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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구원자 된다 ep 16. 도봉산

by 히말

이준기는 윤동직의 포르쉐를 타고 이동했다.

종로 타워에서 파티원들은 최정윤과 합류했다.

퇴근한 최정윤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다시 나와야 했다.


파티원들은 기자들을 피하려고 사무실에서 배달 음식을 먹었다.

윤동직은 음식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소주잔만 기울였다.

구원자가 던전에서 죽는 거야 흔한 일이다.


하지만 네 명이 생채기 하나 없이 정리한 던전에서 딱 한 명이 죽었다.

언론이 부나방처럼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그냥 나오면 되는 걸, 죽어버리다니. 못난 놈." 윤동직이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너무 자책 마세요, 탱커님." 정이채가 말했다.

"그래요," 안상혁이 호응했다. "이상철이 잘못한 거 맞아요. 술에 떡이 돼서 나타났고, 실수도 했잖아요."


"왜 그냥 퇴각하지 않은 거야? 그깟 아이템 없어질까 봐?" 윤동직이 탄식했다.

"한 1억 원 받을 수 있는 물건이니까, 아까웠겠죠." 안상혁이 말했다.

"그깟 1억 원이 목숨값이냐..."


현장을 보지 못한 이준기는 잠자코 있었다.

사소한 욕심으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사건이라면, 곧 흔해 빠진 일상사가 된다.


지난 생에 만났던 구원자 악당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시기심으로 이준기를 경찰 길드에서 내쫓았던 강구열.

길드원들을 학대하고 갈취하며 보스 행세를 했던 임찬우.

우월한 신체 능력을 이용해서 일반인 사냥을 즐긴 구원자 연쇄살인마들.


구원자들의 적나라한 민낯이 세상에 드러나는 일도 멀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최정윤이 말했다. "말씀하신 것들, 잘 정리해서 윗선에 보고드리겠습니다. 회장님이 결정하실 일이지만, 괜찮을 거예요. 파티 전체가 위험에 빠질 만한 상황이었잖아요."


결국 별일 없었다.

시체 없는 장례식은 이틀 뒤에 조용하게 치러졌다.


***


9월 2일 토요일, 아침 8시 20분.


도봉산역에 도착한 이준기는 휴대폰 지도를 보면서 도봉산 입구를 올라갔다.

편의점에서 나와 아이스크림 한 보따리를 들고 뛰어가는 전경이 보였다.

전철역이 있는 '도봉로'에서 도봉산 쪽으로 빠지는, '도봉산길'은 완전히 통제되고 있었다.


도봉고등학교 바로 앞 큰길 한가운데에 희푸른 차원문이 보였다.

길이 통제된 것은 물론, 도봉고등학교도 당연히 휴교 중이다.

학교 마당 한쪽으로 주차된 흰색 카니발이 보였다.

최정윤 대리가 이미 나와 있다.


“안녕하세요, 최정윤 대리님.”

“이준기 구원자님! 벌써 오셨군요. 너무 자주 뵈니 정들겠어요.” 최정윤이 웃었다.


"그러게요." 이준기도 웃어 보였다.

"다들 곧 도착할 거예요." 최정윤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도협 부회장님이 약속 시간은 칼 같이 지키시거든요. 물론, 남들 약속 시간 안 지키는 것도 못 참으시고."


회색 람보르기니를 필두로, 비싸 보이는 차 세 대가 차량 통제로 텅 빈 도봉산로를 질주해 들어왔다.

람보르기니가 인도 옆으로 차를 대려고 움직이자, 연석에 앉아 간식을 먹던 전경들이 곁눈질을 하면서 슬금슬금 옆으로 비켰다.


차 문이 열리고, 이도협이 내렸다.

이도협은 이준기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여기 있나’ 하는 표정이 아니다.

누군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 드디어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그는 친한 척하며 말을 걸어왔다.

"내가 준 차, 어디 있어? 벤틀리였던가?"


이준기가 대답했다.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였습니다. 제가 운전이 서툴러서, 집에 잘 모셔 놨습니다."

"아, 그래. 그렇군." 이도협이 말했다. "안 됐네. 구원자는 속도 제한 어기면서 마구 밟는 게 맛인데 말이야."


