맵 전체가 울창한 숲이다.
전체 면적의 약 4분의 1 정도가 광산이지만, 그건 산 아래에 있다.
지도에 광산 입구가 표시되어 있지만, 그건 2차원 좌표다.
잘못해서 산길로 들어서면, 헤맬 수 있다.
광산 입구만 찾으면, 그 후로는 길찾기라고 할 것이 없다.
좁고 긴 갱도가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몬스터를 피해 움직일 공간은 없다.
광산 안쪽에서는 거의 모든 몬스터를 사냥해야 한다.
고블린 광산 B-9이라고 하니, 광산 유형이 여럿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두 개뿐이다.
B-9은 입구로부터 50미터 정도 외길로 들어선 다음, 고리모양의 갱도가 연결된 구조다.
C-12는 서로 반대 방향에 있는 입구 두 개가 S자 갱도로 연결된 형태다.
어느 쪽이든, 폭약 세 개를 설치하려면 거의 모든 몬스터를 잡아야 한다.
이준기는 오전 8시 정도에 광산 입구에 도착했고,
9시 30분쯤에 갈림길까지 정리했다.
12시를 10분 정도 남겨놓은 현재, 광산 전체의 50% 정도를 정리했다.
폭약은 가지고 오지 않았다.
- 누군가 던전에 진입했습니다.
같은 메시지가 네 번 출력되었다.
파티원들이 진입한 것이다.
이준기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 9레벨.
- 전문화: 어둠 2, 바람 2, 마나 5.
- 강인함 10. 민첩성 90. 통찰 10. 집중 10.
- 무기: 패시파이어(에픽)
- 방어구: 명예로운 적의 흉갑(레어), 가죽 바지(보급품).
- 장신구: 마력 저항의 펜던트.
- 인벤토리: 오크 분쇄자의 검, 불화살 2개, 일반화살 5개, 소형 방패, 하급 힐링 포션 3개, 기본 식량 팩 4개.
치명타율은 28.3%, 물리 공격 회피율은 30.3%다.
훌륭한 무기와 적중률 보너스를 받는 고블린 경비병들을 상대로는 회피율이 20% 수준이지만,
광석을 캐다가 곡괭이를 휘두르는 고블린 광부 상대로는 회피율이 40%를 넘는다.
그래서 지금까지 힐링 포션을 겨우 1개 소모했다.
패시파이어의 둔화 효과 덕분에 탱킹이 너무 쉽다.
힐러인 감독관이 섞여 있는 무리가 조금 까다롭기는 해도, 활로 풀링하면 별 문제 없이 처리할 수 있다.
지난 던전에서 챙겨 온 불화살은 이제 거의 다 썼지만, 천천히 사냥하면 된다.
그러나, 모든 몬스터를 싹쓸이하면 다른 파티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다.
레벨업 욕심이나 공명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싫어하겠지.
하지만 대개의 구원자들은 환영할 것이다.
일을 대신 해주었다고 생각할 테니까.
던전을 대신 치웠다고 싫어할 만한 인물이라면, 두 명 정도가 떠오를 뿐이다.
현재 한국 랭킹 1위인 한상태,
그리고 아직은 선두권이 아니지만 곧 무섭게 치고 올라올 주석 정도?
최정윤 대리의 파티원들 소개를 떠올렸다.
"힐러 정이채 님은 30대 중반 정도 되시고, 가정주부였고, 남편은 대기업 다니신다는데, 곧 때려치우고 와이프 매니저로 나서겠다고 한다네요."
"가족이 매니저 하는 경우, 많이 있죠?" 이준기는 코멘트를 하려다가, 말끝을 올렸다.
"네, 그럼요. 연예인이나 구원자나, 매니저는 가족 아님 친구죠."
"탱커님은 어떠세요?"
"윤동직 탱커님은 우리 길드 3탱이시니까, 실력은 확실합니다. 이번 파티에 공격대장 겸 탱커시고, 레벨도 제일 높으시니 문제 없을 거예요."
"다른 분들은요?"
"안상혁 딜러님은 20대 후반 정도 될 거예요. 전직 공무원이라고 하시고. 이상철 딜러님은 비슷한 나이에, 전직 프로그래머라고 들었어요. 이번 파티에서 레벨이 제일 낮죠. 지난 번 순서를 스킵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무조건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고요."
"아, 순번을 빼먹는 게 무조건 허용되는 건 아니었군요."
"그럼요. 구원자니까, 권리이기도 하고 책임이기도 한 거죠. 회장님 말씀입니다."
