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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14. 퇴장

by 히말

"퉷!"

터프한 표정으로 이상철이 침을 뱉었다.

뱉은 침은 땅에 떨어지는 대신, 그의 재킷 소맷자락에 착륙했다.


"에이, 젠장. 이거 비싼 옷인데."

이상철은 들고 있던 검을 땅에 꽂아 놓고, 옷자락에 뭍은 침을 닦았다.

"7,900달러 짜리 재킷이라고. 100% 양가죽이고 구찌란 말야. 이탈리아 직수입품이라고."


현재 골드 시세라면, 하급 힐링 포션 네 개를 살 수 있는 돈이다.

이상철은 힐링 포션 대신 사치품에 돈을 썼다.


아깝게 힐링 포션은 무슨.

힐 받으면 된다는 것이 이상철의 생각이었다.

힐러는 힐 하라고 있는 것이니까.


"아, 이거요? 방어구 윗도리가 안 나와서 샀어요. 보급품 갑옷도 가죽 재킷이잖아요."

언젠가 파티원이 재킷에 관해 물었을 때, 그렇게 대답했다.


이상철은 상태창을 확인했다.


- 13 레벨.

- 전문화: 빛 3, 불 7, 마나 3.

- 강인함 30 민첩성 25 통찰 30 집중 15.

- 무기: 귀족의 롱소드(레어).

- 방어구: 소형 방패(보급품), 가죽바지(보급품).

- 인벤토리: 일반 화살 40 개, 숏 보우, 하급 힐링 포션 2 개, 기본 식량 팩 6 개.


뭔가 꼬인 스킬 트리다.

처음에는 검투사가, 나중에는 법사가 그럴듯해 보이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

몬스터에게 몇 번 맞아보니 근접전은 적성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미 근접전 쪽으로 스탯을 꽤 찍은 다음이었지만, 원거리 공격으로 바꿨다.


165센티미터, 95킬로그램.

"구원자 각성 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한 80킬로 초반 정도였지 않나?"

구원자로 각성하니, 키나 몸무게는 그대로인 채로 배가 쑥 들어갔다.

구원자는 몸매 관리가 저절로 되는가 생각했다.


그래서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나니 다시 이렇게 되었다.

구원자 각성 전의 똥배 몸매로 되돌아갔다.


아직 모태 솔로다.

클럽 다니는 맛에 산다.

순번이 오면 빼먹지 않고 던전에 들어오려고 노력은 한다.

그러나 던전 안에 들어오는 일이 달갑지는 않다.


목숨이 아깝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던전 안에서 책을 다 소모하면, 그날 밤에는 클럽에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클럽 입구에서 그는 언제나 직원과 시비를 벌여야 한다.


"여기는 아저씨들 노는 데 아녜요. 탑골공원 근처에 가보시든가. 콜라텍 많아요."


당연히 말로는 설득이 안 된다.

"화염구."

불이 붙은 오른 손을 보여주면, 얘기가 된다.

"구원자님,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스파크는 홀드하고 있을 수 없어서, 화염구를 보여줘야 한다.

던전을 돌다 나오면, 불의 책 두 권을 남기기가 쉽지 않다.

시내에서 돌아다니다가 길막 내지 어깨빵하는 놈들 혼내주는 데에도 스킬이 필요하다.

그러니 던전 다니는 게 달갑지 않을 수밖에.


던전을 도는 것과는 상관없이, 길드 소속이면 월급이 두둑하게 나온다.

충무공 길드를 선택한 이유도, 인원이 많아 순번이 늦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번을 두 번 연속으로 빼먹으면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한다.


이번에는 빠질 수가 없었다.

"그랬더니, 강찬성 이 늙은이가 순번을 빼먹네. 나참."


***


윤동직 파티는 신중하게, 정석대로 움직였다.

순찰하는 몬스터가 별로 보이지 않아, 파티는 한 시간만에 광산 입구에 도착했다.


"어디를 가도 몬스터 시체뿐이네요. 먼저 들어온 레벨 식스가 설마?" 안상혁이 말했다.

"정말 이상하네요. 6이 아니라 16이었나요?" 정이채가 말했다.

"우리가 정리한 게 두 무리였죠?" 윤동직이 물었다.

