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 차원문 관련 정보가 출력되고, 진행자가 ppt를 읽는 방향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움직였다.
- 차원문 고유번호 11497. 랭크 C. 2 층 구성. ‘오크 전쟁기지’
- 차원문 소멸 조건: 오크 전투대장의 사망.
- 차원문 소멸 보상: 에픽 아이템 1개, 레어 아이템 2개 이상.
- 퇴각 페널티: 장착 아이템 랜덤 1개 소멸. 1레벨 강등.
"헉!"
여기저기에서 당황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1레벨 강등? 너무하잖아!"
"이런 얘기, 못 들었다고!"
여기저기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관할 길드 마스터인 박충기는 물론, 이도협 등 주요 인물들은 이 페널티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차원문 정보는 다가가서 터치만 해봐도 안다.
그러나, 막상 닥치기 전까지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인간이란 동물의 본능이다.
"퇴각 페널티를 왜 보세요? 퇴각 안 하실 거잖아요? 보상을 보세요!"
진행자가 꽤나 쿨한 듯 쾌활한 목소리로 외쳤다.
진행자는 주요 방송사들의 예능 프로그램을 휩쓰는 중의 유명 MC였다.
그가 브리핑을 맡은 것은, 물론 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구원자들과의 네트워킹 때문이었다.
구원자 관련 프로그램은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시청률 최상위권을 달린다.
그가 맡은 프로그램들 중에서도 구원자 관련된 것이 대여섯 개는 되었다.
"자, 다음은 오늘 브리핑의 하일라이트! 공격대원 소개입니다!"
미소를 가득 띄운 진행자가 오른팔을 펼치며 말했다.
여기저기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길드 협회 신학길 총장이 섭외한 바람잡이들일 것이라고, 이도협은 생각했다.
이상덕은 의외로 이런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 공격대장 겸 리드: 박충기 회장. 문경새재 길드. 28 레벨.
- 탱커
- 한상태 회장. 퇴마문 길드. 31 레벨.
- 성나린. 탑픽 길드. 23 레벨.
- 윤동직. 충무공 길드. 18 레벨.
- 힐러
- 길수연. 6PM 길드. 24 레벨.
- 최아람. 문경새재 길드. 21 레벨.
- 하정태. BURN 길드. 20 레벨.
- 딜러
- 이도협 부회장. 충무공 길드. 27 레벨.
- 남궁훤. 힐사이드 길드. 25 레벨.
- 소현배. 문경새재 길드. 24 레벨.
- 김형채. 코리아 길드. 23 레벨.
- 문아린. 신이 선택한 자들 길드. 21 레벨.
- 김새로미. 브릴리언트 길드. 20 레벨.
- 장혁수. 문경새재 길드. 17 레벨
사회자의 호명에 따라 화면에 이름이 하나씩 출력되었다.
형식적인 박수와 환호성이 이어지고, 여기저기에서 수근대는 소리도 들렸다.
인물평은 대개 구원자들의 몫이었지만, 기자들도 가끔 추임새를 넣었다.
“윤동직? 저 사람 그, 전직…”
“깡패라는 그 사람, 맞죠? 바로 며칠 전에 파티원 하나를 반 죽여놨다고 하던데? 아니, 아예 죽여버렸다고 했던가?”
“메탈엔젤 성나린까지 등장했네요. 이거 정말 드림팀이네.”
“성나린 다치면 안 되는데. 저 팬이란 말예요.”
“길수연이 리드 힐러네?”
“길수연! 빛의 여신!”
처음부터 내놓으라 하는 길드 운영진들 이름이 호명되자, 사람들이 웅성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능별, 레벨별로 정렬된 공격대원 소개는 자연스럽게 용두사미 같은 느낌으로 진행되었다.
딜러진 후반부 이름을 집중해서 듣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다만, 조금 후에 차원문 안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공격대원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진 채로 화면을 주시했다.
