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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17.
각자의 퍼즐

by 히말

박태군 역시 관 모양의 좁은 상자에서 시작했다.

좁은 길을 따라 첫 번째 투기장에 이르렀다.

한가운데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쥐였다.


같은 부처 공무원 출신이라고, 이도협은 박태군을 처음부터 챙겨주었다.

늘 으스대는 것, 그리고 후배 대하듯 하는 것이 불쾌했지만,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거의 버스로 지금의 레벨을 달성했다.


그러다 보니, 던전 안에서는 쥐나 토끼 같은 비선공 크리처를 죽이며 시간을 보냈다.

이도협이 거의 죽여 놓은 적을 향해 막타를 날리는 것도 지난번 던전에서가 처음이었다.

첫 상대로 쥐가 나온 것은 그런 배경 때문이었지만, 박태군은 당연히 몰랐다.


쥐가 한국말로 말했다.

"네가 원하는 건 뭐냐? 돈? 명예? 설마 세상을 구하겠다는 헛소리는 아니겠지?"


고블린에 이어 쥐가 한국어로 말하는 것을 듣자, 박태군은 황당했다.

그러나 차원문과 던전, 몬스터, 모두 황당한 현실이다.


박태군이 말했다.

"대답해야 하는 거야?"


쥐가 대꾸했다. "당연하지."

"대답을 안 하면?"


"여길 못 나가는 거지." 쥐는 뒤쪽의 닫힌 문을 가리켰다.

"퇴각은?"

"퇴각을 원하나?"


박태군은 생각했다.

버스라고 해서 들어온 던전인데 갑자기 솔로잉이다.

말로만 듣던 솔로잉.

퇴각할까.


그런데 문득 생각이 났다.


- 퇴각 페널티: 가장 가치가 높은 아이템의 몰수.


아니, 그건 안 되지.

지금 쓰는 무기만 해도, 팔면 1억은 받을 거다.


"아니. 퇴각은 하지 않는다. 질문이 뭐였지?"

"네가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돈? 명예? 세상을 구해보겠다는 사명감?"

"객관식이야?"

"주관식이다. 물론, 내가 예시로 든 것 중에 골라도 되고."


사례로 든 세 가지는 아무래도 함정 아닐까.

솔직히 말해도 될까.

착한 척했다가 위선자라고 벌을 주는 건 아닐까.


생각 끝에, 박태군이 대답했다.

"나는, 훌륭한 구원자가 되고 싶어."

"훌륭한 구원자가 뭔데?" 쥐가 팔짱을 꼈다.

"글쎄? 세상을 구하는 구원자?"

"그렇다면, 사명감이냐?"


"그래. 아니... 잠깐." 박태군은 잠깐 멈추었다 물었다. "거짓말을 하면 벌칙이라도 있는 거야?"

"당연하지. 거짓말의 대가는 죽음이다." 쥐의 목소리가 엄숙하기 그지없다.

헉.

박태군은 서둘러 대답했다. "아니, 사명감은 아냐."


"내가 좀 도와주지. 구원자가 되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나?" 쥐가 물었다.

생각은 무슨 생각.

땡잡았다는 생각뿐이었지.

신분이 바뀐 거잖아.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나?" 쥐가 재차 물었다.

"아냐." 박태군이 고개를 맹렬히 흔들었다. "난 그렇게 독한 성격이 아냐. 정말이야."

"그래서, 무슨 생각을 했지? 구원자로 각성했을 때?"

"신난다, 로또 맞았다, 이제 인생 폈다. 이런 생각을 했지."


"그래서, 인생이 폈나?"

"아니, 그건 아냐. 처음에 경찰 소속 구원자일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저레벨 구원자는 짐짝 취급이나 받는다고."

"그래도 일반인보다는 나은 거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구원자들은 그들만의 세계가 있고, 거기에서 나는 완전 하층민이잖아."


"그렇다면, 높은 레벨을 원하는 거야?"

"그래. 지금 당장 원하는 거라면, 높은 레벨의 구원자가 되는 거다."

쥐가 말했다. "좋아. 접수하겠다. 덤벼라."


"덤비라고?" 박태군이 물었다.

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자리에 서 있거나, 주변을 돌아다니며 찍찍거리는 보통의 쥐가 되었다.


조금 전까지 말하던 쥐를 죽이는 것은 꺼림직했다.

그러나 이 공간에 존재하는 건 자신과 쥐뿐이다.

쥐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덤비라는 것이었다.


박태군은 인벤토리에서 '바이킹 전투 도끼'를 꺼냈다.

