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15. 조우

by 히말

광산 입구 주변을 수색하다가, 파티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고블린 시체가 산 같이 쌓여 있네요. 이게 뭐죠?" 안상혁이 물었다.

"뭐긴 뭐야. 풀링해서 여기에서 잡은 거야." 윤동직이 답했다. "레벨 식스, 탱킹을 좀 아는 녀석인가 본데."


"딜러잖아요?" 정이채가 물었다.

"혼자 정리하려면, 탱딜힐 다해야죠." 윤동직이 대답했다.


"그런데, 정말 레벨 식스가 한 걸까요? 이 근처에 몬스터가 하나도 없는데?" 안상혁이 말했다.

"말로만 듣던... 솔로잉이군. 이 정도 잡았으면, 레벨 식스일리가 없네. 한 10레벨 된 거 아냐?"


윤동직의 말에 정이채가 말했다. "솔로잉?"

안상혁이 열띤 어조로 말했다. "솔로잉! 헬렌 카자크나 조슈아 테일러 쯤 돼야 하는 거잖아요!"

"그 사람들도 6레벨은 아니지."


광산 입구 주변은 물론, 광산 초입도 싹 정리가 돼 있는 것을, 그들은 목격했다.

아무것도, 그야말로 시체조차 없는 길을 그들은 걸었다.

간간이 광석 쪼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드디어 갈림길의 오른쪽에서 한 무더기의 고블린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 다섯 마리나 돼요!" 안상혁이 외쳤다.

"걱정 마." 윤동직이 방패를 세운 채로 적들을 도발했다. "곡괭이 든 광부들이잖아. 병사들이 아니라고."

"아, 그렇구나."


윤동직은 고블린 광부들을 한쪽으로 몰고, 등에 벽을 진 채로 탱킹했다.

안상혁은 뒤로 빠져 활을 쏘았다.

갱도가 비뚤배뚤해서 원거리 공격에 불리했다.

그러나 윤동직의 탱킹이 안정적이어서 어렵지 않았다.


정이채도 가벼운 힐만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머지 않아 몬스터 무리가 정리되었다.


"어느 쪽으로 가죠? 갈랫길인데." 정이채가 물었다.

"당연히 이쪽으로 갑니다. 조금 전에 광부들이 나온 쪽." 윤동직이 답했다. "한쪽 방향으로 쭉 돌아야 빼먹는 데 없이 돌죠."


룻은 별것 없었다.


***


안상혁은 생각했다.

탱커 윤동직은 아마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구원자들 중에서도 가장 신중한 성격일 것이다.

절대로 돌진 따위는 하지 않고, 언제나 풀링해서 전투를 시작했다.


한 무리를 처리하면 꼭 쉬면서 재정비를 요청했다.

둘이 재정비하는 동안, 윤동직은 앞으로 나가 적의 움직임을 살폈다.

동선을 꼼꼼히 살피고 나서, 애드 위험이 없다고 판단하면 활로 풀링을 했다.


아직 첫 번째 폭파 지점에도 도착하지 못했다.

이런 속도라면, 1박 2일로 끝낼 수 있을지 불안했다.


"탱커님 말예요. 너무 신중하신 거 아녜요?" 안상혁이 정이채에게 소근소근 물었다.

"힐러 입장에서는 너무 좋은데요." 정이채가 대답했다. "윤동직 탱커님과는 처음인데, 정말 잘하시네요."

"아, 그렇네요. 힐러님 입장은 생각하지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윤동직이 덩치에 맞지 않게 사뿐거리며 다가와 그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자, 진행하겠습니다. 10미터 쯤 앞으로 가서 풀링할게요."


이번 무리는 경비병 둘과 감독관 하나였다.

지금까지 처리한 무리 중 가장 힘들었다.

힐러인 감독관에게 공격을 집중해야 하는데, 감독관은 피가 빠지면 도망가기를 반복했다.


감독관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안상혁이 쫓아가면서 대미지를 입혀야 한다.

그런데 구불구불한 갱도에 막혀 사각이 안 나왔다.


"아, 쫌!" 윤동직이 외쳤다. "감독관이 자꾸 자힐하잖아! 대미지가 왜 이래?"

"길이 구부러져 있어서, 자꾸 표적에서 벗어나요!" 안상혁이 대답했다.

"이상철 딜러님이라도 있었으면 좀 나았을 텐데." 정이채가 말했다.