차원문 공략의 성패, 나아가 목숨을 좌우할 수도 있는 동료들이 누가 될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공격대원들에게조차 지금 처음으로 멤버 명단이 공개되는 것이다.
어제 저녁때까지도 공격대 자리가 다 차지 않았다는 소문도 돌았다.
탑랭커들이 다수 포함되었음에도, 후반부 멤버들의 낮은 레벨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드디어 딜러진 마지막 멤버 이름이 호명되었다.
- 이준기. 충무공 길드. 13 레벨
"뭐어라고? 13레벨?"
"미친 거 아냐?"
"이거 뭐 하자는 거지? 이 던전이 버스 태울 던전이야?"
당사자들, 즉 곧 차원문에 진입해야 하는 공격대원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도대체 어떤 놈인지 몰라도 이준기를 찾아 혼내주겠다는 듯한 기세다.
"이거 이거," 이도협이 혀를 쯧쯧 차면서 박충기에게 다가섰다. "해명이 필요한 상황인 것 같은데요, 박충기 회장님, 아니 공격대장님."
"이준기 말입니까?" 박충기가 별일 아니라는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당연하죠. 이준기는 웨이팅 리스트였잖아요." 이도협이 항의했다.
"웨이팅 리스트가 무슨 뜻인지 몰라요?" 박충기가 썩소를 날렸다.
"설마," 이도협이 이마를 찌푸렸다. "웨이팅 리스트에 이준기 하나뿐이었다는 겁니까?"
"정답." 박충기가 대답했다.
"우리 길드 배정은 두 명이잖아요! 저와 협의도 안 하고 배정을 3명으로 늘리면 어떻게 합니까?"
"협의를 왜 안 했겠어요. 협의한 내용입니다."
"네?"
"권영호 회장님과 얘기가 끝났습니다." 박충기의 여유만만한 목소리가 카페 안을 울렸다.
거세게 항의하던 이도협이 말없이 눈을 감았다.
"권 회장이, 나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다는 거라고밖에는, 해석이 안 되는데요."
눈을 감은 채로 말하는 이도협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맞아요. 권영호 회장이 이도협 부회장에게 통보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길길이 날뛸 테니까?" 이도협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잘 아시네요."
"나중에 말하면, 나중에 길길이 날뛸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하셨군요? 지금 이 자리에서 길길이 날뛰는 걸 보고 싶으신 겁니까?"
"우리, 한 팀이잖아요. 공격대원들끼리 이러지 맙시다." 박충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길드 배정 인원은 둘입니다. 둘."
"이준기는 웨이팅 리스트에서 왔으니, 배정 인원으로 치면 안 되죠."
"이준기는 우리 길드원이 아닙니까?" 이도협이 위협적으로 말했다. "우리 길드에서 윤동직, 이준기 이렇게 두 명이 채워졌으니, 저는 빠지겠습니다."
"뭐라고요?" 박충기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득템하세요."
그렇게 말하고, 이도협은 카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계획대로다. 이준기가 살아서 나오는 일은 없겠지.'
성공 가능성이 낮은 공격대에서 빠지는 것도 좋지만,
말레도크 던전의 비밀을 언제 발설할지 모르는 이준기를 제거하는 것이 더 좋다.
***
“뭔데? 빨리 말해봐.”
중요한 걸 보고하겠다고 들어온 신학길을 이상덕이 다그쳤다.
“이도협이 레이드 직전에 공격대에서 빠졌습니다!”
“그래? 그럼 14명이 들어간 건가?” 이상덕이 재차 물었다.
“어제 저녁때까지도 자리가 하나 비었다고 하니, 지금 나간 사람 대타를 구하는 건 어려울 겁니다. 14 명이 들어간다고 봐야죠. 게다가 그중 한 명은 레벨이 13이라고 합니다.”
