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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12. 사기업

by 히말

1억 5천이면 괜찮은 가격인 모양이었다.

곧바로 연락이 왔다.


- 콰트로포르테 팔렸나요?

- 아직 있습니다.

- 현금은 당장 없는데, 석 달 정도 할부는 안 될까요?

- 현금 대신 아이템으로 주셔도 좋습니다.

- 뭐가 필요하세요?

- 무기만 빼고 다 필요합니다.

- 아, 저렙이시구나.


저렙을 우습게 보는 것은 충무공 길원들에게 기본소양인 모양이었다.


- 렙제템이라도 갖고 계신가 봐요?

-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 파실 수 있는 물건 목록을 보내주시는 건 어때요?

- 그냥 제 인벤토리 링크 보내드릴게요.


이준기의 휴대폰에 상대방이 보낸 링크가 떴다.


- 무기: 오크 분쇄자의 검, 귀족의 롱소드, 다마스커스.

- 방어구: 풀 플레이트 메일, 사슬 장갑 +1, 징 박힌 전투화.

- 장신구: 모험가의 반지, 화염 저항의 반지 +1.

- 기타: 기본 식량 팩 6 개. 하급 힐링 포션 4 개.


무기를 보면 10레벨 중반 정도일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방어구는 훨씬 낫다.

인벤토리를 살펴보는데, 상대방의 톡이 왔다.


- 다마스커스는 안 돼요. 제가 쓰는 거라서.


무기는 관심없다고 분명히 얘기했지만, 상대방 말은 안 들리고 잊어먹고 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풀 플레이트 메일은 어떻게 구했을까.

자판기에 깜짝 판매로 떴을 때 샀을 거다.

골드를 그렇게 쏟아붓다니, 다치는 게 엄청 싫은 모양이다.


방패도 없는 거 보면 탱커도 아닐 텐데.

현재 이준기에게 도움이 될 물건은 하나뿐이었다.


- 사슬 장갑 +1

- 장갑. 레어 등급.

- 착용 효과: 물리 공격 저항 +1%p.

- 발동 효과: 피격 시 일정 확률로 1분간 원소 저항이 1%p 증가합니다. 1분간 지속됩니다. 이 효과는 중첩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가격이다.


- 사슬 장갑과 1억 원에 차 가져가시죠.

- 전화 해도 됩니까?

- 네.


전화를 받자, 상대방이 곧바로 열을 냈다.


"사슬 장갑이 5천이라는 거네요?"

"너무 싼가요?"

"말도 안 되죠. 뉴비... 아니 아직 저렙이라 뭘 모르시나 본데 레어템 장갑을 겨우 5천에 가져가려는 건 도둑이죠. 도둑."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 잠깐만요!"

"네?"

"징 박힌 장화랑 같이 해서 차랑 바꿔요."

"장갑, 장화 합쳐서 1억 5천요?"

"네. 그래도 제가 조금 손해보는 거지만."


징 박힌 장화는 레어템 중에서도 하급이다.

소소한 방어 보너스는 있지만, 페널티가 너무 크다.

발이 무거워지고, 소리가 요란해서 행동에 제약이 많다.

그런 민폐템을 넘기고 차를 받겠다니.


"그 템은 제 전투 스타일과 맞지 않습니다."

"전투 스타일? 그런 것도 있어요, 뉴비가? 푸하하하!"

비웃음과 함께 상대방은 전화를 끊었다.


그 후로도 톡은 계속 날아들었다.


- 마세라티 팔렸나요?

- 콰트로포르테, 아직 있습니까?

- 1.3억에 안 되나요?

- 무기는 있으세요? [오크 분쇄자의 검] 이거 1 억에 넘길게요. 엄청 좋은 건데. 저렙이시라면서요.


구원자들은 사치에 관심이 많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지금 당장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일까.

그래서 저축한 돈도 없는 모양이다.


***


2023년 8월 30일 수요일, 오전 11시.

종로구 필동 배화여고.

운동장 한가운데에 차원문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


본관 쪽 길옆으로 주차된 9 인승 카니발 해치백 뒷문이 열려 있다.

거기에 걸터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는 것은 최정윤 대리다.

차원문 입장 전 브리핑과 점검을 위해 11시까지 모여달라고 했건만,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11시에서 5분이 지나자, 포르쉐가 나타나 운동장 한 가운데에 섰다.

