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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25. 이해 충돌

by 히말

“한상태 회장, 엄청 부잔가 보네요. 4백만 원짜리 포션을 뭐 물 마시듯 하네요.”

“저렇게 솔선수범하니까 현재 대한민국 탑랭커 자리까지 올라간 거 아니겠어요?”

“그렇죠. 누구든 저런 탱커와 함께하고 싶어 할 겁니다.”


힐링 포션을 들이마시며 냅다 질러대는 탱커 한상태를 두고 다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상태의 리드로 빠르게 진행한 덕분에, 공격대는 여유롭게 입구로 되돌아왔다.


"2층으로 진입하면 노숙해야 합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고 지붕이라도 있는 오두막에서 자는 걸로 하죠."

공격대장 박충기의 설명이었다.

2층 포맷 던전 경험이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의 의견이라,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젠장, 이게 비누야 양초야? 이런 걸 어떻게 먹으라고?"

큰 나무에 기대고 앉아 식량 팩을 씹던 장혁수가 투덜댔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C등급 던전 오두막은 분명히 큰 편이었지만, 15명이 자기에는 좁았다.

오두막은 여성 공격대원들에게 양보하고, 남자들은 밖으로 나왔다.

장혁수가 다시 한번 투덜거렸지만,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어, 회장님!" 윤동직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권영호가 윤동직과 이준기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회장은 무슨 회장이에요." 권영호가 말했다. "오늘 힘들었죠?"

"네, 하하." 윤동직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민폐 아닌가 걱정입니다."

"민폐는요. 이제 19레벨이군요. 내일은 20렙 달겠는데요?"


윤동직과 이준기는 각각 레벨업하여 19, 14레벨이 되었다.

장혁수는 17레벨 달성한지 얼마 안 되었는지, 그대로 17레벨이었다.


"퉷!"

바닥에 침을 뱉은 장혁수가 오두막 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잠을 청하는 것이 보였다.


***


“뭐야? 오두막이라고 아침 점호를 안 할 줄 알았나?”

박충기의 말에 장혁수가 고개를 돌린 채 대답했다.

“점호 끝나기 전에 돌아왔잖습니까.”


“끝나기 전에 돌아온 게 아니라, 네가 없어서 점호가 늦어진 거다.”

“아, 도대체 회장님은 왜 자꾸 저한테만 그러십니까.”

“지금은 길드 회장이 아니고, 공격대장이다. 다른 길드 사람들도 많은데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마.”


아침부터 장혁수가 없어져서 잠깐 소란이 있었다.

숲속에서 어슬렁거리며 나타나는 장혁수의 옷자락에 신선한 피가 묻어 있었다.

혼자 다니는 오크 몇 놈을 혼내줬다고 말하는 장혁수.

허세를 부려봤지만, 기분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숲속에 몬스터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선제공격을 하지도 않는 들짐승 몇 마리를 잡았을 뿐이다.

짐승이나 오크나 피는 똑같이 빨간색이니, 허세는 부릴 수 있었다.


“이렇게라도 공격대에 기여를 좀 해야죠. 쪼렙이니까.”

장혁수가 이준기를 향해 눈길을 던지며 도발했다.


"한 번이라도 더 개별행동을 하면," 박충기가 장혁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알지?"

"네, 네, 길마님." 장혁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버지한테 이르지만 말아 주세요."


***


공격대는 일찍 출발했다.

오전 중에 1층 나머지를 정리하고 2층으로 진입하겠다고, 공격대장 박충기가 브리핑했다.

이제 손발이 좀 맞는지, 사냥 속도가 어제보다도 빨라졌다.


오전 열 시쯤, 멀리,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작게 보였다.

숲속 한가운데,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돌계단이 높게 솟아 있다.

무척 부자연스러운 광경이다.


그 아래쪽으로,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광경.

오크 30마리 정도가 나름대로 진형을 갖추어 움직이고 있다.

15마리짜리 두 부대다.


지금까지 풀링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돌진에 돌진을 거듭한 한상태지만, 이번에는 신중하게 적진을 관찰한 후에, 안전하게 한 무리를 당겨왔다.

계단을 지키는 다른 무리가 얽혀들지 않도록, 한상태는 활로 한 무리를 당기고 뒤쪽으로 움직여 공간을 확보했다.


두 무리가 완전히 분리된 다음, 권영호는 어제와 같이 ‘검은 탄막’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열다섯 마리라면 투자 대비 최고의 효율이라 할 만했다.


시전에만 10초가 걸리는 복잡한 스킬.

권영호는 복잡하게 손을 놀리면서 자신의 눈높이에 검은색 도형을 그려가고 있었다.


그때다.

남궁훤의 독화살이 계단 쪽으로 멀어지는 다른 무리의 오크를 향해 발사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봤을까?’

실수인지 고의인지, 그 행동에 대해 이준기가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궁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소멸.

어둠-바람 계열로 찍었을 때 얻을 수 있는 희귀 스킬.


남궁훤을 향해 뛰어오던 오크 무리가 다른 공격대원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애드!”

“비상사태입니다!”


10초간의 시전을 끝마친 권영호는 눈을 뜨고 자기 앞에 그려진 검은 원을 손바닥으로 내리찍었다.

15개 대신 30개로 갈라진 검은 유체가 공중을 날아다녔다.


“길수연님, 힐을!”

그렇게 외치고, 한상태는 전설급 방패 ‘아스트라아제’를 들었다.

방패에서 오렌지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공격대원 14명과 섞여 난전을 벌이던 오크들이 자기도 모르게 오렌지색 빛을 향해 부나방처럼 뛰어들었다.


