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기의 다섯 번째 상대는 부두술법사와 코볼드 졸개들이었다.
첫 번째 던전에서 상대했던 바로 그 상대.
그러나 그때와는 레벨도 아이템도 다른 이준기다.
패시파이어로 가볍게 제압했다.
다섯 번째 투기장을 클리어하자, 땅 밑에서 자판기가 솟아 나왔다.
힐링 포션을 보충하라는 배려다.
그러나 하나도 마시지 않았다.
이준기는 열리는 문을 향해 뛰어나갔다.
인명 피해를 막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돈이나 명예 따위로 쉽게 대답을 했다면, 마지막 방까지는 크게 위험하지 않다.
문제는 이도협이다.
이준기가 기억하는 그의 성격이라면, 어려운 길을 갔을 가능성이 높다.
어둠 속의 하얀 길을 빠르게 달렸다.
***
제일 먼저 열 번째 투기장에 도착한 것은 박태군이었다.
블랙 드래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박태군은 쫄지 않았다.
여덟 번째 방에서 와이번을, 아홉 번째 방에서 레드 드래곤을 무찌르고 왔다.
무서울 게 전혀 없었다.
“네놈이 마지막이냐?” 박태군이 호기롭게 외쳤다.
“물론이다. 블랙 드래곤 이상의 존재가 세상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널 무찔러야 하는 거겠지?”
“날 무찌르겠다고? 하하하!”
드래곤의 웃음소리가 좁은 방에 울려 퍼졌다.
“감히 날 우습게 보다니, 혼내주마.”
박태군이 아마게돈(Armageddon)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천장과 벽이 갈라지고, 갈라진 자리에서 마그마가 분출했다.
동시에, 엄청난 힘으로 공간이 진동했다.
“건방진 놈.” 블랙 드래곤이 포효했다. "시질라(Sigilla)!"
일순간에 흔들림이 멈췄다.
갈라졌던 천장과 벽의 틈새가 메워지기 시작했다.
“아니? 도대체 왜 이러지?” 박태군이 당황했다.
그러나 아무리 집중해도, 마법이 거꾸로 돌려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마력을 최대한 끌어올렸지만, 블랙 드래곤의 마력에 막혔다.
1분이 넘게 그렇게 씨름했지만, 방은 원래대로 돌아갔다.
마력만 빠져나간 채로, 박태군은 숨을 몰아쉬었다.
“으하하하!” 블랙 드래곤이 말했다.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너 따위를 죽여봤자 내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항복이라면 뭘 말하는 거지?” 박태군이 물었다.
“말 그대로 항복이다. 가진 걸 전부 내놓고 나가거라.”
“잠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오냐.”
상태창을 들여다보았다.
- 94레벨.
- 전문화: 어둠 40, 불 42, 마나 12.
- 무기: 라즈카차올의 젓가락(Laz-ka-Za'ol's Chopstick)(전설급)
- 방어구: 레브맙의 외투(Clock of Lebh-Mab), 라고스잔타르의 고깔모자(Cowl of Lagos-Xantar), 대마법사 정장(Suit of Archmage).
- 획득 스킬: 아마게돈, 드래곤 브레스(Dragon Breath), 블랙 리프트(Black Rift), 로톤다르의 점화(Lotondhar's Ignition), 플레임 스트라이크(Flame Strike),
그 외에도 대략 40개 정도의 에픽 등급 이상 아이템들이 인벤토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94레벨의 넓은 인벤토리가 거의 꽉 찼다.
이걸 포기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포기하는 게 낫겠다.
"죽어라, 사악한 드래곤!" 박태군이 외쳤다. "로톤다르의 점화!"
밝게 타오르는 티끌이 하나둘 나타나 빠르게 공간을 채웠다.
"크크크크." 블랙 드래곤이 웃었다. "어리석은 놈 같으니. 웃기는 꼴을 더 구경하는 것도 좋겠지만, 나도 바쁜 몸이라서."
블랙 드래곤이 커다란 검은 날개를 펴고 한 차례 펄럭였다.
주변이 고요해지고, 공기가 차가워졌다.
그리고 전설급 마법 막대를 든 박태군의 손이 저절로 내려갔다.
"뭐, 뭐야! 왜 내 손이 맘대로 움직이지?" 놀란 박태군이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외쳤다.
"꿈은 잘 꾸었나?" 고블린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박태군이 고개를 들고 앞을 보았다.