"회장님?"
"권영호 회장님. 우리 길드 전체 랭킹 1위시고, 한국 전체로 봐도 랭킹 2위! 엄청난 실력을 가진 분이죠. 길드 일에는 별로 나서지 않으시지만."
"그렇군요."
"그래서 이도협 부회장님이 길드 실무를 챙기시는 거죠. 이도협 부회장님도 엄청난 실력자시지만."
윤동직 등 이번 파티원은 1회차에 만난 적이 없다.
반면, 권영호와 이도협은 아주 잘 알고 있다.
아는 척할 상황은 아니지만.
"정이채 힐러님 전화번호, 알 수 있나요?"
"같은 파티니까, 당연히 전화번호는 공유해야죠. 그런데 왜 정이채 힐러님만?" 최정윤이 의뭉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제가 레벨이 한참 모자라니, 힐 받을 일 많을 것 같아서요. 잘 부탁드린다고, 미리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렇게 정이채 힐러에게 문자를 보내게 된 거였다.
***
차원문에 진입하고, 파티원들은 우선 선반과 자판기에서 보급 준비를 했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오두막 반가운데요."
"우리 파티 평균 레벨이라면 D 등급 던전에 한참 모자란다. 다들 정신 바짝 차려."
"네, 물론입니다. 탱커님, 잘 부탁드려요."
"힐링 포션 충분히 사놔. 힐러님 힘들지 않게."
평소와 다른 모습이라면, 역시 선반 위에 놓인 폭약이다.
"폭약 많네요. 세 개만 가지고 들어가면 될까요?"
"한 개 더 가지고 들어가자. 그것 때문에 다시 여기까지 올 수는 없지."
"안에 미리 들어갔다는 사람은 챙겨 갔을까?"
"설마요. 6레벨에 D 등급 던전에 오겠다는 거 보면, 무개념이잖아요."
윤동직이 한마디 했다. "내가 레벨이 제일 높기는 해도, 20레벨도 안 돼. 6레벨 버스 태울 생각은 없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 사람이 발목 잡을까 걱정되네요."
"딱 까 놓고 말해서, 제일 좋은 건 그냥 혼자 죽어주는 거지."
"글쵸. 애드라도 해서 파티 전멸시키는 것보다야."
전멸이라는 말에 잠깐 대화가 끊겼다.
"전멸이라니. 말 조심해. 이게 게임인 줄 알아? 전멸이라면, 다 죽는다는 얘기야."
"죄송합니다, 탱커님. 가만히 있을게요." 안상혁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각자 폭약 한 개씩 챙기고, 들어가죠!" 윤동직이 외쳤다.
오두막을 나서자 울창한 숲이 펼쳐졌다.
밤새 비가 왔는지, 바닥이 젖어 있었다.
"미리 들어왔다는 레벨 식스, 역시 개념이 없네요."
이상철이 혀를 차며 바닥을 가리켰다.
운동화 자국이 선명했다.
"음, 일단 발자국을 따라가 볼까." 윤동직이 말했다.
"네? 왜요?" 이상철이 물었다.
"그래도 같은 파티인데, 일단 합류해야지. 몬스터들한테 다굴이라도 당하고 있을까 걱정되네."
"윤동직 탱커님은 마음씨가 참 좋으셔." 안상혁이 말했다.
"같은 길드, 같은 파티인데, 시체라도 챙겨 가야지." 윤동직이 말했다.
"하하하. 시체 수습하러 들어온 느낌이네." 이상철이 말했다.
"시체?" 윤동직이 이상철을 흘겨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 그냥 그렇다는 얘기죠." 이상철은 윤동직의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그냥 농담이에요."
그들은 발자국을 따라 이동했다.
모두 열 걸음 정도.
더는 발자국이 없었다.
수풀 사이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뭐죠? 발자국이 갑자기 사라졌는데요?"
"여기서 죽었나?"
"시체도 없고, 피도 없고. 아니, 그냥 아무런 흔적도 없는데요?"
정이채가 물었다. "그냥 한 입에 구원자를 꿀꺽하는 몬스터는 없나요?"
"제가 D 등급 던전만 벌써 몇 번째지만, 그런 건 못 봤습니다." 윤동직이 대답했다.
"일단, 이 근처를 수색해 보죠." 정이채가 말했다.
"무개념 뉴비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에요?" 이상철이 항의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윤동직이 말했다. "여유가 있을 때, 시체라도 찾아줘야지."
"젠장, 진짜로 시체 수습하게 생겼네. 쯧." 이상철이 혀를 찼다.