길수연은 침착하게 ‘빛무리’를 시전했다.

이어서, ‘채널링 힐’ 시전.

길수연에서부터 한상태까지, 빛의 도로가 깔렸다.


그 위를 내달리는 휘황찬란하게 하얀 빛 조각들.

빛 조각들은 한상태의 상처를 치유하고 공중으로 뛰어올라 길수연에게 부메랑처럼 날아돌아왔다.

그렇게 반달 모양의 빛 고리가 메인탱커와 메인힐러 사이에서 펼쳐졌다.


실로 장관이었다.

구경할 여유가 없는 게 아쉬울 뿐.

이준기는 자신에게 ‘가속’을 걸고 한상태 주변을 에워싼 오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치명타! 39!

- 오크 도끼병이 ‘둔화’에 걸렸습니다.

- 22!

- 오크 도끼병이 ‘둔화’에 걸렸습니다.


전국 최고의 화염 누커, 박충기 역시 손놀림이 빨라졌다.

눈앞에 보이는 오크들을 향해 하나씩 스파크를 날려 화염 낙인을 찍었다.

화염 낙인을 찍은 오크가 대여섯이 되자, 플레임 스트라이크를 시전했다.


화염 낙인이 찍힌 적들의 발밑에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불기둥이 치명타로 적중할 때마다, 적의 몸에서 화염 낙인이 사라졌다.

사라지는 화염 낙인은 불의 책 두권으로 바뀌어 박충기에게 날아들었다.

화염 낙인을 통해 불의 책을 리사이클링하는 희귀 스킬, 플레임 스트라이크.


2탱 메탈엔젤 성나린, 그리고 3탱 윤동직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탱킹을 분담했다.

한상태에게 몰려드는 오크들의 일부를 도발해서 떼어 놓았다.

그렇게 서브 탱커에게 도발 당한 오크들을 향해 김새로미, 문아린, 그리고 이준기와 같은 딜러들이 달려들었다.


한 번에 한 놈씩, 일점사.

그렇게 오크들의 숫자를 줄여갔다.


15인 공격대에 30마리의 오크가 덤벼든 상황.

도망가도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모두가 최선을 다했다.

장혁수조차 이마에 땀을 맺어가며 열심히 싸웠다.


***


남궁훤은 은신 상태로 최대한 빨리 달렸다.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의 위치가 파악된 이후에는 최단 거리로 몬스터를 정리했다.

그래서 1층에는 아직 여기저기 정리되지 않은 몬스터들이 있었다.

몸을 숨기고 움직이는 이유는 공격대보다 몬스터들 때문이다.


‘지금쯤 분명히 전멸했을 것이다. 박충기 한 녀석만 없앨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괜히 휘말려서 죽은 놈들에게는 미안하군.’


문제는 언제쯤 밖으로 나가느냐다.

레벨이 강등되고, 장착템 하나가 부서지는 건 아깝지만, 이상덕, 아니 신학길이 보상해 줄 것이다.

나가기 전에 숲에서 늑대라도 한 마리 잡아서 피를 여기저기 묻혀야 한다.

흙도 좀 바르고, 눈물도 좀 흘리고.


‘전멸하는 공격대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지만…’

울먹이면서 그렇게 말해야 한다.

그가 희귀 스킬, '소멸'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전멸하는 공대에서 혼자 살아남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최대한 버텼지만, 모두 죽고 나서 소멸했다고 말하면 그만이다.


‘상황을 좀 더 보고 올 걸 그랬나. 기자들에게 설명을 잘 하려면.'


남궁훤은 공격대가 전멸한 자리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운이 좋다면, 몬스터들의 시선을 끌지 않고, 죽은 공격대원이 떨군 아이템을 주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박충기의 마법 막대, ‘파이어 스타터’를 가지고 올 수 있다면, 그래서 그걸 던전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만 있다면, 박충기의 죽음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비싸게 팔아서 큰돈을 만질 수도 있다.


‘에픽급 아이템이니, 어딘가에 잠깐 묵혀놨다가 브로커를 통해 외국에 팔아먹는 게 좋겠다.’


남궁훤은 숲 덤불 사이에 몸을 숨긴 채로 공격대가 있던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후우.”

마지막 오크가 쓰러지자, 메탈엔젤 성나린이 흙바닥에 주저앉으며 크게 숨을 내뱉었다.


다행히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공격대 전원이 탈진 상태였다.

힐러들을 비롯해서 공격대 전원이 자원을 거의 완전히 소모했다.

책은 물론, 들고 있던 힐링 포션까지.

오늘, 더는 싸울 수 없다.


“어떻게, 된 거죠?”

“도저히 애드가 될 거리가 아니었는데요.”

“갑자기 저쪽 부대가 달려왔다고요.”


정말 그 장면은 이준기 혼자 본 것일까.

아니면, 그 누군가도 자신이 본 장면을 어떤 이유로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누군가를 모함하는 말로 비칠 수도 있는 것이어서, 이준기는 망설였다.

최저 레벨인 자신이 말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나, 남궁훤!”

“어?”

“남궁훤! 남궁훤 씨!”


남궁훤이 자리에 없다는 걸 알아채자, 사람들이 그를 찾기 시작했다.


“남궁훤이 애드를 시키고 도망갔습니다!”

장혁수였다.

“어둠 스킬 독화살 날려서 저쪽 오크 떼가 달려드는 거 보고, 소멸하는 거. 제가 봤다고요.”


남궁훤.png 남궁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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