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5일, 화요일.
종로 타워에 위치한 충무공 길드 사무실.
24층 부회장실에서 이도협은 입에 담배를 문 채로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준기 덕에 살아난 것은 좋았지만, 찜찜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아니, 불안했다.
이준기가 진상을 알고 있다.
의외로 입이 가벼운 녀석일 수도 있다.
게다가, 최소 레어가 보장된다는 보물 상자 두 개는 어떻게 됐을까?
파티원 네 명 중 하나는 죽고 둘은 반죽음 상태였다.
보물 상자 어떻게 됐냐고 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준기 혼자 깬 던전이니 그가 보상을 차지하는 것도 당연했다.
D급 던전에서 뭐가 나와 봤자겠지.
이도협은 상태창에 인벤토리를 띄웠다.
- 무기: 흑요석 칼날(Obsidian Blade), 크레센트(Crescent).
- 방어구: 살인 예술가의 장갑, 어둠 사냥꾼의 흉갑, 토끼 발 장화.
크레센트는 레어 등급 단검으로, 주로 보조 무기로 환영받는 인기 무기다.
반달 모양의 칼날과 손잡이가 꽤 멋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단지 보조 무기일 뿐이다.
이도협이 애지중지하는 것은 주무기인 흑요석 칼날.
- 흑요석 칼날.
- 단검. 에픽 등급.
- 대미지 등급: D.
- 착용 효과: 민첩성 +5.
- 발동 효과: 유효 타격 시 일정 확률로 칼날 파편이 적의 상처를 파고듭니다. 제거되지 않은 파편은 180초 후 피해자가 아직 사용하지 않은 책 한 권을 무작위로 선택해 소모시킵니다. 피해자에게 사용하지 않은 책이 한 권도 없을 경우, 생명력의 15%에 해당하는 대미지를 입힙니다. 책을 소모시키거나 추가 대미지를 입힌 파편은 사라집니다.
"키킥!" 발동 효과 설명을 읽을 때마다, 웃음이 절로 난다.
그러나 곧 다시 생각했다.
뭐가 나왔는지, 그냥 물어보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이준기가 싸우는 걸 직접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만약 나와 같은 쌍 단검 스타일이라면?
스타일에 딱 맞는 멋진 단검이 나왔다면?
이도협은 알고 있다.
사망한 구원자는 인벤토리에 있는 물건들을 떨어뜨린다.
줍는 자가 임자인 것이다.
그때, 문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최정윤이 들어왔다.
***
"담배 피워도 되지?" 이도협이 물었다.
"아," 최정윤이 대답했다. "네. 그럼요."
"대신 이걸 틀 테니까." 이도협은 담배용 공기청정기를 틀었다.
"감사합니다." 최정윤은 기침을 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아침에 보고했던 거 말야." 이도협이 말문을 열었다. "그거, 최 대리 생각은 어때?"
"이준기 구원자님 건요?" 최정윤이 물었다.
"그렇지. 그거."
최정윤은 어제 아침 일을 떠올렸다.
충무공 길드가 소유한 광화문의 한 오피스텔.
오피스텔 지하의 브런치 카페에서 최정윤은 모처럼 여유로운 아침을 즐기고 있었다.
토요일 근무에 대한 대가로, 월요일을 쉬는 것이다.
워낙 비싼 곳이라 평소에는 엄두도 못 내던 식당이다.
충무공 길드 ID를 제시하면, 평일 브런치 메뉴 50% 할인을 제공한다.
그러나 브런치가 나오는 시간은 평소라면 업무 시간이다.
이번처럼 묘하게 아귀가 맞는 행운이 오지 않으면, 누리기 힘든 혜택이다.
눈을 감고 리코타 치즈 맛을 음미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준기였다.
"최 대리님, 아침 식사 중이세요?"
"아, 이준기 구원자님!"
"합석해도 될까요?"
"그럼요."
마시던 커피를 들고 이준기가 테이블 앞자리에 앉았다.