안상혁이 끼어들었다. "다같이 찾아요, 아니면 나누어서?"
"다들 흩어져서 찾아보자. 힐러님은 공격 수단이 없으니 나와 함께 가시고." 윤동직이 대답했다.
***
그렇게 세 방향으로 수색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철이 다급하게 외쳤다.
"으아아! 여기 시, 시체가!"
"거기서 그대로 기다려!" 윤동직이 외쳤다.
이상철은 시체에서 5미터쯤 떨어진 지점에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이건," 정이채가 말했다. "고블린이잖아요."
"아무튼 시체잖아요!" 이상철이 말했다.
"이상철!" 윤동직이 불렀다.
"네." 이상철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던전 들어온지 얼마나 됐어?"
"그, 글쎄요? 한 달 정도 됐을라나?"
“맨날 술 퍼마시고 클럽에서 밤새고 그러다가 온 거지? 어젯밤에 뭐 했어?”
“아, 대장님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어젯밤에 제가 뭘 했든 무슨 상관이에요.”
“무슨 상관이냐니. 우린 지금 한 파티잖아. 파티원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는 건 당연한 거지.”
“저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 막말을 하시는 거예요. 저 술 별로 안 좋아해요. 어제도 조금밖에 안 마셨구만.”
“고블린 시체 좀 봤다고 비명을 질러?”
"비명은 무슨... 그냥 싫다는 거죠."
"그런 놈이 쭈그리고 앉아서 눈 돌리고 있었어?"
“시체 보고 놀랄 수도 있지, 소리 좀 질렀다고 이래도 되는 겁니까? 탱커면 다예요?" 이상철이 항의했다.
“아까부터 술 냄새 풍기는 걸 그냥 참고 있었는데, 뭐가 어째?" 윤동직도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아, 정말 술 타령. 내가 술 안 마셨으면 어거지 쓸 게 없어서 엄청 서운했겠구만!"
"너, 아까 차 몰고 나왔잖아. 그거 음주운전이야!"
"너? 나보다 나이가 얼마나 많다고 계속 반말입니까?" 이상철이 기어코 삿대질을 했다.
"아니, 이 자식이!"
정이채와 안상혁이 둘을 갈라놓으며 싸움을 말렸다.
"딜러님, 그냥 잘못했다고 하세요."
"탱커님, 그만 봐주시죠."
윤동직이 뒤로 돌며 말했다. "으으, 복장 터진다."
이상철도 지지 않았다. "이것참, 욕도 먹고 시체도 치우겠군. 재수 없으려니, 정말."
"뭐가 어째, 이 자식아!"
윤동직이 이상철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안상혁이 윤동직을 껴안고 말렸다.
"형님, 참으세요!"
"좋아." 윤동직이 안상혁의 팔을 풀며 말했다. "참아야지. 그런데 말야."
"네?"
"이상철 저 자식은 파티에서 내보내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난 더 이상 진행할 생각이 없다."
"뭐라고?" 이상철이 항의했다.
"형님!" 안상혁이 말했다. "아무래도 그건 무리 아닐까요. 6렙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이상철 딜러 내보내면 우리 셋이 진행이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윤동직이 말했다. "나 19레벨이야. 1레벨만 렙업하면 C 등급 던전에도 도전해볼 수 있는 레벨이라고. 탱딜힐 세 명이면 이 따위 D 등급 던전쯤이야."
잠시 머뭇거리다가 안상혁이 말했다. "동직 형님이야 강하시지만, 제가 아무래도 너무 약하니까."
"천천히 하면 돼." 윤동직이 말했다. "그렇죠, 힐러님?"
"네..." 정이채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듣고 있던 이상철이 폭발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당신이 뭔데 날 내보내겠다는 거요? 여기 퇴각하면 아이템 날아가는데, 당신이 물어줄 거요?"
윤동직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정이채와 안상혁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파티에 제일 위험한 존재는, 몬스터들도 아니고, 레벨 식스도 아닙니다. 저 술 냄새 풍기는 개가 제일 위험해요. 애드 한 번이면, 전멸입니다. 아시죠?"
"야, 이 개자식들아!" 이상철이 외쳤다.
"자, 가시죠!" 윤동직이 앞장 서며 말했다. "제 뒤로 바짝 따라오세요, 두 분."
윤동직은 한 걸음을 떼고 멈춰 섰다.
그리고 돌아서서 말했다.
"이상철. 따라오면, 죽인다. 나, 헛말 하는 사람 아니라는 건 알 테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