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도크가 쓰러졌다.
미궁이라는 포맷이 특이한 것이지, 말레도크는 이름 붙은 고블린 주술사일 뿐이다.
12레벨에 패시파이어까지 든 이준기의 상대가 아니다.
-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 오두막 입구에 2개의 보물 상자가 생성되었습니다.
투기장이 사라지고 풀밭이 나타났다.
이준기의 바로 앞에 보물 상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준기는 상자를 열었다.
- 빠른 손 장갑.
- 장갑. 레어 등급.
- 발동 효과: 유효 타격을 입힐 때마다 일정 확률로 '빠른 손' 효과를 얻습니다. '빠른 손' 효과는 15초 동안 지속되며, 민첩성을 5 증가시킵니다. 최대 5번까지 중첩됩니다.
보급품 장갑을 쓰는 현재 상황에서는 뭐든 좋지만, 이건 정말 좋다.
민첩성 5 포인트라면, 현재 레벨에서 이준기는 적중률, 회피율, 그리고 치명타율을 1% 이상 증가시킬 수 있다.
15초 동안 지속되는 것이지만, 아주 큰 도움이 된다.
단점이라면, 현재의 무기인 패시파이어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것.
공격 쿨이 5초나 되는 패시파이어로는 '빠른 손' 효과가 중첩될 일이 절대 없을 것이다.
빠른 공속의 단검이 필요하다.
다음번 상자는 뭐가 나올까.
이준기는 두 번째 상자를 열었다.
- 해안 약탈자의 샌들.
- 신발. 에픽 등급.
- 착용 효과: 이동 속도가 2% 증가합니다.
- 발동 효과: 피격 시 일정 확률로 이동 속도가 15% 증가합니다.
레어 이상 등급이라 했으니, 에픽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기는 했다.
그러나 막상 에픽 등급이 떨어지다니,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하하하, 기꺼이 해안 약탈자가 되어 주지."
트로이의 해안을 약탈했던 아킬레우스.
이준기는 일리아스를 읽을 때마다 트로이를 응원했다.
그러나, 이제는 '발이 가벼운' 아킬레우스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
정장이 피투성이가 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도협은 상처 하나 없는 말끔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점심은 밖에서 먹는다고 장담했던 이도협 때문에, 기자들은 11시경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두 시가 지나서 밖에 나온 이도협의 모습에, 일부 기자들은 티가 날 정도로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던전이 통째로 바뀌었다는 말씀이죠?" 기자가 물었다.
"네, 이런 던전 포맷은 저도 처음이라, 조금 애먹었습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래도 클리어를 하셨으니, 축하드립니다. 역시 이도협이군요."
"감사합니다." 이도협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차원문 봉쇄에도 불편한 표정을 하시는 것은, 역시 박태군 구원자 때문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이도협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말을 멈췄다. "아끼던 후배였습니다."
"사망자가 나온 정황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
"포맷이 변경되면서, 모두가 일대일 전투를 해야 했습니다. 박태군 구원자가 가장 낮은 레벨이었으니, 어려운 전투였을 겁니다."
"각자 싸우다가 그렇게 된 거군요. 그래도 다른 분들은 상처 하나 없이 나오셨는데."
"전투가 끝나고 힐링 포션으로 치료를 해서 그렇습니다."
"이도협 구원자님도 다치셨나요?"
"저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저도 조금 다쳤습니다. 살짝 긁힌 정도였지만."
이도협은 그렇게 대답하고 자신감에 찬 웃음을 지어 보였다.
뒤쪽에 있던 기자가 물었다.
"그런 정도라고 보기에는 옷이 너무 피투성이 아닌가요? 이준기 구원자님은 옷에 피 한 방울도 안 묻었는데."
"아, 그건..." 이도협이 주저했다.
"제가 워낙 겁쟁이라서요. 느릿느릿 진행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이준기가 얼른 대답했다.
"그래도 인상적이네요. 민첩하신가 봐요?" 기자가 말했다.
"저는 다섯 번째 방까지 진행했습니다. 이도협 구원자님은 끝까지 진행하셨으니, 당연하죠." 더 이상한 얘기가 나오기 전에 이준기는 기자의 말을 끊었다.
"하긴 그렇겠군요. 뒤로 갈수록 더 강한 몬스터와 싸웠을 테니까요."
"네, 맞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이준기는 이도협을 흘끔 훔쳐보았다.
이도협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이준기가 한마디를 보탰다.
"이도협 구원자님이 아니었다면, 전멸했겠죠."
***
죽는 건가 하고 생각했을 때, 던전 클리어 메시지가 쏟아졌다.
이도협은 허벅지와 등 통증을 견디며 천천히 걸어 오두막에 도착했다.
오두막 바로 바깥에 이준기와 김하영의 모습이 보였다.
이준기는 김하영의 입에 힐링 포션을 흘려 넣고 있었다.
