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협입니다. 레벨 27이고, 스킬 트리는 불, 바람, 마나." 이도협이 진지한 톤으로 선언했다.
"이준기입니다. 충무공 길드에 들어올 수 있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이준기가 사무적으로 응대했다.
"지금은 어디 소속이신가?" 이도협이 물었다. "몇 렙이시고?"
일반인과 저레벨 구원자에 대한 갑질로 유명한 것은 브릴리언트다.
그러나 이도협의 말본새를 보면, 충무공도 별로 뒤져 보이지 않는다.
1회차에서는 13레벨이나 되었기 때문에 대우를 해준 모양이다.
"6레벨입니다." 이준기가 대답했다. "현재 소속은 없습니다."
"아, 레벨 식스!" 이도협이 말했다. "상큼한 시절이네요. 하하."
회의실 문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뭡니까!" 이도협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최정윤 대리입니다."
"아! 들어와요." 이도협의 목소리가 반색하는 표정과 조화를 이뤘다.
도넛이 가득 담긴 접시를 들고 최정윤이 들어섰다.
"그 자리에 스톱!" 이도협이 최정윤을 향해 말했다.
최정윤이 제자리에 섰다.
이도협이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라도 되는 듯 두 손을 움직였다.
도넛 접시가 최정윤의 손을 떠나 테이블 위로 날아왔다.
접시가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지만, 나름 소프트 랜딩이라 할 만했다.
"하하하! 재미있죠?" 이도협이 뽐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오오, 대단하신데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준기는 그렇게 말했다.
"우와, 부회장님. 역시 멋지세요." 최정윤이 두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그녀도 100% 진심은 아니었겠지만, 놀라는 표정이 나름 진실해 보였다.
"텔레키네시스(Telekinesis)라는 희귀 스킬입니다. 그러니까, 레벨 달고 책 주워 담는다고 아무나 익힐 수 있는 그런 스킬이 아니라는 얘기죠. 하하."
거드름을 피우며 이도협이 말했다.
"대단하군요." 이준기가 맞장구를 쳤다.
"이런 희귀한 스킬은, 신의 선택이라도 받아야 익힐 수 있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나야말로 신이 선택한 자라고 할 수 있겠죠?" 이도협이 말했다. "박충기 그 작자는 무슨 생각으로 길드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 하!"
신이 선택한 자들, 줄여서 신선자.
전용택의 길드 이름이다.
전용택은 반협회장파의 대표격 인물 중 하나로, 협회장 이상덕과는 앙숙이다.
이도협은 협회장의 오른팔이니 왼팔이니 하는 말을 듣는 사람이니, 전용택과 사이가 좋을 수가 없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만나면 웃는 척하며 인사하는 사이였다.
"어째, 차는 뭘 타십니까?" 이도협이 물었다.
"네? 차요?" 이준기가 되물었다.
"네, 차. 오토모빌."
"차가 있어야 하는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이도협이 말했다. "차 바꾸실 때 됐으면, 하나 뽑아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계약금 조로."
"아, 그렇군요. 그러나 저는 차가 필요 없습니다." 이준기가 말했다.
"차가 왜 필요 없어요?"
"대중교통이 잘 돼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차가 없다는 거죠?"
"네." 이준기는 짧게 대답했다.
"면허는 있어요?"
"네." 당연히 있다. 운전 면허 없는 경찰이 어디 있나.
"그러면 뭐, 얘기가 간단하군." 이도협은 혼잣말처럼 그렇게 말하고, 최정윤을 돌아보았다. "이봐, 미스 최. 내 방 책상 두 번째 서랍 열면, 열쇠 뭉텅이가 있거든? 그것 좀 들고 와줘."
***
더 낮은 레벨, 더 이른 시기에 충무공에 합류하게 되어서인지, 이준기는 이도협의 색다른 면모를 많이 보게 되었다.
이렇게 안하무인인 사람이었다니.
30대 중반의 나이에 부하 직원을 미스 최라고 부르는 것도 어이가 없었다.
은근히 말끝을 흐려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모호하게 하는 것도, 연습을 꽤 했을 것이다.
"레벨 식스 되셨다니, 차는 한 대 있으셔야죠. 계약금 조로 드리는 겁니다."
"네에..."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 이준기는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번 주말에 E 등급 던전 하나 정리하기로 했는데, 따라오시죠. 버스입니다, 버스! 아, 물론 대중 교통이 아니라... 버스 아시죠? 무슨 뜻인지?"
