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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10. 충무공

by 히말

국회 앞마당 차원문.

소용돌이치는 푸른색이 점차 연해진다.

차원문을 배경으로, 사람들 실루엣이 하나둘 나타난다.


던전이 클리어되었고, 이준기, 즉 파티원 한 명이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차원문이 소멸 중인 것이다.


"어익후... 저를 민 것은 누구십니까?"


이준기는 균형을 잃은 척하면서 차원문을 둘러싼 사람들 쪽으로 쓰러졌다.


"기자신가요?" 쓰러지는 이준기를 잡아주며, 군인이 물었다.

"아뇨. 그냥 구경꾼인데요. 어쩌다 여기까지 밀려왔네요."


군인의 얼굴에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내는 북새통을 틈타, 이준기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역대 최단 시간 차원문 소멸 아닙니까?"

"들어가신 지 1시간도 안 됐잖아요?"

"정찰대 아니었나요?"

"공격대장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아직 바깥 세상에 시야도 적응 못 한 구원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질문이 계속 쏟아졌다.


잠시 후, 리더인 듯한 여자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일단, 길드에 돌아가 상황을 정리한 다음에, 기자회견을 열겠습니다."


이준기는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속으로만 말하며, 국회 바깥으로 걸었다.


1시간만에 차원문 정리.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나중에, 레벨이 높아진 조슈아나 이준기는 종종 그런 일을 했다.


구원자들 사이의 전쟁이 최우선인 상황이었다.

D, E 등급의 차원문은 귀찮은 설거지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저레벨 구원자들에게 경험치 한상 차림을 제공할 상황이 아니었다.

구원자 인구가 최대였을 때, 전 세계에 약 10만 명의 구원자들이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강력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원한에 의한 살인도,

아이템에 대한 욕심으로 인한 살인, 강도 사건이 종종 발생했다.


개인적 일탈이 전쟁으로 비화하는 과정에는 정치적, 사회적 요인이 작용했다.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은 협회장파와 반협회장파 사이의 갈등이 시작이었다.


미국에서 벌어진 전쟁은 레드 스테이트와 블루 스테이트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러시아나 멕시코는 마피아 사이의 싸움이 전쟁으로 커진 케이스다.


그 모든 파벌을 두 개의 진영으로 깔끔하게 정리한 것은, 조슈아 테일러의 한마디였다.


***


2025년 5월 17일.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제6차 세계 구원자 포럼이 열리고 있었다.


이준기는 미겔 산체스를 도와 바르셀로나 외곽의 차원문을 정리하고 나오는 중이었다.

지상 1미터 높이에서 푸른색으로 물결치는 직립형 타원이 흐려지고 있었다.


시가지는 폐허나 다름 없었다.

오크, 놀, 그리고 와르그(Warg) 시체가 즐비했다.


"정말 고마워, 모두들. 여기까지 날아와 주다니." 미겔 산체스가 말했다.

"이런 중요한 일에 돕지 않는다면, 친구라고 부를 수도 없잖아." 이준기가 말했다.

이준기의 왼팔을 감싼 하얀 빛의 원반이 손등을 향해 수렴하며 작아지고 있었다.


"사필귀정이야. 제국주의자들 같으니."

머리에 쓴 터번을 바로잡으며 키라트 싱이 말했다.


스페인 내전은 다른 나라에 비해 늦게 시작했고, 늦게 끝나고 있었다.

바르셀로나 외곽에 발생한 차원문을 카스티야 민족주의 길드인 라만차(La Mancha)가 탈취했다.


이들은 차원문을 정리하는 대신, 차원문에서 몬스터를 몰아 바르셀로나 시내로 내보냈다.

카탈루냐 독립주의 길드, 에스텔라다(Estelada)에 대한 공격이었다.


에스텔라다 소속 구원자이자 이준기의 친구였던 미겔 산체스가 도움을 요청했다.

이준기는 길수연, 키라트 싱과 함께 스페인으로 날아왔다.


탱크까지 동원해 차원문을 막고 있던 라만차 길드의 구원자들이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이준기와 동료들은 차원문 안쪽으로 그들을 추적했고,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오는 중이었다.


며칠에 걸친 힘든 전투였다.

자축할 힘도 없었다.

땅바닥에 털썩 앉으며 키라트가 말했다. "커피 마시고 싶다."