탱커 윤동직이 내렸다.


"어? 아무도 안 왔어요?"

"네, 윤동직 구원자님이 처음이세요."

"아, 버스 타는 녀석들이 자세가 안 됐네."


이후, 10분여에 걸쳐 다른 차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제대로 주차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바깥에서부터 전속력으로 달려 운동장 한가운데로 돌진한 후, 마치 드리프트라도 하듯 브레이크를 밟아댔다.


11시 16분.

마지막으로 도착한 힐러 정이채가 차에서 내리며 윤동직에게 고개를 숙였다.

"늦었습니다! 학교 앞에 교통 통제가 있어서 길을 헷갈..."


"아, 괜찮아요. 저는 10분 전에 왔지만." 윤동직이 쿨한 어조를 가장해서 말했다.

"조금 더 일찍 나왔어야 했는데." 정이채가 옆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아직도 안 온 사람이 있어요." 윤동직이 불쾌한 티를 내며 말했다.


"네?" 정이채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준기 딜러님이 아직." 최정윤이 말했다.

"아, 이준기 딜러님!" 정이채가 말했다. "문자 왔는데. 저한테만 보낸 거였나 보죠?"


"네? 문자요?" 윤동직이 물었다.

"네. 오늘 아침에 저한테 문자가 왔어요. 먼저 들어가 정찰하고 있겠다고."

"네?"


***


최정윤이 일행을 운동장 한쪽의 간이 테이블로 안내했다.

커피와 샌드위치가 준비되어 있었다.


"정이채 힐러님은 이거, 말씀하신 대로 디카프로 준비했어요."

최정윤이 정이채에게 컵을 건넸다.


이상철이 포장지를 대강 뜯은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 암울하네."

"뭐가 암울해요?" 정이채가 물었다.

"던전 들어가면 며칠 동안 그거 먹어야 하잖아요. 식량팩인가 뭔가 그거."

"아, 그렇긴 하네요." 정이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제대로 된 음식은 못 먹는다고 생각하니, 참."


"그렇게 먹어대니 살이 안 빠지지." 윤동직이 이상철에게 말했다.

"아, 동직 형님. 인신공격입니까?" 이상철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사실을 말하는 건데?" 윤동직이 말했다. "구원자가 이렇게 살이 찌려면, 도대체 얼마나 먹어야 하는 거야?"


"네? 구원자는 살이 잘 안찌나요?" 최정윤이 물었다.

"어머, 모르시는구나." 정이채가 대답했다. "구원자로 각성하니까 근육이 저절로 생기더라고요. 살도 잘 안 찌고."


"우와. 정말 축복받는 거네요. 구원자로 각성하는 건. 부럽다."

"부럽긴." 윤동직이 대답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삶인데."


"그러고 보니, 오늘 그 신입 분. 몇 레벨이에요?" 정이채가 물었다.

"부회장님이 그러시던데. 레벨 식스라고." 이상철이 대답했다.

"그런데 정찰 하러 미리 들어갔다고?" 윤동직이 말했다. "여기 D 등급인데?"


"D등급이면, 적어도 10레벨은 돼야 들어가는 거죠?" 최정윤이 물었다.

"10레벨은 최소 적정 레벨입니다. 15레벨은 돼야 정상이죠." 윤동직이 대답했다.

"그렇긴 하죠." 안상혁이 대답했다.


최정윤은 태블릿 화면을 흘끗 보았다.


- 배화여고 차원문 공략 파티.

- 탱커 윤동직 19레벨.

- 힐러 정이채 14레벨.

- 딜러 안상혁 17레벨.

- 딜러 이상철 13레벨.

- 딜러 이준기 6레벨.


"그래도, 윤동직 탱커님 계시니까, 안심입니다!" 안상혁이 말했다. "이 던전 포맷에 대해서는 경험도 풍부하시고."

"풍부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고, 예전에 클리어한 경험이 있으니까." 윤동직의 목소리에서 으쓱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탱커님, 화이팅!" 정이채가 외쳤다.

"근데, 오늘은 인터뷰 없어요?" 이상철이 물었다.

"그건, 부회장님이 생략하라고 하셔서." 최정윤이 대답했다.


"아침 10시에 부회장님이 방송국에서 인터뷰하시더라고요. 생방송으로 봤는데." 정이채가 말했다.