이도협 버스를 타던 중 얻게 된, 레어급 양손 도끼.

쥐를 내리쳤다.


쥐가 쓰러지자, 룻을 살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선공 크리처는 보통 룻을 내놓지 않으니까.

그런데 쥐 사체에 뭔가 반짝거리는 것이 있었다.


- 결정적 단서.

- 퀘스트 아이템.

- 반드시 열 번째 방에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금속성으로 차갑게 빛나는 이십면체를, 그는 집어 들었다.

휘황찬란한 빛이 박태군을 감쌌다.


- 9레벨을 달성했습니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빛은 계속해서 그를 감싸 안았다.


- 10레벨을 달성했습니다!

- 11레벨을 달성했습니다!

- 12레벨을 달성했습니다!

- 13레벨을 달성했습니다!

- 14레벨을 달성했습니다!


***


김하영의 첫 상대는 갈색 토끼였다.

“난 첫 번째 관문지기다. 네가 뭘 원하는지 알아야 너를 도울 수 있다.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말해라.”

고블린에 이어 토끼가 하는 한국말에 잠깐 멍해졌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아무거나 말하면 되는 거야?"

"보통은 돈, 명예, 사명감 따위를 말하고는 하지." 토끼가 대답했다.


"생각 좀 해봐도 돼?"

"그래. 시간은 얼마든지 주겠다."


김하영은 생각했다.


지난 봄, 팀장의 한 달 치 영수증을 이면지 위에 풀로 붙이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상태창이 떴다.

인터넷 검색으로 자신이 구원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건물 밖으로 나와 카페에 들어가서, 단톡방에 톡을 날렸다.


- 안녕하세요. 김하영입니다. 퇴사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감사... 는 무슨, 이 개**들아, 그 따위로 살지 마라.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검색으로 찾아낸 유명 길드 몇 개를 접촉했지만, 1레벨 구원자는 받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경찰이나 군에서 경력을 쌓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경찰에 연락을 했다.

당장 경찰차로 모시겠다고 한다.

그날로 경찰 소속 구원자가 되었고, 서울지방경찰청장과 기념사진도 찍었다.


청장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경찰에서 오래 근무하면서, 국민에게 봉사하는 기쁨을 느껴봐요."


경찰에서의 경험은 당황스러웠다.

첫 던전은 E 등급이었고, 5레벨 구원자의 리딩으로 15명 인원 제한을 꽉 채워서 들어갔다.

창피했는지, 퇴각하고 나서 공대장이 대원들에게 말했다.


"다들 처음에는 이렇게 렙업하는 거예요.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보급품 숏 소드로 코볼드를 내리쳤던 순간도 기억한다.

검날의 느낌이 손끝으로 전해지고, 피가 튀었다.

칼을 몇 차례 휘두르고 나니, 백정 짓은 도저히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힐러 하겠습니다. 스킬 트리 어떻게 찍으면 되죠?"

피가 싫어서 힐러를 택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대열에, 김하영도 끼어들었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토끼가 묻는 말에, 그녀는 회상에서 벗어났다.

"내가 원하는 걸 말하라고 했지?"

"그래."

"아무거나 말해도 되는 거야?"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거짓말만 아니라면."

"그래, 그럼. 말할게. 내가 원하는 건 돈이야. 평생 일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의 돈."

그럴 돈만 있다면, 구원자 같은 것에 흥미는 없다.

그냥 놀고먹는 게 꿈이다.

다들 그렇지 않은가.


"솔직해서 좋구나." 토끼가 말했다. "자, 덤벼."

"덤비라니?" 김하영이 물었다.

토끼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


이도협에게는 오크 돌격병이 나타났다.

이도협의 27레벨이 진짜라는 증거다.


오크 돌격병 역시, 유창한 한국말로 물었다.

"네가 원하는 건 뭐냐, 이도협? 구원자는 왜 하는 거야?"


오크와 말을 섞다니, 말도 안 된다.

이도협은 쌍단검을 뽑아 들고 적을 향해 내달렸다.

오크 돌격병은 가만히 있었다.


사이드 스텝을 밟고, 이도협은 적의 옆구리를 향해 단검을 내질렀다.

"엇!"

마치 같은 극 자석끼리 만난 것처럼, 단검이 오크의 몸을 비켜 나갔다.


"훗." 오크 돌격병이 말했다. "시간 낭비하지 마라. 질문에 대답을 하면, 전투는 원 없이 하게 해주지."

"오크가 말을 다 하고, 이거 진짠가?"


