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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21. 해운대

by 히말

최정윤이 나가자, 이도협은 전화를 들었다.

이준기를 길드에 들인 것은 그냥 평소와 다름없는 결정이었다.

길드 협회를 통해 배분되는 정부 지원금은 레벨 5 이상의 구원자 수를 기준으로 한다.

화살받이 구실도 못 하는 4레벨 이하의 구원자들에게까지 돈을 나눠주는 것은 거의 모든 구원자가 반대한다.


이준기는 6레벨이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버스 태워주겠다고 데려간 던전에서 망신을 당할 줄이야.

이틀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목숨을 빚졌다는 생각은 흐릿해졌다.


오히려 괘씸한 생각이 강해진다.

보상 템 두 개를 꿀꺽했다는 거잖아.

그때, 전화가 연결되었다.


“아, 박충기 회장님? 아, 길마를 회장님이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요? 설마, 협회장 그거 아직도 노리고 계시는 거예요? 저야 박 회장님 출마하시면 무조건 찍어 드리죠. 지난번 선거 때도 제가 누굴 찍었겠어요. 아, 오늘 전화 드린 이유는요, 해운대, 그 건 어떻게 진행 중인지 궁금해서요.”


담뱃재가 책상 위로 떨어졌다.

이도협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공기청정기도 껐다.


“네. 네? 정말요? 저희도 지금 사정이 만만치 않은데. 지난주에 두 명이나 죽었다고요. 주말에 죽은 놈은 제가 그래도 유망주라고 찍은 놈인데, 갑자기 죽어버리니. 그런데 하긴, 지난주에 새로 들어온 녀석이 고속 렙업을 했으니 길드 전력은 뭐 그대롭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요.”


이도협은 전화기에서 입을 떼고 숨을 크게 쉬었다.


“아, 네, 회장님. 한숨 좀 쉬었습니다. 지난주에 고속 렙업한 그 녀석. 이제 레벨 13 이 됐는데, 해운대에 가겠다고 손을 들어서요. 그렇게 되면 우리 길드는 18 렙 윤동직하고 두 명이 다 적정렙 미달이잖아요. 저렙도 저렙 나름이지. 자살 방조하냐고, 비서한테 한마디 했습니다. 아, 비서가 아니고 대리요. 우리 사무직원.”


불을 안 붙인 담배 개비를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던 이도협이 눈을 크게 떴다.


“보내라고요? 정말 그 정도로 궁하신 거예요? 13레벨이라니까요. 23 레벨이 아니고. 하하하. 농담도 잘하시네. 네. 네. 알겠습니다. 주말에 뵙죠. 권 회장이 주말에 골프 약속 있다고 못 간다고 해서요, 브리핑하구 기자회견은 제가 참석해야죠. 네, 네. 안녕히 계십쇼.”


전화를 끊고 이도협은 재떨이에 가래침을 뱉었다.

13레벨을 받아주겠다니, 정말 지원자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정찰대 포함 세 차례 공격대가 들어갔는데 제대로 된 정보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누적 사망자가 무려 30명이다.


퇴각 페널티가 장착 아이템 무조건 1개 소멸인데도, 15명이 퇴각했다.

구원자들이 드디어 깨달은 것이다.

아이템보다는 목숨이 중하다는 것을.

차원문 안쪽에서의 죽음도 그 바깥에서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진짜 죽음이라는 것도.


이도협은 캐비넷을 열었다.

조니 워커 블루 레이블 십여 병이 일렬로 도열해 있었다.

이도협은 손을 뻗어 병 하나를 꺼냈다.


파란색 레이블을 손가락을 쓰다듬어 보았다.

역시, 명품이지.

참 좋은 술이란 말야.


선물로 주기에는 아까울 정도다.

그러나, 목숨값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도협이 스피커폰을 켜고 말했다.

"윤동직 탱커, 집에 있겠지?"

"네, 그럴 겁니다. 부회장님."

"뭐 하나 전해줄 게 있는데, 최 대리가 수고 좀 해줘."

"네, 알겠습니다."

"윤동직 탱커, 이번에 길드 대표해서 해운대 던전 가는 거니까, 선물 하나 전해 주려고."


***


검은 화살의 독 기운이 빠져나갈 때까지 사무실 바닥을 뒹굴며, 신학길은 그때를 다시 떠올렸다.