"네, 알고 있습니다."
"E 등급 던전이 쓸데 없이 세 개나 있으니 하나 닫아버리려고요. 우리 길드 유망주 녀석 장비도 맞춰주고."
"그렇군요."
"그냥 설렁설렁 따라다니시면서, 가끔 화염구나 한 개씩 날려주세요. 아차, 스킬 트리가?"
"어둠, 마나입니다."
"아, 특이하네요. 어둠이면 어둠, 바람이면 바람도 아니고. 뭐, 그런 거죠. 뉴비는." 이도협이 썩소를 지었다. "그렇게 아무거나 막 찍으면 좀... 스킬 트리 조언 좀 해드릴까?"
"나중에, 천천히 해주시죠." 이준기는 억지 웃음을 지었다. 그야말로 경청의 달인이 되는 중이다.
"좋아요, 좋아." 이도협이 웃으며 말했다. "레벨 식스 정도면, 대환영입니다! 충무공의 일원이 되신 걸 환영합니다. 아시고 찾아오셨겠지만, 전국 최강 길드가 바로 우리 길드죠."
"감사합니다."
문에 노크 소리가 들리고, 최정윤이 들어왔다.
이번에도 텔레키네시스로 장난질을 치나 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27레벨이니 마나의 책을 10권 이하로 찍었을 가능성은 낮다.
아무래도, 오늘 아침에 어딘가에서 이미 텔레키네시스를 한 번 쓴 모양이다.
자정이 지나 스킬 트리의 책들이 재생되면, 또 어디 가서 실컷 장난지를 하겠지.
최정윤이 테이블 위에 열쇠 뭉치를 내려 놓았다.
이도협은 제비 뽑기를 하는 것처럼 시야를 다른 곳에 두고 열쇠 뭉치를 뒤적였다.
"당첨!" 이도협이 열쇠 하나를 집어들며 외쳤다. "어? 마세라티네. 좋은 게 걸렸군."
"어머, 마세라티." 최정윤이 말했다. 아부를 하는 것인지, 정말로 좋아서 외친 것인지 모르겠다.
"마세라티 좋죠? 자동차는 역시 열쇠를 돌리는 게 맛이지. 버튼 누르고, 지문 찍고 하는 건 영..." 이도협이 말했다.
"마세라티요?"
"네, 마세라티. 설마 마세라티 모르시는 거?" 이도협이 비웃었다.
"마세라티가 자동차 이름이군요. 몰랐습니다."
이준기는 정말로 몰랐다.
1회차에 충무공에 스카웃될 때는, 3억 몇 천만 원을 전부 현금으로 받아 아버지 사업 빚을 탕감하는 데 썼다.
"이거, 꽤 괜찮아요. 엔진 느낌이 다르지. 계약금 조로 드리겠습니다." 이도협이 열쇠를 던졌다.
"우와, 좋으시겠다." 최정윤이 맞장구를 쳤다.
"감사합니다." 열쇠를 받으며 이준기가 말했다. "그런데, 돈으로 받으면 안 됩니까?"
"상큼한 레벨 식스에 무슨 돈을 그렇게 밝혀요?" 이도협이 인상을 썼다. "레벨 식스에 대 충무공 길드에 입단 허락 받은 것만 해도 경사예요, 경사!"
"네, 알겠습니다." 이준기가 끄덕였다.
“계약서는 전자 문서로 보내드릴 테니까, 사인해서 다시 보내시면 됩니다. 볼펜 사인이 아니고 전자 사인이요. 읽어보실 일이 없으실 테니, 여기 미스 최가 구체적인 건 설명해 줄 겁니다.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입단, 축하합니다.”
이도협이 일어나면서 내민 손을, 이준기도 역시 일어나면서 맞잡았다.
이도협은 악수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가르쳐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손에 힘을 주고 마구 흔들었다.
그가 나가자, 최정윤이 자리에 앉아 태블릿을 꺼내 펼쳤다.
“이준기 구원자님. 이도협 부회장님이 얘기하신 게 이 계약서고요. 내용은 제가 하나씩 설명해 드릴게요.”
계약금은 2 억 원. 거기에서 마세라티값을 빼고 나머지 2 천만 원 정도를 입금해 줄 예정이라고 최정윤이 설명했다.