"네, 고블린 세 마리씩 두 무리였죠." 정이채가 대답했다.


"힐러님, 아침에 받으셨다는 문자, 어떤 내용이었죠?" 윤동직이 물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함께 파티 하게 된 이준기라고 합니다. 저는 사정이 있어 미리 들어가 정찰을 하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요?"


"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들어올 가능성은 없겠죠?"

"우리 길드 관할 차원문이고, 두 겹으로 경찰과 군인들이 포위하고 있는데, 그럴 리가."

"그럼 정말 레벨 식스가 이걸 했다고요?"


윤동직이 헛기침을 한번 하고 말했다.

"레벨 식스가 이 몬스터들을 죄다 잡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는 길에 그 사람 시체를 발견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그렇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정이채가 말했다.


"레벨 식스는 곧 만나게 되겠죠. 광산 입구까지 왔으니." 안상혁이 말했다.

"그래요. 그러니까," 윤동직이 대꾸했다. "일단, 입구 근처에 애드될 몬스터 무리가 있는지, 수색을 좀 합시다."


***


이상철의 머릿속에 아까의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자기만 놔두고 광산 쪽으로 가려는 파티원들을 향해, 이상철이 외쳤다.

"윤동직 씨."

목소리가, 많이 떨리지는 않았다.


윤동직이 뒤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험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윤동직 씨?"

이상철이 말했다.

"나가겠습니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네요."


윤동직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우뚝 섰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윤동직이 이상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말해봐."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 이상철이 말했다.

"그건 내가 할 소리군. 그런데 너, 말이 좀 짧다? 내가 열 살은 더 먹었을 텐데?"

"내가 언제나 당신보다 레벨이 낮을 거라 착각하지 마쇼."

"뭐가 어째? 꼭 한 대 맞고 나가야겠냐?"


윤동직이 소리를 높이자, 안상혁이 다가와 그의 팔을 잡았다.

"탱커님, 참으십쇼."

안상혁은 이상철에게도 한마디 했다.

"오늘은 네가 잘못한 거야. 일단 나가고, 최 대리한테는 상황을 잘 설명해. 알았지?"


이상철이 맞받았다.

"너는 왜 나한테 반말하냐? 너 몇 살이야?"

"뭐... 뭐라고?" 이번에는 안상혁이 폭발했다.

정이채가 말렸다.


그렇게 이상철은 파티에서 제외되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니, 뿌듯했다.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크고 우락부락한 사람을 상대로, 할 말을 했다.


예전에 일반인 한 놈을 혼내 준 것이 기억났다.

강남 한복판에서 어깨빵을 당한 것이다.

상대는 머리를 노란색으로 물들인 불량배 스타일의 남자.

예전 같으면 10미터 거리에서 미리 비켜 섰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자 이상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뭣도 모르는 불량배는 어깨를 부딪쳐 왔다.

그리고, 예상대로 양아치 대사를 읊었다.

"어? 아저씨, 지금 나 치고 지나간 거야?"


이상철은 웃는 얼굴로 돌아 보며 말했다. "네가 먼저 시비 걸었다. 알겠지?"

"하! 이 아저씨가 오늘 생명 보험 좋은 거 들고 오는 길인가 보네."

남자는 내려치려는 듯, 오른손을 이상철의 머리 위로 올렸다.


"스파크!" 이상철이 외쳤다.

"앗, 뜨거!" 남자가 놀라 뒤로 자빠지며 소리 질렀다. "이게 뭐야?"

"더 재미 있는 것도 보여주마." 이상철이 외쳤다. "화염구!"


이상철의 오른손에 불덩어리가 떠올랐다.

이상철은 그걸 던지는 대신 그대로 들고 폼을 잡았다.


남자가 번쩍 자세를 뒤집으며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구, 구원자님! 몰라 뵙고 까불어서 죄송합니다. 살려주십쇼!"


누군가 신고를 했는지, 경찰이 호루라기를 불며 달려왔다.

"구원잡니다. 이 사람이 먼저 시비를 걸어서."

이상철은 화염구를 거두었다.


어깨빵을 했던 남자는 스파크로 가슴에 2도 화상을 입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상철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경찰은 사건을 접수할 것인지 물었고, 남자는 벌벌 떨면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랬다가는 더 큰 보복을 당할 것이 뻔했다.