신학길을 상대로 이상덕이 장난을 칠 때마다, 왜 그때 그 자리에 나갔을까 후회했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랴.


그 자리에 나가지 않았더라도, 이상덕이 찾아왔을 것이다.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협회장 선거가 두 달도 남지 않았어. 정신 안 차릴래?" 이상덕이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협회장님." 신학길이 똑바로 일어섰다.

"해운대, 그거 이번 토요일이지?"

"네. 그렇습니다, 협회장님."


"공격대 구성, 어떻게 돼가?" 이상덕이 물었다.

"아직, 명단을 통보받지 못했습니다."

"그게 답이야?"

"죄, 죄송합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아직 공격대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인원이 모자라요."


"당연히 그렇겠지." 이상덕이 다리를 꼬았다. "그렇게 죽어 나갔으니."

"이도협도, 오대영도 우리에게 협조하고 있습니다. 최소 인원만 보낼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게다가, 이도협 쪽은 레벨도 낮은 구원자를 보낼 모양입니다."


"그래?" 이상덕이 이마에 주름살을 잡으며 물었다. "얼마나 낮은데?"

"두 명인데, 한 명은 18레벨이고."

"그래, 그건 좀 심하게 낮군."

"다른 한 명은 13레벨이라 합니다."


"뭐?" 이상덕이 신학길을 노려보았다. "13레벨이라고?"

"분명히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건 죽으라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13레벨을 강제로 보내는 게 가능하다고?"

"제가 듣기로는," 신학길이 떨며 대답했다. "그 13레벨이 자원했다고 합니다."


***


9월 9일, 토요일. 아침 10시 30분.

브리핑은 11시였지만, 이도협은 조금 일찍 도착했다.


간밤에 KTX로 부산에 도착했다.

아침에는 부산 지하철로 이동했다.

일반인들은 어떻게 사는지 구경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다.


해운대역에서 내려 목적지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손목밴드를 보니 450미터 정도.

32초 정도 걸렸다.

간만에 운동을 하니 개운하군.

그렇게 생각하며 이도협은 스타벅스 해운대점을 향해 걸었다.


"이도협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이어, 주변에서 기다리던 기자들이 그를 에워쌌다.


“이도협 부회장님! 해운대 공격대에 참가하시는 겁니까?"

"이번 공격대, 기대가 되는데요! 각오 한마디 해주시죠?"

“오늘 공격대 멤버가 아직 발표가 안 됐는데, 왜 비밀에 부치는 건지 혹시 아십니까?”

“다른 탑랭커들도 오늘 공격대에 끼는 건가요? 박충기 회장이나 권영호 회장은요?”

“항간에서는 이런 소문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이도협이 물었다. "무슨 소문 말입니까?"

“해운대는 문경새재 길드 소관 아닙니까. 문경새재 길드 회장은 박충기, 즉 현재 한길협 회장 이상덕과 라이벌 사이죠. 계속해서 협회장 선거에서 맞붙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요?”


“그러니까 협회 차원에서 일부러.”

“일부러?” 이도협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협회에서 훼방을 놓는 게 아니냐는 소문, 들으셨을 텐데 모른 척하시긴.” 기자는 기죽지 않고 대답했다.


이상덕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 높이 들며 외쳤다.

“기자님들! 질문에 짧게 대답 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시죠."

"자세한 건 나중에 협회 사무처 기자회견에서 물어주시면 되고요. 공격대가 던전으로 진입한 다음에요. 맛난 거 많이 대접해 드린다고 하니,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상덕 협회장에게 직접 들은 얘깁니다.”


“아, 역시 이도협 부회장님은 협회장 파벌이라 직접 들으신 거군요.”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논평했다.

“파벌이 어디 있습니까? 저희 한국길드협회는 아주 꽉 한 덩어리로 잘 뭉쳐 있습니다. 내분이라니, 어림도 없습니다. 그리고 아까 하신 질문들, 오늘 공격대 멤버에 관해서는 저도 전혀 모릅니다. 30 분 뒤에 아시게 될 테니 기다리시죠. 그럼 이만.”


말을 마친 이도협은 기자들을 뒤로한 채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문 앞을 지키던 경찰이 거수경례를 올리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도협 부회장님!"