시계를 보니 오후 6시가 넘었다.

숙면을 위해 오후 3시 이후에는 커피를 삼가고 있었지만,

힘든 일을 마치고 나온 다음이라 유혹이 너무 강렬했다.


이준기가 당장 가자고 말하려는 순간,

한 남자가 잔해로 덮인 도로를 무서운 속도로 달려와 그 앞에 멈춰 섰다.


"이준기 구원자님!"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비상 상황입니다."

"뭐죠?" 이준기 대신 길수연이 물었다.

남자가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조, 조금 전에, 새,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슈아 테일러가..."


***


전 세계 탑 랭커, 조슈아 테일러가 전 세계 구원자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소식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퍼져 나갔다.

40레벨 미만의 구원자들은 전원 멸절시킬 것이라고, 조슈아는 엄숙하게 선언했다.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협박이 이어졌다.


40레벨 이상이라 해도,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선착순 700명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했다.

우선, 세계 랭킹 700위까지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자신의 새로운 길드, 오버시어(Overseer)에 가입을 권유하는 초청장이 곧 도착할 것이다.


"잘 생각해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협박을 끝맺으며, 조슈아는 해맑게 웃었다.


2분 17초에 불과한 동영상은 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유튜브 10억 뷰, 100억 뷰를 찍었다.

구원자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것은 이미 1년이나 되었으니 별 다른 뉴스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건 차원이 달랐다.


일반인들보다 구원자가 더 경악하는 뉴스는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믿어온 구원자들의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상위 포식자의 등장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구원자들은 모두 이준기의 대답을 주시했다.


조슈아 테일러, 그리고 연설 당시 그 곁을 지켰던 그의 동료들을 제외하면,

가장 상위 랭커가 바로 이준기였다.


이준기는 약자의 편에 서 왔다는 평판도 가지고 있었고, 가장 강력한 탱커이기도 했다.

조슈아 테일러의 반대편에 서려는 자들이 있다면, 그 구심점은 이준기일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준기가 말했다.

"조슈아, 네 망상을 깨뜨려 주겠다."


같은 시각, 헬렌 카자크도 런던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테일러 씨,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군요."


***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며, 이준기는 국회 정문을 빠져 나와 도로로 향했다.

전경들이 바리케이드를 치우고 있었지만, 아직 교통 통제는 풀리지 않았다.


할 수 없지.

이준기는 가볍게 뛰어 두 블럭을 움직였다.


아직 예전의 감각은 아니지만, 몸이 많이 가벼워졌다.

6레벨이지만, 민첩성은 75다.


"서울연합, 아니, 충무공 길드 사무실 부탁합니다." 이준기가 택시 문을 열며 말했다.

"네? 그게 어디죠?"


아무리 유명한 길드라도 택시 기사는 관심 없는 모양이다.

구원자가 택시 타는 일은 거의 없으니 당연하다.


이준기가 말했다. "종로 타워 가주세요."


이동하는 동안, 이준기는 던전 클리어 관련 기록을 상태창 시스템에 메모했다.

탱커로서 버릇이고, 언제나 도움이 되었다.

기록이 도움이 되는 것은 회귀자에게도 마찬가지일 터다.


- 차원문 고유번호 09487. 랭크 D. ‘부두 술법사의 오두막’

- 2023년 8월 27일. 진입: 11시 45분. 클리어: 16시 52분. 퇴장: 12시 15분(+1D).


여기까지는 자동으로 기록되는 로그(log)다.

이제, 개별적인 노트를 적는다.


- 진입 시 레벨 1, 퇴장 후 레벨 6.

- 수확: 오크 분쇄자의 검, 마력 저항의 펜던트, 명예로운 적의 흉갑, 패시파이어.

- 메모: 저레벨에서 렙업하는 데에는 마나 쪽 스킬 트리가 괜찮다.

- 메모: 회귀 후 첫 던전에서 희귀몹을 만났다. 운이 트이는 건가.


자동으로 기록되는 통계 정보도 확인했다.

탱커 때와는 다른 느낌이니까, 한번 봐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 스탯: 강인함 10, 민첩성 75, 통찰 10, 집중 10.

