. 예전에는 무슨 원숭이 흉내 같은 거나 내더니, 차원문 때문에 세상이 바뀌니까 금방 전공이 바뀌네. 근데 예능 프로라니, 장난하나? 남은 목숨 걸고 하는 게 노는 걸로 보이나 봐?”
“그래도 나름 톱스타인데, 차원문 레이드 브리핑에 불려 오는 거 보면, 우리들도 대단한 거 맞잖아요?”
전국적으로 소문난 맛집이라고는 해도, 공격대원 14명의 입맛을 전부 맞출 수는 없었다.
몇 명은 밖에서 먹고 오겠다고 하고 나가고, 몇 명은 주변 카페로 가버렸다.
“정확히 1시 정각에 이곳에서 다시 출발합니다. 경찰 교통 통제에 맞춰야 하니까 절대 늦지 말아 주세요.”
‘흠, 교통 통제라? 그런 일도 했었군. 아직 공권력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도 말이지.’
이준기는 기억 속의 오늘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2023년 9월 11일이라면, 서울 관악구 소재 소형 길드, ‘관피아’ 소속으로 일주일 정도 된 시점이다.
꿈에 그리던 경찰 배지를 버리고 들어간 길드였지만, 구원자 12명밖에 안 되는 길드가 예상보다 초라해서 조금 후회스럽기도 했다.
아직도 꿈속에서 고블린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놀라서 깨고는 했다.
‘내가 아직 5레벨 햇병아리였을 때, 부산에서는 구원자들이 교통 통제하고 카퍼레이드를 했단 말이지. 이건 뭐, 신세계였군.’
길수연은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 구원자, 성나린과 함께 브런치 카페에 갔다.
오는 길에 리무진 안에서 검색을 한 모양이다.
길수연, 이렇게 일찍 그녀와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
기자들이 줄을 서서 카메라를 들이미는 가운데, 공격대원 15명은 차례로 차원문 안으로 들어갔다.
가족들이 배웅을 나온 공격대원도 많이 있었다.
수십 명이 죽어 나간 던전이다.
드림팀이든 아니든, 평소보다 더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레벨 순서대로 차원문에 입장했고, 입장하기 직전에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거창한 포부를 말하는 사람도, 그저 최선을 다하겠다고 짧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준기는 줄 맨 끝에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바로 앞에 장혁수가 서 있었다.
‘장혁수. 원래 대로라면 이 공격대 최저 레벨 참가자. 재벌 2세. 마약 전과 7범.’
거기까지는 알려진 사실이다.
조금만 조사해 보면 알 수 있는 것들.
‘문제는 이 녀석이 사이코패스라는 거지. 단지 성격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 발현된 사이코패스. 즉, 범죄자.’
이도협이 나가고 권영호가 들어와 평균 레벨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13레벨이 한 자리를 차지한 공격대를 진정한 드림팀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평균 레벨로 하면, 원래의 공격대가 조금이나마 나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한국 구원자들을 쥐어짜서 간신히 닫은 차원문.
그 지옥을 뚫고 살아나온 네 명 중 하나가 이미 많은 강력범죄를 저지른 사이코패스, 장혁수였다.
사이코패스에게 경험치와 자신감을 심어준 셈.
해운대에서 살아나온 이후, 그의 연쇄 살인 행각은 더욱 대담해졌다.
'이번에야말로.'
이준기는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자, 오히려 그 여자의 마지막 표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경찰이었던 이준기, 골목에서 마주친 납치범과 피해자.
살려주겠다는 말을 어기고 여자를 찌르고 도망간 납치범.
가로등 불빛 아래 선명하게 각인된 그 얼굴.
바로 장혁수다.
지난 생에서 장혁수는 이준기를 만나기 전에 죽어버렸지만,
지금은 이렇게 바로 앞에 서 있다.
장혁수의 비싼 재킷에 달린 제비 꼬리가 바닷바람에 휘날렸다.
베르사체.
검붉은 색은 좋아하는 색일까, 아니면 자신의 전문 분야를 상징하는 걸까.
어둠과 불.
장혁수는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쑤셔 넣고 삐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쪼리 샌들에 모래가 들어간 걸 털어내려는지, 발가락을 자꾸 까딱거렸다.
“형씨.”
장혁수가 뒤에 서 있는 이준기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고, 그냥 목소리로만.
시비조가 잔뜩 들어간 목소리.
“형씨.”
이준기가 무시하자 장혁수는 목소리를 조금 높여 다시 그를 불렀다.
“그렇게 존나 쪼렙에 사상 최고의 공격대에 끼었다고 우쭐대지 마쇼.”
이준기는 도발을 무시했다.
지금은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다.
장혁수는 계속했다.
“죽으면 모든 게 쫑나는 거 아뇨? 템 욕심에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서 있는 거요? 좀 이따가 안에서
좀 봅시다. 키킥.”