“13? 스물셋 아니고, 열셋? ”
“네. 열셋 맞습니다. 이제 박충기는 사실상 13명 공격대로 2층 던전을 털다가 사망…”
“쉿!” 이상덕이 뱀 같은 소리를 냈다.
“죄송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될 일만 남은 거죠.”
“어제만 해도 열 받는 뉴스만 챙겨주더니, 오늘은 대역전극이군. 잘했어! 네가 뭘 한 건 아니지만 말야.”
“황송합니다. 심려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뭐, 아무렴 어때.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지. 코냑이라도 좀 마실 텐가?”
“네? 네.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상덕이 캐비넷에서 헤네시 XO 를 꺼내 글래스 두 개에 조금씩 따랐다.
“자, 건배!”
신학길은 황송하다는 듯, 자기 잔의 윗부분을 이상덕 잔의 밑바닥에 가져다 살짝 부딪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한 모금밖에 안 되는 코냑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이런, 신학길이!”
“네?”
“코냑을 그따위로 마시면 어떡하나? 품위 없어 가지고는… 날 좀 보고 배워. 코냑이란 말야.”
“네.”
“이렇게 조금씩, 입안에서 돌려가면서 음미하면서 마시는 거란 말야. 또 어디 가서 그렇게 마시지 말라고! 내 이름에 먹칠하는 거야! 온더락스로 달라느니 그딴 무식한 말도 하지 말고. 글래스에 아주 조금 따라서, 손바닥 온도로 덥혀가면서, 천천히 음미하면서. 알았지?”
이상덕은 코냑 병을 열어 신학길의 잔에 다시 조금 따라주었다.
“이제 가르쳐준 대로, 품위 좀 지켜가면서! 마시란 말야. 알았나?”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래. 아무리 그 잘난 한상태가 탱커라고 해도, 설마 13인 공격대가 그 ‘해운대’를 깨지는 못하겠지? 그렇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카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뭐였지?” 이상덕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딜러진 중에서 박충기와 이도협 다음으로 센, 그러니까 레벨이 세 번째로 높은 남궁훤. 그자는 우리 편입니다.”
“이도협이 나갔으니 딜러진에서는 박충기 바로 다음이군?”
“네, 그렇습니다.”
“포섭됐다는 게 무슨 말이야? 태업이라도 한다는 건가?”
“훨씬 더 센 계약을 했습니다.”
“그래?”
“사냥 계약입니다. 현상금 액수를 듣고 침을 삼키더군요.”
“그건 잘했군. 칭찬할 만해." 이상덕이 신학길을 바라보며 물었다. "남궁훤. 믿을 만한 자인가?”
“태권도 국가대표 출신입니다. 회장님도 아마 아실 겁니다. 런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 정말 믿을 만하냐고." 이상덕의 목소리가 짜증을 내뿜었다. "그 사람, 돈이 필요해? 돈이 쪼들려?”
“바람피우다 걸려서 아내와 합의 이혼했습니다. 위자료 잔액이 너무 많이 남아서 던전도 위험한 데만 골라 다닌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거 좋군.”
이상덕의 표정이 풀어지는 것을 보고 신학길은 안도했다.
구원자가 된 친구를 상관으로 떠받들고 사는 인생.
구원자가 되지 못할 바에야, 이런 인생도 나쁘지 않다.
아니, 좋다.
‘성질머리가 지랄 같아서 그렇지, 그래도 친구 잘 둔 덕에 호강하는 거 아니냐. 그런데 아까부터 전화는 왜 자꾸 징징거리고 그래?’
휴대폰을 켜 보니, 카톡 알림 진동이었다.
같은 내용의 카톡이 열 개도 넘게 와 있었다.
브리핑 현장에 심어 놓은 정보원에게 온 것이었다.
- 비상사태! 이도협 대타로 충무공 길마 권영호 등판. 현재 헬기로 이동 중.
신학길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런 젠장. 이걸 어떻게 저 지랄 맞은 상덕이 놈한테 말하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