김하영은 피투성이에 곧 죽을 행색이었지만, 이준기는 말짱했다.
죽을 힘을 다해, 이도협이 말을 짜냈다.
"나... 나도 좀 살려... 줘."
이준기가 그에게 힐링 포션 한 개를 던졌다.
그리고 다시 김하영에게 힐링 포션 먹이는 일을 계속했다.
이도협은 힐링 포션을 받아 미친 듯이 들이켰다.
사레가 들려 기침을 했다.
그러던 중, 김하영이 콜록대는 소리를 들었다.
김하영이 깨어났다.
"이준기 씨?"
"정신이 들어요?" 이준기가 물었다.
"다행이네요. 조금만 늦었다면 한 사람 더 죽을 뻔했어요."
"네?"
"박태군 구원자는 죽었습니다.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어요. 살릴 수가 없었어요."
***
이도협은 이준기의 설명을 들었다.
열 번째 적수를 물리치자, 투기장이 바로 이곳, 즉 오두막 입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심하게 다친 김하영 구원자, 그리고 이미 시체가 된 박태군 구원자."
이도협은 오두막 자판기에서 구입한 힐링 포션을 마시며 이준기의 말을 들었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제일 컸다.
이준기 덕에 살았으니 감사한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창피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길드나 협회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 밖에 기다리고 있을 기자들에게.
이준기가 말했다. "부회장님, 부탁이 있습니다."
"뭐... 뭔데?" 이도협은 말을 더듬는 자기 목소리에 놀랐다.
"이 던전, 부회장님이 깬 걸로 해주세요."
"응? 무슨 얘기야?"
"이 던전을 제가 깼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쓸데없는 주목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도, 준기 씨가 깬 거잖아."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이 던전이 100% 개인플레이는 아닌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마지막 몹을 잡는 도중에, 녀석이 갑자기 퍽 쓰러졌거든요.”
“그래?”
“제 생각에는, 그 당시 각자 자신의 적을 공격하던 파티원들의 대미지 딜링이 합산되어 들어간 것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럴 수도 있겠군.” 이도협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저 혼자 쓰러뜨린 게 아니고 다들 힘을 합쳐서 쓰러뜨린 거죠. 지분이 제일 큰 것은 당연히 부회장님일 거고요.”
“준기 씨 말을 듣고 나니, 상당히 설득력 있는 소리야.”
“그래도, 기자들에게는 그냥 부회장님이 단신으로 보스를 쓰러뜨린 걸로 하죠.”
“응, 그럴까?” 이도협이 이준기의 표정을 살짝 살폈다.
“각자 따로 공격하는데, 대미지가 합산이 되고, 뭐 이렇게 말하면 너무 복잡하잖아요.”
“그것도 그렇지. 기자들은 복잡한 걸 싫어하니까.”
“원래 오늘 던전 파티는 부회장님 버스 파티이기도 하고요. 부회장님이 정리했다고 발표하는 게 맞는다고 봅니다.”
대미지 합산이라니, 27레벨이 되도록 들어본 적도 없는 얘기다.
그러나 믿고 싶었다.
겨우 13레벨짜리가 던전을 깨준 덕분에 죽음을 면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 알겠어. 그렇게 하지." 이도협이 말했다. "준기 씨, 고마워."
***
기자회견을 하는 이도협의 옆에 서서, 이준기는 조금 전 일을 회상했다.
말레도크의 미궁에서 열 번째 투기장은 언제나 오두막 앞이다.
부상을 빨리 치료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배려 아닐까.
이준기는 아무 문제 없었다.
도중에 조금 다치기는 했지만, 하급 힐링 포션 하나를 쓰기에도 아까운 경상이었다.
그래도 밖에 나가서 치료할 수는 없으니, 말레도크를 물리치고 힐링 포션을 하나 마셨다.
투기장이 사라지고 오두막 앞 풀밭이 나타났다.
한쪽 구석에는 피 웅덩이에 반쯤 잠긴 박태군의 시체가 있었다.
더 가까운 쪽으로 김하영이 쓰러져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화염구를 맞은 것이 분명했다.
이준기는 김하영에게 다가가 힐링 포션을 먹이기 시작했다.
입 안으로 제대로 흘려 넣으려고 하니, 천천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이도협이 걸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많이 다쳤지만,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김하영의 치료에 집중했다.
그때, 이도협이 살려 달라고 애처롭게 외쳤다.
이준기는 인벤토리에서 하급 힐링 포션 하나를 꺼내, 이도협에게 던졌다.
그걸 게걸스럽게 넘기고 나서, 이도협은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
을사 5적의 하나를 이렇게 살리다니.
그래도 여기에서 죽게 할 수는 없다.
자신의 죄가 뭔지는 알고 죽어야 할 것 아닌가.
이도협은 아직 사형을 당해야 할 죄를 짓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준기의 첫 살인 대상은 이미 정해져 있다.
회귀 후 첫 살인을 첫 살인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