"일 얘기해서 죄송하지만, 이번 토요일 공격대 있잖아요." 이준기가 말했다.
"해운대 말씀이시죠?"
"네."
"그거, 제가 지원해도 될까요?"
"그건, C 등급이에요!" 최정윤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구원자님 지금 레벨이."
"네, 13레벨이죠. 그런데 어차피 지원자도 없다면서요?"
"C 등급이라면, 최소 적정 레벨이 20레벨이에요. 구원자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윤동직 구원자에게 들었어요. 15명 다 안 차면, 공격대가 취소될 수도 있다면서요."
최정윤은 잠깐 생각하고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일단 부회장님께 말씀드려볼게요."
그래서 오늘 아침에 이도협에게 보고한 것이다.
"응?" 이도협이 재차 물었다. "최 대리 생각에, 이준기를 보내도 괜찮을까?"
"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목숨은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최정윤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역시 그런가." 부하 직원의 단호한 대답에 다소 놀란 이도협은 최정윤을 향해 기울였던 몸을 다시 뒤로 기댔다.
"지원자가 없기는 하죠?" 최정윤이 물었다.
"그렇지. 그래서 이상덕 협회장도, 박충기 회장도 걱정이 많아."
***
강남구 삼성동, 한국 길드 협회 사무실.
협회장 이상덕이 전화 통화 중이었다.
"김 비서, 신 총장님 어디 가셨어요?"
"사무총장님 오늘 오전에 일이 있어 조금 늦게 출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오전에 회장님이 찾으실 줄은 몰랐어요."
"아, 그래요? 신 총장님 출근하시면, 제 방으로 오시라고 좀 전해주세요."
"네, 회장님."
이상덕은 전화를 끊었다.
신학길과는 같은 중학교를 다녔다.
이름에 배울 학 자가 들어간 신학길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아이들을 괴롭히는 맛에 살았다.
신학길의 타깃이 처음부터 이상덕은 아니었다.
그러나 피해자가 전학이라는 선택지로 자리를 비우자, 이상덕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덕? '덕이 있는 군자' 할 때 그 덕?"
"어, 맞아. 학길아."
"그래? 그럼 좀 맞아도 복수 같은 건 안 하겠네?"
떡이 되도록 맞았다.
빵도 콜라도 매일 사다 바쳤지만, 사람을 치지 않으면 따분한 학교생활을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지옥 같은 그 생활은, 신학길이 퇴학당하면서 끝났다.
1년 반이 영원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이상덕은 한국 구원자들 중에서는 가장 일찍 각성한 축에 속했다.
그래서 길드 협회를 만들겠다는 구상에 가장 먼저 참여했다.
준비위에서 위원장을 맡았고, 그 기세로 초대 협회장에 당선되었다.
경쟁자는 문경새재 길드의 회장인 박충기.
작년 10월에 펼쳐진 제2대 협회장 선거에서 다시 맞붙었다.
박빙이었지만, 다시 승리했다.
10월 말에 예정된 제3대 협회장 선거가 이제 두 달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사무총장이란 놈이 아침부터 자리를 비워?
비서가 회장실 문을 두드리고 말했다. "회장님, 신 총장님 오셨습니다."
"들어와요." 이상덕은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아침에 찾으실 걸 모르고 제가..."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신학길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신 총장님, 왜 그렇게 호들갑이에요? 문 닫고 여기 와서 앉으세요." 이상덕이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신학길이 문을 닫고 회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큰 키를 구부정하게 하고 잔뜩 움츠린 자세였다.
신학길이 자리에 앉자, 이상덕이 말했다.
"신 총장님.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 늦게 나온 이유가."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죽여 주십시오." 신학길이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목소리를 좀 죽여주세요." 이상덕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안 그러면, 진짜 죽여버릴지도 모르니까."
"죄, 죄송합니다."
"그래, 오늘 아침에 셀프 휴가를 즐긴 이유가 뭘까?"
"따, 딸 학교에, 수업 참관이 있어서..."