"그렇군요."

"이렇게 통제된 길에서 운전 연습해도 되고. 누가 구원자한테 딱지를 떼겠어."


간이 테이블에는 지난번처럼 커피와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모두 자리에 앉자, 최정윤 대리가 태블릿에 파티 정보를 띄웠다.


- 이도협. 27레벨. 딜러. 충무공 길드 부회장.

- 김하영. 9레벨. 힐러.

- 박태군. 8레벨. 딜러.

- 이준기. 11레벨. 딜러.


"엥? 11레벨? 레벨 식스 아니었던가?" 이도협이 말했다.

"며칠 전, 배화여고 파티에 참여하셨습니다." 최정윤이 대답했다.


"아, 그래? 레벨업 엄청 했네?" 이도협이 말했다. "오늘 최저 레벨은 준기 씨라고 생각했는데, 원래대로 태군이 버스 태우는 날이 됐군."

"브리핑 시작합니다." 최정윤이 말했다. "오늘 공략 대상은 고블린 투기장이라는 E 등급 던전입니다. 부회장님이 쓸어주시는 거니까, 경험치하고 아이템만 챙겨 드시면 됩니다. 흔히 말하는 버스 파티죠."


"숙련된 버스 운전사 대기 중입니다. 편하게 즐겨주세요." 이도협이 으스댔다.

"던전 포맷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됐어. E 등급 던전에 내가 가는데 무슨 브리핑이 필요해. 최 대리, 앉아. 커피 마시라고."


최정윤이 자리에 앉아 컵을 들어 홀짝였다.

이준기는 차원문 정보를 체크했다.


- 차원문 고유번호 08991. 랭크 E. ‘고블린 투기장’.

- 차원문 소멸 조건: 투기장 챔피언의 패퇴.

- 차원문 소멸 보상: 레어 아이템 1 개 이상.

- 퇴각 페널티: 없음.


고블린 투기장이라.

순서대로 나오는 고블린들을 상대하면 되면 편한 포맷이다.

E 등급 중에서도 제일 쉬운 축에 속한다.


그러나, 가끔 그게 아닌 경우가 있어서 문제다.


***

차원문을 터치하고, 그들은 던전 안으로 들어왔다.

던전의 베이스캠프, 오두막의 실내가 눈앞에 펼쳐졌다.


"다들 이 정도는 알지? 보급품 적당히 챙겨둬." 이도협이 말했다.

10레벨이 안 되어서, 다들 제대로 된 아이템이 없다.

김하영과 박태군은 선반 위에서 무기와 방어구를 챙겼다.


그러고 나서, 자판기를 바라보며 김하영이 물었다. "식량도 챙기나요?"

"식량은 무슨. 점심은 밖에서 먹는다." 이도협이 대답했다.

"부회장님, 멋지세요!" 김하영이 두 손을 모아쥐고 말했다.


"준기 씨랑 태군이는 물약 적당히 챙겨 둬. 힐러님이 힐 하러 들어온 것도 아니고, 각자 알아서 다친 거 치료하라고."

이준기는 하급 힐링 포션 두 개를 추가로 구입했다.


박태군도 자판기에서 하급 힐링 포션을 하나 샀다.

마지못해한다는 느낌을 물씬 풍기면서.


다들 바깥으로 나왔다.

고블린 몇 마리가 어슬렁거리는 것을, 이도협이 빠른 속도로 치웠다.

양쪽 손에 하나씩 쥔 단검으로 쓱싹 하고 지나치면, 고블린들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오빠, 달려!" 김하영이 오른 주먹을 내지르며 신나게 소리 질렀다.

"부회장님, 멋지십니다!" 박태군도 큰 소리로 외쳤다.

표정은 전혀 아니었지만.


가만히 있자니 뻘줌해서, 이준기도 박수를 쳤다.


"툭 치니까 쓰러지네. 막타 치는 건 투기장에 도착해서 해요." 이도협이 말했다.

숲길을 걸어, 일행은 투기장에 도착했다.

콜로세움 스타일의 웅장한 건물이다.


관중석 한가운데 중계 박스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었다.

턱시도, 나비넥타이 차림의 고블린이 한국말로 인사했다.