똥배가 나온 구원자도 있으니 조심해야겠다고, 남자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


이상철은 고민했다.

파티에서 제외된 것이 들통나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되었다.


던전을 돌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면, 거액의 벌금을 물게 된다.

두 달 월급 정도의 금액이니, 클럽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생활비도 부족해진다.


잠깐.

던전 클리어까지 대강 이틀 정도 걸린다고 생각하고, 숨어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리어 메시지 나오면, 그때 나가면 되지 않을까.

클리어 경험치도 먹을 수 있고, 골드도 약간 들어온다.


무엇보다, 퇴각 페널티를 받지 않아도 된다.

보급품이 아닌 아이템은 귀족의 롱소드뿐이지만, 팔면 아마 몇 억은 받을 거다.

그게 그냥 사라진다면 원통해서 잠도 안 올 게 틀림없다.


큰소리를 치는 게 마음에 안 들기는 해도, 윤동직은 19레벨이다.

그의 말대로, 하나만 더 레벨업을 하면 C 등급 던전도 도전해 볼 수 있는 레벨이다.

3인 파티이기는 해도, 탱커가 19레벨이니 D 등급 던전은 충분히 클리어할 수 있을 것이다.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오두막에서 잘 수 없다는 거다.

오늘 밤에 파티는 오두막으로 돌아와 잘 테니까.


용기를 북돋우려, 이상철은 소리내 말했다.

"내가 이래 봬도 보이 스카우트 출신이다, 이놈들아. 노숙쯤이야 껌이다."


어디에 숨어 있어야 할까.

환한 대낮에는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다.

그러나 밤에는 어떨까.


던전 안에서, 밤에 노숙을 한 적은 단연코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어딘가 아늑하게 밤을 보낼 만한 토굴 같은 건 없을까.

광산 지역이니, 그런 게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잘 곳을 물색해 두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상철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괜히 덤벼서 파티에서 쫓겨났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그러나, 윤동직을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었다.

구원자로 각성하면서, 부귀영화 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구원자의 적은 구원자였다.


***


이상철은 곧 길을 잃었다.

던전에서는 언제나 리더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였다.


게다가 두 달만에 들어온 던전이다.

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표지판 같은 것도 없다.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발자국이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찾으려고 한다고 갑자기 발자국이 보일 리 없다.

어쩐지 같은 길을 계속 도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멈추고 쉬자.


그렇게 생각하고 이상철은 인벤토리에서 기본 식량 팩을 꺼냈다.

맛은 더럽게 없지만, 뭐라도 먹으면 기분이 나아지겠지.


초조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이럴 줄 몰랐다.

그냥 퇴각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한번 둘러본 후, 이상철은 풀 위에 털썩 앉았다.

식량 팩 포장을 뜯으려고 고개를 숙인 이상철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얼른 고개를 들었다.

고블린 두 마리가 이상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헉!"

손에 든 것을 떨어뜨리면서 급하게 일어났다.


인벤토리로 손을 뻗어 우선 귀족의 롱소드를 잡았다.

손에 잡히자 마자 냅다 휘둘렀다.


둘이었잖아.


고블린이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다.


문득 허리에 강렬한 통증이 몰려왔다.

"으아아악!"

뒤로 돌아온 고블린이 그의 옆구리에서 단검을 빼고 있었다.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다시 손에 든 무기를 휘둘렀다.

앞쪽의 고블린이 방패로 그의 검을 막았다.

그리고 그를 발로 찼다.

키 작은 고블린의 발차기는 그의 정강이에 꽂혔다.

그것도 아팠다.


이상철이 혼신을 다해 외쳤다.

"스파크!"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술 이름을 말한다고 스킬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집중을 해야 스킬이 시전된다.

기술 이름을 외치는 것은 집중에 도움이 되라고 하는 것일 뿐이다.


"스파크!"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


방패수 고블린이 검을 휘둘렀다.

이상철이 쓰러졌다.


공격수 고블린이 새된 소리로 위협하며 양손의 단검을 동시에 찔러왔다.

시야가 흐려졌다.


이상철.png 이상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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