"배울 학 자 신학길이라서, 딸이 학교도 다니는구나?" 이상덕이 비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너, 지금 그런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냐? 발등에 불 떨어진 거 안 보여?"
"네?" 신학길이 침을 삼켰다. "해, 해운대 던전 말씀하시는 거죠?"
따끔. 가슴에 불쾌한 느낌이 날아들었다.
"으아악!" 신학길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검은 화살이다.
아무리 맞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
"이런, 멍청한." 자리에서 일어선 이상덕이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대학도 못 나온 놈이라 어쩔 수 없구나. 이딴 놈을 친구라고, 사무총장씩이나 시켜줬더니."
***
가해자는 기억하지 못한다.
신학길도 마찬가지다.
어느날 갑자기 연락을 받았다.
중학교 때 친구라고 하면서, 사업 하나 같이 하면 어떻겠냐고, 전화 저쪽의 상대방이 물었다.
나이가 들어가는 마당에, 음식 배달만으로 과연 괜찮은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동창이라는 그 사람을 만났다.
"나야, 상덕이. 기억 안 나?"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상대방이 물었다.
"하하하, 내가 중학교를 오래 안 다녀서. 잘 기억이 안 나네."
"광촌 중학교. 1학년 3반."
"하하하. 3반이었지, 그래." 신학길은 쑥스러운지 콧등을 만졌다.
중학교 때 친구였다는 상대방은 170센티미터가 채 안 되는 왜소한 남자였다.
190센티미터의 신학길은 그를 내려다보는 것이 불편했다.
뭔가, 불길한 기운이 그 남자를 감싸고 있었다.
"학길아, 서운하다." 이상덕이 말했다. "난, 널 잊은 적이 한 순간도 없었는데."
"그, 그래?" 신학길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우리, 되게 친했었나 봐?"
"아주, 친했지." 이상덕이 한 음절 한 음절을 분명하게 발음했다.
"정말 미안하네. 기억이 안 나. 내가 워낙 돌대가리잖아." 상대가 입은 비싸 보이는 수트빨에 위압 당한 신학길이 자학 개그를 시전했다.
"그래, 맞지. 네놈 돌대가리인 건 분명하지." 남자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어?" 표정이 구겨지며 신학길은 상대방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순간 흠칫했다.
상대는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잊을 수가 없어." 이상덕이 팔을 걷으며 말했다. "이렇게 분명한 흔적이 있는데, 어떻게 잊어?"
신학길이 그 팔을 바라보았다.
담배로 지진 것 같은 화상 자국이 선명했다.
"내... 내가?" 신학길이 말했다. "내가 그랬다고?"
"참 신기해." 이상덕이 말했다. "기억이 안 난다고?"
"저, 정말 내가?" 신학길이 말했다. "내가 그런 거야?"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짓을 했나 봐?"
"미, 미안해!" 신학길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평소와 달리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기억이 난다든가 미안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훨씬 키가 작은 상대방에게서 위험한 기운을 느껴서였다.
"미안해야지. 그렇지만 오늘 만나자고 한 건, 전화로 얘기한 것처럼 너한테 한 가지 제안을 하려는 거야."
"뭐, 뭔데?"
"내 개인 비서가 돼라. 월급은 서운치 않은 수준으로 줄 거야. 어때?"
신학길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 안 될 것 같아. 하던 일도 있고 해서."
"훗." 이상덕이 말했다. "음식 배달로 버는 것보다 훨씬 많이 받을 수 있는데?"
"그, 그래도..."
분명히 보복하려는 것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 해도, 이 제의는 거절해야 한다고 신학길은 생각했다.
"나,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아. 미안해, 상덕아."
그렇게 말하고, 신학길은 뒤로 돌아 내빼기 시작했다.
"파이어 월(Fire Wall)!"
신학길은 급히 멈춰 섰다.
그의 주변으로 불길이 일어나서 그를 향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이상덕이 말했다.
"죽고 싶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