윤동직이 오른손의 롱소드를 크게 휘둘렀다. "그깟놈, 민폐만 끼쳤을 겁니다!"

하긴, 술 냄새가 진동했지.

안상혁은 마음속으로 윤동직의 의견에 동의했다.


한참이 걸려서, 셋은 싸움을 끝냈다.

윤동직이 털썩 주저앉아 힐링 포션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떡하죠?" 정이채가 시무룩한 어조로 말했다. "책을 다 썼어요. 이제 힐을 할 수가 없어요."

"레벨업은 아직 멀었나요?" 안상혁이 물었다.

"네. 경험치 바가 반도 안 찼네요." 정이채가 대답했다.


힐링 포션을 다 마시고 나서, 윤동직이 말했다.

"어쩔 수 없죠. 오두막으로 귀환하고, 내일 책이 재생되면 다시 와야죠."


"죄송합니다." 정이채가 말했다.

"아뇨, 딜이 모자라서 그런 거예요. 제가 죄송합니다." 안상혁이 말했다.

"탱이 허접해서 그래요. 제가 죄송하네요." 윤동직이 말했다.


셋이 함께 웃었다.

두 명이나 빠진 파티지만, 케미는 확실히 좋았다.


웃음 소리가 잦아들자, 멀리에서 쨍그랑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광부들의 곡괭이질 소리인가 생각했지만, 뭔가 달랐다.


"탱커님, 이거..." 안상혁이 말을 꺼냈다.

"광부가 아닌 것 같죠?" 정이채가 호응했다.

"제가 가서 체크해 보겠습니다." 윤동직이 일어섰다. "어차피 정찰을 해야 하니까."


윤동직과 세 걸음 정도 뒤에서, 안상혁과 정이채도 소리를 따라갔다.

180센티미터 정도의 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양손검을 휘두르는 게 보였다.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적은 경비병 셋이었다.


"경비병 셋을 상대로, 혼자?" 정이채가 소근거렸다.

"저 무기는 대체 뭐죠?" 안상혁이 말했다. "엄청 비까번쩍 하군요!"

말 없이 보고 있던 윤동직이 외쳤다. "도와줍시다!"


***


"도움 감사합니다." 이준기는 꾸벅 인사를 했다.


"아냐, 무슨. 별로 도움도 안 되었잖아." 윤동직이 손사래를 쳤다.

"이준기 구원자님, 정말 대단하세요!" 정이채가 엄지를 들어올렸다.


"그런데 아까 그 무기는 대체 뭐예요?" 안상혁이 물었다.

"아, 이거요." 이준기가 패시파이어를 꺼내 쥐어 보였다.

"우와, 너무 멋있어요."


"에픽 템...이겠지?" 윤동직이 물었다.

이준기가 링크를 공유했다.


- 패시파이어.

- 양손검. 에픽 등급.

- 대미지 등급 D. 공격 쿨타임 5초.

- 착용 효과: 물리 공격 회피율 +2%p.

- 발동 효과: 유효 타격시 50%의 확률로 적의 버프를 무효화시킵니다. 버프가 없는 적에게는 50%의 확률로 ‘둔화’의 저주를 겁니다.


"이게 겨우 에픽이라니." 안상혁이 말했다. "사기템이네요."

"글쵸. 템빨입니다." 이준기가 웃었다.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안상혁이 뻘줌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10레벨이시라고?" 윤동직이 물었다.

"이제 곧 11레벨 되겠네요." 이준기가 폭약을 세팅하며 대답했다. "이제 바깥으로 나가시죠."


갱도를 걷는 도중, 그들은 세 번째 폭발음을 들었다.


-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 차원문 소멸 보너스 경험치가 지급됩니다.

- 보상 상자가 생성되었습니다.

- 최소 레어급 아이템 1 개가 보장됩니다.


파티원들이 동시에 번쩍거리는 빛에 휩싸였다.


- 11레벨을 달성하였습니다.


"15레벨이 됐어요! 책도 재생되었고요." 정이채가 말했다.

"18레벨 달성했습니다!" 안상혁이 말했다.

"난, 드디어 20레벨이다!" 윤동직이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20레벨 축하드립니다!" 안상혁이 말했다.

"탱커로는 안 되겠지만, 20레벨이 됐으니 C 등급 던전에 갈 수 있겠지? 딜러로 말야." 윤동직이 말했다.

"그렇지 않을까요?" 안상혁이 대꾸했다.