- 물리 공격 적중률 28.6%

- 물리 공격 저항 3.0%

- 물리 공격 회피 30.6%

- 물리 공격 치명타율 28.6%

- 원소 저항 7.0%

- 원소 공격 회피 2.0%


마법 스킬 트리를 탈 것도 아니니, 원소 관련 스탯은 저항과 회피 정도만 보면 된다.

택시가 종로 타워 앞에 섰다.


***


회전문을 통과해 종로 타워 안으로 들어섰다.

경찰로 일할 때는 안경을 써야 하나 고민해야 하는 수준의 시력이었다.

그런데 구원자로 각성하고 나니 시력이 엄청나게 좋아졌다.

지금도 10미터나 떨어진 안내판이 잘만 보인다.


20층부터 23층까지가 전부 충무공 길드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20층을 누르려는데 눌리지 않았다.


길드 사무실이 있는 층은 아무나 갈 수 없다는 얘기다.

안내 데스크에 물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나서려는 찰나, 문이 열렸다.


"죄송합니다." 정장 차림의 여자가 문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녀가 카드키를 대고 20층을 눌렀다.

그리고 이준기에게 물었다. "몇 층 가시나요?"


"저도 마침, 20층에 용무가 있습니다." 이준기가 대답했다.

"길드 분이셨나요? 처음 뵈어서 몰랐습니다."

"아뇨. 아직은 아닙니다."

"아하." 그녀가 웃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여자는 이준기를 작은 회의실로 안내했다.

키카드가 없으면 올라오지도 못하는 20층이지만, 출입문에 또 키카드를 대야 했다.

테이블 위에 명함을 사뿐히 내려놓으며, 그녀가 말했다. "저는 최정윤이라고 합니다. 길드 행정직이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준기가 인사했다.

"부길마님이 계신지 확인해보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우선, 커피라도 드시면서 기다리시죠? 4천만 원 짜리 커피 머신이 있거든요."

"라테, 가능할까요?"

"그럼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최정윤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


4천만 원 짜리 커피 머신이 뽑아냈다는 카페 라테를 마시며, 이준기는 창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20층에는 안내 데스크와 일반 사무실, 그리고 회의실 정도가 있었다.

구원자들의 개인 공간은 더 위층에 있는 모양이었다.


종로 타워.

지금은 충무공 길드 사무실이 빌딩 상층부에 있는 정도이고, 아래층에는 일반 사무실도 많이 들어와 있다.

조금 지나면 빌딩 전체가 사실상 구원자들의 놀이터가 된다.


대형 길드 두 곳, 즉 충무공과 코리아가 합병하여 서울 연합이라는 초대형 길드가 탄생한다.

그 때가 되면, 일반인들은 24층 라운지에서 식사도 하지 못하게 된다.

서울 연합의 구내 식당이 되어버리니까.


1회차의 삶에서, 이준기는 경찰 소속으로 5레벨을 달성하고 관악구의 지역 길드, 관피아로 옮겼다.

그곳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13레벨을 달았다.

그런데 길드가 와해되었다.


여러 차례 인상적인 플레이로 명성을 쌓은 이준기에게 서울의 양대 길드가 스카웃 제의를 해왔다.

충무공, 그리고 브릴리언트.


브릴리언트는 일반인과 저레벨에 대한 갑질로 유명해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딱히 충무공 길드가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브릴리언트보다는 악평이 덜했다.


이준기는 충무공에 합류했다.

아버지의 사업 빚을 전부 갚아주는 조건이었다.


아차, 이준기는 생각했다. 과거로 돌아왔다면, 아버지 빚이 그대로겠군.

회귀 시점이라면, 아직 4억 원 이상 빚이 남아 있는 상태다.


엊그제 전화를 드렸겠지만, 저녁 때 어머님께 다시 전화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당장 갚을 수는 없다.


1회차의 삶에서 충무공이 스카웃한 것은 탱킹 실력이 인증된 13레벨의 구원자 이준기였다.

지금의 이준기는 어떻게 렙업했는지도 모르는 6레벨 양민이다.

빚을 갚아줄 리가 없다.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일수 걷으러 다닐 것 같이 생긴 정장 차림의 남자가 들어섰다.

남자는 이준기를 빤한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의자 위에 털썩 앉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길드 찾으신다고요?"


요란한 등장.

이도협이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을사 5적의 일원이다.

일본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일본 편에 서서 한국 구원자들을 학살한 사람이다.


이도협.png 이도협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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