"아, 뭐야. 부회장이면 다야. 인터뷰를 빼앗다니." 이상철은 두꺼운 목을 좌우로 흔들며 혀를 찼다.

정이채가 이상철을 살짝 쳐다보았다.


"브리핑 시작할까요?" 최정윤이 물었다.

"그래요. 빨리 시작하시죠." 윤동직이 대답했다. "뉴비님 안에서 울고 계실지도 모르니, 빨리 들어가서 구해드려야죠."

"윤동직 구원자님은 마음씨도 착하셔." 안상혁이 말했다.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최정윤이 말했다. "앞에 놓인 태블릿 화면 봐주세요."

"네."

"오늘 진입하실 차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차원문 고유번호 09119. 랭크 D. '고블린 광산 B-9 구역'입니다."


"보상은 뭐죠?"

"레어 등급 아이템 1개 이상입니다. 소멸 조건은 고블린 광산의 붕괴입니다."


"퇴각 페널티가 있죠?" 윤동직이 지적했다.

"네. 레벨업 이후 축적한 경험치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물론, 50% 확률로 장착 중인 아이템 1개가 파괴됩니다."

"페널티 장난 아니네." 이상철이 말했다.


"윤동직 탱커님은 경험이 있지만, 구체적인 미션 방법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들어가시면 고블린 광산이 나옵니다. 갱도에 모두 세 곳, 폭약을 설치할 지점이 있습니다. 표시가 되어 있으니 찾기는 쉽다고 합니다. 문제는, 입구 오두막에서 폭약을 들고 가셔야 해요. 그러니까 인벤토리에 약간의 압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판기에서 물건 구매하시기 전에 폭약부터 챙기세요."


"세 개만 챙기면 되잖아요?" 안상혁이 물었다.

"넉넉히 챙겨가는 게 좋지. 무슨 일 있을지 어떻게 알아." 윤동직이 대꾸했다.


"그냥 막 죽이는 게 아니네요. 특이한 던전이네." 정이채가 말했다.

"그냥 어택 땅 이런 건 아니죠. 하하." 최정윤이 말했다.


“퇴각 페널티도 센데요. 장착 중인 아이템 소멸이라니. 내 무기, 비싼 건데.” 안상혁이 말했다.

“누가 퇴각을 한다는 거야.” 윤동직이 거슬린다는 투로 말했다.

“아니, 탱커님. 저희가 그런다는 게 아니고요. 먼저 들어간 사람 있잖아요. 퇴각하다가 뭐 떨어뜨릴까 봐 그러는 거죠.”


“레벨 6 인데 퇴각 페널티로 소멸될 아이템이 있기는 할까.”

윤동직이 기지개를 켰다.


***


그때, 이준기는 던전 안에서 열렙 중이었다.

첫 던전에서 얻은 에픽 양손검, 패시파이어의 손맛이 짜릿했다.


- 패시파이어(Pacifier).

- 양손검. 에픽 등급.

- 대미지 등급 D. 공격 쿨타임 5초.

- 착용 효과: 물리 공격 회피율 +2%p.

- 발동 효과: 유효 타격시 50%의 확률로 적의 버프를 무효화시킵니다. 버프가 없는 적에게는 50%의 확률로 ‘둔화(Slow)’의 저주를 겁니다.


대미지 등급 D라서, 같은 등급의 몬스터인 코볼드를 상대로 충분한 댐딜이 가능했다.

문제는 5초나 되는 공격 쿨타임인데, 두 번 치면 한 번은 둔화에 걸리니 충분히 무빙탱이 가능했다.


물론, 모든 공격은 활을 이용한 풀링으로 시작했다.

아침 7시에 들어왔으니, 곧 다섯 시간째가 된다.


이전 던전, '부두 술법사의 오두막'에서는 코볼드와 오크를 주로 상대했다.

이 던전은 고블린뿐이다.


오두막에서 나와 숲을 한참 걸어야 광산 입구에 도착한다.

이준기는 최대한 로밍 몬스터를 정리하지 않고 이동했다.

나중에 들어올 파티원들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다.


아예 새벽 2시쯤 들어와서 던전을 통채로 훔쳐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매번 던전을 훔칠 수도 없으니, 길드 없이 레벨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처음부터 던전을 강탈하면 길드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당분간, 충무공 길드원들과는 함께 길을 가기로 했다.


그래, 이도협까지도 말이다.


윤동직.jpeg 윤동직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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