마세라티값을 제하면 원래 한 푼도 남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빚을 져야 정상이지만,
수중에 돈이 없으면 박탈감을 느낄 테니 푼돈이라도 쥐여주는 거라고 했다.
마세라티 콰트로… 포르테? 이름도 웃기는군. 차는 필요없으니 팔아야 할 텐데.
계약서 내용은 이준기가 기억하는 과거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정부에서 지급하는 차원문 봉쇄 수수료를 나누는 방법, 던전에서 얻은 전리품 분배 방법, 길드 멤버들 사이에서 아이템을 사고파는 방법 등에 관해서 시시콜콜하지만 상식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조항이 있었다.
1회차에 이준기는 계약서를 읽을 여유가 없었으므로, 처음 보는 내용이었다.
“급행료라는 게 있네요?”
***
충무공 길드에는 웨이팅 리스트라는 게 있었다.
던전이 길드 몫으로 떨어지면, 누가 들어갈 차례인지, 그걸 정해두는 목록이었다.
합의할 경우, 순서를 바꾸거나 아예 자기 순서를 남에게 팔 수가 있다.
여기에서 오가는 금액이 급행료다.
이도협이 토요일에 E 등급 던전 버스를 약속하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그냥 기다릴 수는 없다.
국회 앞마당 차원문을 털어먹은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또다시 차원문을 훔칠 기회는 없을 것이다.
"최 대리님, 여기 계약서에서 말하는 웨이팅 리스트 열람 가능한가요?"
"네, 그럼요. 이제 우리 길드 멤버신데요."
최정윤이 태블릿 화면에 웨이팅 리스트를 띄웠다.
현재 한국 전체에 존재하는 차원문은 모두 36개.
충무공 관할은 현재 모두 6개였다.
"자리를 바꾸거나 팔려는 사람 목록도 있나요?" 이준기가 물었다.
"여기, 이름에 별표가 붙어 있는 분들이 그런 분들이에요. 클릭하시면 구체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별표가 붙은 이름은 많지 않았다.
그중 하나를 클릭했다.
- 강찬성.
- 1945년생. 남.
- 12레벨. 딜러.
- 스킬 트리: 빛, 불.
- 전투 유형: 원거리. 마법.
아는 이름이라 클릭했다.
아직 12레벨이셨구나.
반가웠다.
한국 구원자계 최연장자이신, 78세 강찬성 어르신.
젊은 시절에는 민주화 운동으로 옥고도 치르셨던 지식인.
불의를 못 참는 성격이셨다.
이번에는 돌아가시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이 분, 자리 양보하실 용의가 있다는 거네요?" 이준기가 물었다.
"네. 강찬성 어르신과 자리 바꾸시려고요? D 등급 던전인데..." 최정윤이 말꼬리를 흐렸다.
"아뇨. 자리 양보 받으려고요. 둘 다 가고 싶어서요."
"네? 토요일 일정이 있는데 이번 주에 또 일정을 잡으시려고요?"
"네. 제가 레벨업 욕심이 좀 많아서."
"알겠습니다. 강찬성 어르신과 연락해서, 어레인지 해 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준기가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드릴 게 더 있어요."
"말씀하세요."
"제 차...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 이거 현금화할 수 있을까요?"
"네? 차 파시려고요?"
"네. 그리고 혹시 길드 내에 아이템 거래 장터가 있는지도 좀 알려주세요."
당연히 있다.
그러나 물어봐야, 도움도 받을 수 있다.
"네. 있어요. 뭐 사시게요?"
"차는 필요없지만, 던전 안에서 쓸 물건은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차 팔아도 정말 괜찮을까요?" 최정윤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부회장님이 아시면."
“차를 준다고는 했지만, 계약금에서 깠으니 강매 아닌가요? 저는 저렇게 비싼 차 필요 없어요. 당장 잘 곳도 없는데 무슨.”
“길드 소유의 오피스텔이 있으니까 거기서 주무세요. 한두 달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마세라티. 좋은 찬가요? 길드 사람들 중에 살 사람 있을까요?”
“허걸. 좋은 차죠. 다들 외제 차 한두 대는, 가지고 계시지만 가격만 맞으면 누구라도 사고 싶어 할 걸요.”
“그럼 매물로 좀 올려주세요.”
“얼마에 올려 놓을까요?”
“한 1 억 5 천이면 빨리 나가려나요?”
“저라도 당장 사고 싶네요. 돈만 있으면.” 최정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