말레도크라는 이름이었던가?
첫째 방에서 보았던, 작은 몸집의 고블린이 서 있었다.
블랙 드래곤 같은 건 없었다.
"뭐야?" 박태군이 다급하게 부르짖었다.
그의 눈앞에 상태창이 펼쳐졌다.
- 8레벨.
- 전문화: 불 6, 마나 2.
- 무기: 평범한 나뭇가지(보급품).
- 방어구: 가죽조끼, 가죽바지.
- 인벤토리: 숏 보우, 일반 화살 10개, 하급 힐링 포션 2개, 일반 식량 팩 3개.
"자, 덤벼라!" 말레도크가 그를 향해 마법 막대를 내밀었다. "얼음 화살(Ice Arrow)!"
"아마게돈!" 박태군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드래곤 브레스! 로톤다르의 점화! 아니, 그냥 플레임 스트라이크!"
역시 소용이 없었다.
말레도크의 마법 막대 끝에서, 얼음 화살 세 개가 차례로 날아왔다.
첫 번째 얼음 조각이 박태군의 손에서 평범한 나뭇가지를 떨어뜨렸다.
다른 두 개의 얼음 화살은 박태군의 가슴을 타격했다.
입에서 피를 흘리며 박태군의 몸이 얼어붙었다.
"사... 살려줘!"
"화염구!" 말레도크가 외쳤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화염구를, 박태군은 쳐다만 보고 있었다.
***
김하영도 열 번째 방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토끼였다.
그러나 앞의 토끼들과는 색이 달랐다.
일곱 색깔 페인트 통에 빠졌다가 나온 듯, 알록달록 무지갯빛 토끼였다.
"어머나, 귀여워!" 김하영이 저도 모르게 외쳤다.
"하영이, 안녕!" 토끼가 말했다.
"어머, 얘는 또 한국말을 하네. 반갑다!"
"가진 골드를 다 내놓으면, 저 문을 나가게 해줄게."
"뭐라고?"
지금까지 아홉 개의 방에서는 골드를 줍는 게 일이었다.
보급품 마법 막대로 한 대 때리면, 토끼는 그냥 죽어 엎어졌다.
토끼들은 죽으면서 사방으로 골드를 뿌려댔다.
줍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 힘든 일이라고는 없었다.
그런데 이 토끼는 덤비기라도 하겠다는 걸까?
"싸우자는 거야?" 김하영이 물었다.
"당근이지." 토끼가 말했다. "덤벼 보라고!"
좋아.
김하영은 마법 막대를 꺼내 들고 토끼를 향해 내리쳤다.
날렵한 몸놀림으로, 토끼는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뭐야! 치사하게 피하면 어떡해!" 김하영이 투덜거렸다.
"나도 살아야지." 토끼가 대답했다. "그래도 난 공격은 안 하잖아?"
"가만히 좀 있어!"
김하영이 다시 마법 막대를 휘두르며 덤볐다.
토끼는 사뿐하게 옆으로 점프했다.
그렇게 15분이 지났다.
김하영은 굽힌 무릎에 양손을 지지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말할 기운도 없었다.
토끼가 말했다. "어때? 쉽지 않지? 돈 버는 건 원래 쉽지 않은 거야."
"치... 치사하게!" 숨을 몰아쉬며 김하영이 말했다. "몇 푼이나 한다고!"
상태창이 떠올랐다.
- 소지 골드: 2,056 골드.
"그게 적다는 거야?" 토끼가 비아냥댔다. "네가 뭘 했다고?"
"아홉 개의... 방을... 정리했지." 김하영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정당한 노력의 대가였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토끼가 물었다.
"당연하잖아."
토끼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침묵이 부담스러워진 김하영이 말했다.
"왜 그래?"
"넌, 참 욕심 많은 인간이군." 토끼가 말했다. "지금까지는 피하기만 했는데, 혼내주고 싶어졌다."
"뭐?"
커다란 검은색 실크햇이 떨어져, 토끼를 뒤덮었다.
김하영은 이때다 싶어 모자를 향해 다가갔다.
온 힘을 다해 마법 막대를 모자 위로 내리쳤다.
"뜨거운 맛을 보여주지." 고블린의 목소리였다.
고블린 주술사 말레도크가 모자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스파크!"
손끝이 난로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김하영은 깜짝 놀라며 마법 막대를 떨어뜨렸다.