"도전자들이시군요! 가운데로 입장해 주세요!"


이도협이 비웃었다. "도전자는 무슨."

김하영이 말했다. "우와, 고블린이 한국말을 하네?"

박태군도 신기한 듯, 대꾸했다. "그러게."


이도협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까딱했다.

이런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려는 듯 보였다.

이준기는 물론 알고 있었다.

10%의 확률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


이도협이 설명했다.

"클리어 경험치만 먹으면 너무 적으니, 막타를 치세요. 내가 거의 죽여 놓으면, 가서 툭 치시면 됩니다. 힐러님도 무기 들고 왔죠?"

"그럼요." 김하영이 도끼를 들어 보였다.


맞은편 문이 열리고, 키 작은 고블린이 터덜터덜 걸어 들어왔다.

방송 박스에서 사회자가 외쳤다.


"첫 번째 상대입니다. 주술사 말레도크!"


예상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말레도크를 만나 본 적이 없는지, 이도협은 쌍 단검을 뽑아 들고 상대를 향해 달렸다.

말린다고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니다.

이준기는 이제 벌어질 사태에 대해서, 계획을 세워나갔다.


이도협이 고블린 주술사를 향해 단검을 내리치려는 순간.

투기장 전체가 휘황찬란한 하얀 빛으로 가득 찼다.


압도적인 빛으로 시야가 완전히 마비되자, 이도협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를 보고 있던 파티원들도 눈을 가렸다.


이준기도 눈을 감았다.

다음 단계를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다.


빛이 사그라들었다.

이준기는 어둡고 좁은 공간에 서 있었다.


혼자 서있기에도 비좁은, 마치 관을 세워 놓은 것 같은 공간.

앞으로 문이 열렸다.


온통 어두운 가운데, 조명으로 밝혀진 좁은 외길이 앞으로 나 있었다.

걸어갈 수밖에 없다.

상태창이 열리면서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 던전 정보가 수정됩니다.

- 차원문 고유번호 08991. 랭크 D. ‘고블린 주술사 말레도크의 미궁’.

- 차원문 소멸 조건: 파티원 1명 이상의 미궁 탈출.

- 차원문 소멸 보상: 레어 아이템 2개 이상.

- 퇴각 페널티: 가장 가치가 높은 아이템의 몰수.


이준기는 1회차의 삶을 떠올렸다.

초대형 길드, 서울 연합에서 2탱과 3탱을 오가던 시절이었다.

레벨은 20대 중반.


충무공 시절부터 꾸준히 같은 파티를 해오던 경성아, 유채리와 함께였다.

크리스마스도 지난, 연말이었다.

다른 기억보다 더 뚜렷한 이유는, 유채리가 중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늦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자신이 리딩한 파티에서 죽을 뻔한 사고는 처음이었다.

많은 던전에서 합을 맞추어 오던 두 사람과 함께였는데도 그랬다.

그건, 던전 포맷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자기만의 미궁을 헤매야 하는 포맷.


***


좁은 길의 끝에는 권투 경기장 크기의 공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기다리던 첫 번째 상대는 고블린 경비병이었다.

11레벨이고, 고블린들을 많이 상대했으니 예상 가능한 범위다.


김하영, 박태군의 첫 상대는 코볼드 또는 그 이하일 것이다.

토끼나 쥐일 수도 있다.

반면, 이도협은 오크 경비병 정도를 상대하고 있을 것이다.


김하영, 박태군의 레벨은 자신들이 쌓아 올린 것이 아니겠지만,

이도협의 27레벨은 진짜다.


이준기도 이도협의 실력만큼은 인정한다.

다만, 말레도크의 미궁이 처음이라면 매우 당황할 것이다.


고블린 경비병이 한국말로 물었다.

"넌 뭘 원하는 거지? 돈? 명예? 설마 세상을 구하겠다는 망상은 아니겠지?"


이준기는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건 복수다. 당연하잖아."


고블린이 말했다.

"알겠다. 덤벼라."


이준기는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패시파이어로 고블린을 내리쳤다.

고블린이 쓰러지자, 이준기는 룻을 살폈다.


- 결정적 단서.

- 퀘스트 아이템.

- 반드시 열 번째 방에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김하영.png 김하영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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