***
C급 던전의 입구 오두막.
기억하는 대로, 아래 등급 던전보다 훨씬 호화로운 자판기가 그들을 맞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자기 차례가 되면 빠른 속도로 구입하기 위해 이준기는 구매 목록을 마음속에서 되뇌었다.
‘중급 힐링 포션 다섯 개, 얼음 화살 20개, 강화 국궁, 그리고 소방용 부츠.’
해운대 던전 2층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화염 저항이다.
‘지옥불 호수’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화염 정령 다수를 잡아야 한다.
불화살, 화염구가 아무런 대미지를 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
화염 저항은 가격 대비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소방용 부츠로 해결하고, 얼음 화살로 화염 정령의 화염 오라를 잡아줘야 한다.
2 층으로 올라간 뒤에는 보급품 오두막으로 돌아올 수도 없으니, 부러질 염려가 없는 강화 국궁도 준비해 둬야 한다.
지금까지 이 던전에 도전했던 공격대 중에 ‘지옥불 호수’까지 진행했던 팀은 없다.
그래서, 퇴각한 사람들조차 몰랐던 것.
기억을 돌아보면, 박충기 공격대는 어찌어찌 이 던전을 클리어하는 데 성공하기는 한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협회장 파벌이 전원 사망하는 바람에 온갖 의혹이 일었다.
그것이 이준기가 기억하는 미래.
이제부터 사흘 뒤, 2023년 9월 14일까지 일어난 일의 전모다.
당시 레벨 5에 불과했던 이준기는 당연히 던전 ‘해운대’와 관련한 직접 경험이 없다.
그러나 ‘지옥불 호수’ 세팅은 다른 던전에도 많이 나온다.
‘은둔자의 오두막’ 같은, 던전 구성 시 조합되는 빌딩 블럭의 하나다.
다양한 던전에서 여러 차례 ‘지옥불 호수’를 경험했던 이준기가 대처 방법을 알고 있는 건 당연하다.
‘얼음 화살을 사라고 넌지시 이야기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왜 사야 하는지 근거도 댈 수 없고. 한 개에 이백만 원이나 하는 화살을 사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하면.’
자판기 앞에 선 줄은 또다시 레벨 순서.
장혁수는 줄을 서지 않고 오두막 문밖에 앉아 쉬고 있다.
어쩌면, 앞으로 사나흘 간 마약을 못 하게 된 자기 처지를 비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다섯 명 중 반 정도가 자판기에서 물건을 구매했다.
보급품을 챙기는 사람은 이준기뿐.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고 가죽바지와 투구를 챙겼다.
상태창을 체크했다.
- 레벨 13.
- 전문화: 바람 3, 마나 10.
- 강인함 10. 민첩성 110. 통찰 10. 집중 10.
바로 앞에 서 있던 윤동직이 고개를 돌려 이준기에게 말을 걸었다.
“준기야.”
“네.”
“준기는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레벨은 낮아도 나한테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자판기에서 뭘 사면 좋을까?”
자기보다 한참 낮은 레벨인 내게 조언을 구하다니, 윤동직이라는 이 사람, 대단하군.
그렇게 생각하며, 이준기는 물었다.
“골드는 얼마나 가지고 계세요?”
“글쎄. 한 40골드 정도? 잠깐만... 42골드 있네.”
“중급 힐링 포션은 있으시죠?”
“두 개.”
“탱커시니까, 힐링 포션 몰빵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런 질문을 할 정도라면, 이준기를 꽤 신뢰하는 모양이지만, 얼음 화살을 사라고 할 수는 없다.
한두 푼짜리도 아니고, 그걸 사서 제대로 쓸지 확신할 수도 없다.
그래서 힐러 부담을 줄이는 쪽으로 조언을 했다.
“준기도 힐링 포션 몰빵할 거야?” 윤동직이 물었다.
“저는 마세라티 판 골드 다 가지고 왔습니다. 하하.”
“그걸 여기서 다 쓰려고?”
“최저 레벨 공격대원으로서 민폐는 끼치지 말아야죠. 힐링 포션도 사고 이것저것 도움 될 만한 것들을 사려고, 이미 목록을 만들었어요.”
“1억 5천을 다 쓰겠다는 거?”
“네.”
"대체 뭘 사려고?"
뭘 사라는 게 아니라, 내가 뭘 사는지 말해주는 건 문제 없을 것이다.
이준기는 자신의 쇼핑 목록을 말해주었다.
“얼음 화살? 소방용 부츠? 불 몬스터라도 나오는 건가? 여기 뭐가 나오는지 알아? 그게 인터넷 보면 나오는 거야?”
“아뇨. 형님.”
“그럼?”
“그냥 다 소비하는 거예요. 어차피 여기서 죽으면, 그다음은 없잖아요.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아요.”
이준기는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그냥 그렇게 말했다.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는 말은, 진실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