말레도크의 손끝에서 그녀를 향해 화염구가 날아왔다.
***
던전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갈색 아르마니 정장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한껏 멋을 부리고 저레벨 던전에서 으스댈 생각으로 온 건데.
으스댈 상대인 버스 승객들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더는 멋진 모습도 아니다.
놀 척후병의 시체가 바닥 위에 늘어져 있었다.
정말 죽을힘을 다해 물리쳤다.
지금 죽어 쓰러져 있는 것이 이도협 자신이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접전이었다.
상태창이 붉은색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머릿속은 사이렌이 왱왱 울리는 것처럼 시끄러웠다.
이도협은 양손의 단검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허겁지겁 인벤토리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양손으로 힐링 포션을 붙잡고 마구 들이켰다.
"더... 더 없어?"
힐링 포션이 바닥났다.
아직 모든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등도 허벅지도 타는 듯 아팠다.
이도협은 쓰러진 놀 척후병의 시체를 뒤졌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다.
첫 번째 방의 몬스터만 '결정적 단서'라는 퀘스트 아이템을 드랍했을 뿐,
이 던전의 몬스터들은 양심 없게도 아무런 룻을 주지 않았다.
힐링 포션이 없다.
더는 전진할 수 없다.
한두 대만 더 맞으면 죽는 것도 문제지만,
이 몸으로 무슨 공격을 한단 말인가.
최대한 편한 자세로 쉬고 싶었다.
그러나 타는 듯한 등을 바닥에 대고 누울 수도 없다.
그나마 멀쩡한 옆구리로 누워, 이도협은 숨을 골랐다.
조금이라도 더 쉬면서, 자연적인 회복이라도 기대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방의 조명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야?"
이도협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조명이 깜빡거리는 정도가 심해지더니,
천장에 쩌적 금이 가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출구 위쪽에 커다란 화살표가 나타나 번쩍거리고 있었다.
"나가라는 거냐..."
이도협은 팔꿈치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허벅지에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절뚝거리며, 이도협은 출구를 향해 걸었다.
숨 쉴 때마다 찾아드는 고통을 참으려고 호흡을 얕게 했다.
문득, 던전 클리어 조건이 생각났다.
- 차원문 소멸 조건: 파티원 1명 이상의 미궁 탈출.
누군가, 한 명만 미궁을 나가면 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게 가능할까.
압도적으로 높은 레벨인 자신이 겨우 세 번째 방을 클리어했다.
"여기서 죽는 건가."
그때, 상태창이 떠오르며 거짓말 같은 메시지를 쏟아냈다.
-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 오두막 입구에 2개의 보물 상자가 생성되었습니다.
"저... 정말?"
이도협은 기쁨에 울부짖었다.
어느새 바닥이 풀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도협은 풀밭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
이준기의 열 번째 방에는 오크 주술사가 경비병 둘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제외한 주변 아군들을 광폭화시키는 피의 격류(Blood Torrent).
아군을 자살 폭탄 테러범으로 만드는 시체 폭발(Cadaver Explosion).
이 두 가지가 오크 주술사의 핵심 기술이다.
오크 주술사라니, 현재 레벨의 이준기가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그러나, 말레도크의 미궁은 힘으로 제압하는 던전이 아니다.
이준기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느릿느릿 걸어오던 오크 경비병 둘이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주술사가 피의 격류를 켠 것이다.
이준기는 뒤로 점프하면서 '결정적 단서'를 작동시켰다.
퍽!
달려오던 두 경비병이 폭발했다.
그리고 뒤쪽에 서 있던 주술사 역시 쓰러졌다.
바닥에 떨어진 주술사의 옷가지를 헤치고 작달막한 고블린이 나타났다.
"좋아, 좋아." 말레도크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제법이군."
"넌,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거냐?" 이준기가 물었다.
"응?" 말레도크가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네가 누군데?"
"난, 이미 여러 차례 너를 만났다. 아니, 쓰러뜨렸었지."
이준기가 말하는 것은 물론, 그의 1회차 삶이었다.
"난 말레도크의 클론일 뿐이다. 아니, 그냥 복붙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지금 이 시간 이 던전에도 셋이 더 있지."
"그래, 그랬군." 이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래야 말이 되겠지."
"준비됐나?" 말레도크가 물었다.
이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덤벼라." 말레도크가 손짓했다.
이준기는 패시파이어를 뽑아 들고 앞으로 달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