"그래, 수고가 많군." 이도협이 그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이도협을 따라 들어오려는 기자들을 전경들이 막아섰다.

안에는 몇 사람 없었다.

점원들의 인사를 받고, 이도협은 카운터에 다가갔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돌체 라테, 벤티."


"돌체 라테 벤티 맞으시고요? 성함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나 몰라요?" 이도협이 점원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네?"


옆에서 보고 있던 선배 바리스타가 끼어들어 사태를 수습했다.

“왜 모르겠습니까, 이도협 부회장님. 저희 직원이 갑자기 놀라서, 성함을 까먹은 겁니다. 이도협 부회장님은 구원자들 탑랭커 중 한 분이신데, 왜 모르겠습니까. 방송에도 늘 나오시는데.”


“아, 역시 그렇죠?" 이도협이 말했다. "오늘 여기 전세 내는 것도, 내 아이디어였는데."

“앉아 계시면, 테이블로 커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선배 바리스타가 정중하게 말했다.


이도협은 창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보이는 건 전경들뿐이라서 사실 전망이 형편없었다.

그래도 커피는 마셔야 했다.


던전에 들어가면 당분간은 전투식량을 먹어야 한다.

몇 끼씩이나 사람답지 못한 식사를 할 생각에, 이도협은 호텔 조식을 과식하고 말았다.

속이 부대낄 때는 달달한 커피가 제격이다.


곧, 박충기가 자기 길드 사람 여러 명과 함께 들어왔다.

질문을 퍼붓는 기자들에게 사무처 직원 한 명을 던져주고, 박충기와 길드원들은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이도협 부회장님, 안녕하시죠?"

"그럼요, 박충기 회장님. 이쪽으로 오시죠."


"나는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길드원에게 자기 주문을 툭 던지듯 말하고, 박충기는 이도협 쪽으로 걸어왔다.

"오늘 공격대, 전부 확정된 거죠?" 의자를 빼 앉는 박충기를 항해 이도협이 물었다.


"그럼요." 박충기가 단숨에 대답했다. "나쁘지 않아요."

"메인탱은요?"


"한상태 회장이 직접 옵니다."

"오!" 이도협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드림팀이잖아요!"


한상태.

현재 한국 구원자들 중 랭킹 1위.

길드 '퇴마문'의 마스터이자, 전 세계적으로도 드문 흙 올인 탱커다.

실력도 확실하다.


단지,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는 거지.

이도협은 생각했다.

한상태를 이번 던전에 밀어 넣는 게 과연 이득일까 손해일까.

던전을 밀 경우와 전멸하는 경우, 두 가지를 다 생각해 봐야 한다.


설마, 도망 나오는 경우까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지.

이도협은 생각했다

그 한상태가, 죽으면 죽었지 설마 도망을 치지는 않을 거야. 그럼.


"드림팀 멤버가 하나 더 있죠, 사실." 문득 박충기가 이도협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생각이 끊긴 이도협이 고개를 들며 반문했다.

"하하하! 뭘 그리 놀라세요. 저 말입니다. 제가 직접 가잖아요."

"하하, 그렇죠. 박 회장님 실력이야 자타공인..."


되도 않는 소리를 하려니 말끝이 꼬인다고 이도협은 생각했다.

한국 최초 랭크 B라는 고레벨 던전이니 위험한 것은 당연하다.

이미 많은 구원자들이 겨우 정찰 들어가서 죽었다.


최고 등급 던전이니 협회 차원에서 관리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기는 해도,

부산에 생긴 차원문이니 당연히 문경새재 길드 관할이다.

박충기가 들어가는 건, 당연한 거다.

그걸 드림팀이니 뭐니 떠벌이는 걸 보면, 박충기 네놈도 하찮은 녀석이구나, 하고 이도협은 생각했다.


"밀크는?" 박충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죄송합니다, 회장님. 얼른 가져오겠습니다!" 길드원이 재빨리 달려갔다.


"휴~" 박충기가 창밖의 차원문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필 자기 관할 지역에 이런 무시무시한 차원문이 생겼으니, 저 녀석도 걱정이 되나 보군, 하고 이도협은 생각했다.


그때, 스피커를 통해 사회자가 말하는 소리가 울렸다.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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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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