"차원문은 진짜인가? 몬스터는? 구원자는?" 오크가 팔짱을 낀 채 되물었다.

"선문답 던전이야?"


"아니, 질문은 지금 한 번뿐이다. 일단 질문에 답하고 나면, 네가 원하는 싸움이다."

이도협이 물었다. "질문이 뭐였지?"


"네가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돈? 명예? 사명감?"

"그중에 골라야 하는 거냐?"

"아니, 네 맘대로 대답해라."

"말하면,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하나?"


"일단은 분명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지."

"일단은?"

"적어도, 당분간은."

"좋아. 그렇다면," 이도협이 말했다. "초코바 하나만 줘봐."


"그것으로 확실한가?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이 질문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라."

"Why so serious?" 이도협은 양 손가락을 입술 끝에 대고 조커 흉내를 냈다.


"신중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후회할 거다."

이도협이 인벤토리에서 쌍 단검을 쥐었다.

그리고 두 손의 무기를 동시에 앞으로 찔렀다.

그러나, 다시 튕겨 나왔다.


"이런, 젠장."

"질문에 대답해. 싸움은 그다음이다."

"난, 원하는 거 없다. 난 지금 생활에 만족한다고."

"거짓말에는 대가가 따른다. 아주 큰 대가가." 오크 돌격병이 위협적인 저음으로 말했다.


"시답잖은 소리. 난 원하는 거 없어."

"거짓말. 후회할 거다."

"지금 당장 널 죽이는 걸 바란다."

"좋아. 덤벼라."


***


박태군의 네 번째 상대는 오크 돌격병이었다.

박태군은 조금 전에 얻은 마법 막대를 휘둘렀다.

다가오기도 전에, 오크는 검붉은 화염에 휩싸여 쓰러졌다.


순식간에 또 8개의 레벨업을 했다.

37레벨이 되었다.


박태군은 씨익 웃으며 오크 시체를 살폈다.

에픽급 신발과 목걸이가 나왔다.

경기장 뒤쪽으로 열린 문을 향해 내달렸다.


김하영은 잇달아 토끼만 만났다.

토끼를 죽이는 것은 비위도 상하고 양심에도 찔리는 일이었다.

게다가 경험치도 없었다.


그러나 골드가 쏟아졌다.

도끼를 휘두르는 것은 잠깐이고, 금화를 줍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밖에 나가 원화 현금으로 교환할 생각에, 김하영은 콧노래를 부르며 다음 방을 향해 달렸다.


이도협은 원하던 싸움을 하고 있었다.

첫 번째 방의 오크 돌격병은 그런대로 쉽게 잡았다.

오크 돌격병도 D 등급 던전에는 조금 과한 몬스터지만, 한 마리뿐이라 수월하게 죽일 수 있었다.


룻을 살피니, 금속으로 만든 이십면체 모양의 물건이 있었다.

'결정적 단서'라는 이름의 퀘템이었다.

열쇠 같은 건가, 하고 이도협은 생각하며 인벤토리에 넣었다.

약간의 골드도 떨어졌다.


"갑자기 D 등급으로 바뀌어서 조금 놀랐지만, 별거 아니었군."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두 번째 방에서 이도협은 오크 강령술사를 상대해야 했다.

오크 강령술사라면 D 등급 던전에서는 보스몹 수준이다.

투기장 포맷이 아니었다면 아마 잡지 못했을 것이다.


보통의 던전이라면, 강령술사는 시체에서 해골 병사를 마구 불러 세운다.

그러나 투기장에는 다른 시체가 없다.

행운이었다.


강령술사를 만난 경험은 딱 한 번뿐이지만, 이도협은 파훼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27레벨, 그리고 대형 길드 부길마 자리를 도박으로 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러나 정말 심하게 다쳤다.


중급 힐링 포션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중급 힐링 포션을 살 골드라면, 현금으로 바꿨을 때 웬만한 경차를 살 금액이 된다.

겨우 저렙들 버스 태우러 와서 아껴놨던 중급 힐링 포션을 들이키게 될 줄이야.


터덜터덜, 이도협은 경기장 사이의 좁은 길을 걸었다.

세 번째 링에는 놀(gnoll) 척후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기장에 들어서고, 왔던 길 방향의 문이 닫혔다.


"야!" 적을 피해 움직이며 이도협이 허공을 향해 외쳤다. "투기장 관리자! 이건 사기잖아! D 등급 던전에 놀 종족이라니, 말도 안 돼!"


놀 척후병에 대해 공부는 해두었다.

그러나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박태군.png 박태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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