"길드 관할에 C 등급 차원문이 있나요?" 이준기가 물었다.

한국에 생긴 C 등급 차원문이라면, 세종고가 처음이고, 두 번째가 해운대다.


세종고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9월 17일, 일요일이다.

세종고 던전은 인원제한이 5명이니, 지금 막 20레벨이 된 윤동직이 말하는 것은 해운대인 모양이다.


"길드 관할에는 없죠." 안상혁이 말했다. "C 등급은 빡세서, 길드 관할로는 안 돼요. 협회 관할이죠."

"아, 그렇군요. 윤동직 탱커님은 C 등급 차원문에 관심이 있으신 거예요?" 이준기가 물었다.

"아냐, 아냐." 윤동직이 대답했다. "나라고 목숨이 여러 개 있는 것도 아니고."


"맞아요. 그렇죠." 안상혁이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둘 다 너무 무서운데."

"20레벨이 돼서 너무 좋아 내가 헛소리를 했군." 윤동직이 말했다. "얼른 가서 보상 상자나 열어보자."


광산 입구에 비까번쩍한 대형 궤짝이 놓여 있었다.

상자를 향해 다가선 윤동직이 파티원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자, 윤동직이 상자 뚜껑을 들어올렸다.

하늘색 빛이 뻗어나왔다.


- 전리품을 획득했습니다.

- 물 반지(Ring of Water)

- 반지. 레어 등급.

- 착용 효과: 치유 스킬의 효과가 10% 증가합니다.

- 사용 효과: 1 분 내에 시전하는 치유 스킬에 소모되는 책이 곧바로 재생됩니다. 하루에 한 번 사용할 수 있으며, 매일 0 시에 충전됩니다. 사용 시 1%의 확률로 아이템이 영구히 파괴될 수 있습니다.


"축하드려요, 정이채 구원자님!"


아직, 순진무구한 시절이다.

힐러템이라고 힐러에게 그냥 밀어주는 분위기라니.


조금 지나면, 뭐가 나오든 돈을 주고 사야 한다.

다른 파티원들도 고생을 했으니, 골드라도 얻어가야 한다는 것이 논리적이기는 하니까.

자본주의는 차원문 안쪽이나 바깥쪽이나 다름이 없다.


"감사합니다!" 정이채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레어템은 처음이에요!"


그들은 숲길을 거꾸로 걷고, 오두막을 지나 던전 바깥으로 나왔다.

차원문이 소멸하는 가운데, 네 명의 실루엣이 나타나 진해졌다.


차원문 근처에 최정윤은 없었다.

클리어 하는 데 1박 2일을 잡았으니 당연히 집에 갔다.


경계를 유지해야 하는 군경들은 그대로 있었다.

안쪽 경계선을 지휘하는 군인이 그들을 향해 뛰어왔다.


"벌써 정리하신 겁니까?" 중령이 물었다.

"네, 보고합니다. 차원문 09119 소멸합니다." 윤동직이 선언했다.


최초로 차원문을 소멸시켰던 헬렌 카자크가 그렇게 했듯이,

구원자들은 사라져가는 차원문 앞에서 소멸 보고를 하는 것을 로망으로 여겼다.


소멸 선언과 동시에 터지는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

너무 일찍 나오는 바람에 그게 없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중령이 경계를 올렸다.

"충성!" 윤동직도 맞경례를 올렸다.


"아, 그런데." 안상혁이 물었다. "미리 나온 사람 있었죠? 집에 갔나요?"

"네?" 중령이 되물었다.


"아까, 열두 시나 한 시쯤, 퇴각한 사람 없었어요?" 안상혁이 말했다.

"아뇨, 없었습니다. 차원문에서 나오신 건 여기 네 분뿐이에요." 중령이 대답했다.


안상혁, 윤동직, 정이채가 차례로 뒤를 돌아 보았다.

차원문은 이제 아주 희미하게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


윤동직이 차원문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안상혁도 차원문을 건드리며 말했다. "터치가 안 돼요! 사라지는 게 멈춰지지 않아요."


"누가 퇴각했나요?" 이준기가 물었다.

"무, 문제가 있어서, 한 사람이 미리 나왔는데..." 윤동직이 말했다.


이준기가 대답했다.

"퇴각한 게 아니라면, 그 사람은 안에서 죽은 겁니다. 살아 있는 구원자가 안에 있으면, 차원문은 소멸하지 않잖아요."


안상혁.png 안상혁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14. 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