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보다 더 오랜 시간 꾸물거리고 나온 드워프가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쉬지도 않고 말을 쏟아냈다.
이준기는 드워프 주인장의 얼굴을 보았다.
네놈이 죽는 걸 내가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봐 주마 하는 표정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이 불가능한 그런 얼굴.
분노, 증오, 사악, 그리고 기대감이 섞인 아주 고약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술 이름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하다.
조슈아의 야욕에 함께 저항하던 인도 펀자브 출신 구원자, 키라트 싱이 이 술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함께 식당에 갔다가 아마존 원주민 레시피로 만들었다는 묘한 음료를 마시며 한 얘기였다.
“우, 이거 예전에 ‘사육제’에서 마시던 그거 같네. 무슨 배스킨 라빈스도 아니고, ‘50가지 독’인가 뭔가 하는 이름이었는데, 보기에도 고약하고 냄새도 악랄했지만, 실제로 마셔보면 아주 훌륭한 맛이었지. 바로 옆에 힐러가 있어서 마실 생각을 한 거지만.”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 난 사육제 던전 할 때마다 술집 도전은 결국 쌈박질로 끝내곤 했는데.”
“넌 언제나 풀 파티를 이끌고 가는 탱커니까 그게 가능했겠지. 나는 그런 데서도 가끔 목숨을 걸어야 했다고.”
“그래서, 그 ‘술고래 도전’에 마실 만한 술이 있다고?”
“그래. 50가지 독인가 뭔가 하는 이름이고, 술집 주인이 직접 고안한 술이라나. 자기가 150 평생을 살면서 연구한 결과라고 했던 거 같아. 내가 그 ‘술고래 도전’을 아마 열 번은 넘게 해봤을 텐데, 딱 그거 하나만 맛있는 술이었어. 나머지는 독이 없더라도 맛이 더럽게 없었는데.”
“맛도 있고 독도 있고 하는 건 아니고?”
“그렇다니까. 잘 안 믿기는 얘기이긴 하지? 그런데 정말 맛도 있고, 뒤끝도 없고, 목숨도 위험하지 않았다고.”
키라트는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생각하니, 빨리 레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준기는 잔을 들어 ‘그레이의 50가지 독’을 입에 가져갔다.
코끝을 찌르는 냄새가 당장 코끼리라도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동료 키라트 싱을 믿었다.
눈을 감고, 이준기는 맥주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야말로, 주인장이 말한 대로 한 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잔을 비웠다.
“우아, 이것 정말 맛있군요!” 칭찬이 저절로 입에서 나왔다.
“그렇죠, 손님? 음핫핫! 역시 제가 만드는 술은 우주 최고예요!”
***
다섯 번째 천막은 피할 수 없는 단 한 번의 전투였다.
원래는 5대5의 전투다.
그러나 한꺼번에 싸우는 방식이 아니라, 한 명씩 나와서 승부를 벌이는 방식이다.
쓰러진 쪽은 선수를 교체하고, 이긴 쪽은 승자가 계속해서 싸우는 대전 액션 게임 스타일.
예전에도 ‘사육제’ 던전에서는 꼭 이 천막을 고르고는 했다.
선수 교체 단 한 번도 없이 5대0으로 매번 이겼다.
게다가 도전자 레벨에 맞추어 상대가 조정된다.
어떻게 보면, 회귀 이후 지금까지 겪었던 그 어떤 전투보다도 안전한 방식의 전투다.
언제나 더 높은 레벨과 싸워온 이준기였으니까.
첫 번째 상대는 코볼트였다.
엘리트 코볼트라고는 해도, 이준기는 이미 레벨 1일 때 잡았던 놈이다.
시작하자마자 거리를 좁히고 패시파이어로 단 두 번만 휘둘러 쓰러뜨렸다.
두 번째 상대는 고블린 폭파병.
이기려는 생각은 전혀 없고, 자폭 대미지를 노리는 동귀어진 몬스터.
거리를 유지하면서 패시파이어로 쉽게 잡았다.
세 번째 상대는 오크 보병.
역시 만만한 상대다.
주 무기인 숏소드의 리치가 짧아, 방패로 몸을 가리면서 최대한 접근하려고 하는데, 패시파이어에 맞고 둔화에 걸리니 접근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뻗었다.
세 번째 상대까지 쓰러뜨렸지만 대미지는 조금도 입지 않았다.
네 번째 상대는 오크 경비병.
회귀 후 첫 번째 던전, ‘오크 부두 술법사의 오두막’에서 잡았던 바로 그 녀석이다.
몸집도 크고 팔도 긴 데다 양손 도끼를 사용하는 적이라서 리치가 길다.
예전에 잡았을 때처럼 활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불리한 점.
그러나 지금은 그때보다 레벨이 대략 일곱 배 정도 높다.
한 대 맞을 각오로 거리를 좁혀 패시파이어로 타격한 후, 매직 미사일과 마나 폭발로 제압했다.
결국 왼쪽 어깨에 한 방 맞았다.
중급 힐링 포션을 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결승전에서 물약을 마시면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힐링 포션을 마시고 나서, 다섯 번째 상대를 불렀다.
다섯 번째 상대는 역시나, 오크 주술사.
‘살아 있는 폭탄’으로 쓸 오크 보병이 없다고 해서 절대로 약하지 않다.
오크 주술사는 앞선 싸움에서 쓰러진 오크 보병과 오크 경비병의 시체에서 차례로 해골을 소환했다.
오크 주술사를 상대한 경험이 차고 넘치는 이준기는 침착하게 해골부터 하나씩 상대했다.
오크 주술사는 시체에서 해골을 불러일으킨 뒤 약 5초 동안 채널링을 유지해야 한다.
그 이후에는 주술사와 해골, 둘을 상대해야 하지만, 처음 5초 동안은 사실상 해골만 상대하면 된다.
주술사가 해골을 일으켜 세우는 사이에, 이준기는 해골을 두들겨 팼다.
제대로 끝까지 일어서 보지도 못하고 오크 보병의 해골은 쓰러졌다.
두 번째 해골, 오크 경비병은 일어서기까지는 했다.
하지만 일어서서 겨우 한 번 칼을 휘두르고는 쓰러졌다.
두 번이나 해골을 일으키는 바람에 마나가 부족해진 주술사는 시체에서 마나를 흡수하려고 손을 뻗었다.
주술사가 가장 취약한 시점.
이준기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들어가서 패시파이어 강타에 이어 마나 폭발을 날렸다.
그리고 마나 폭발 한 번 더.
- 오크 주술사에게 ‘마나 폭발’로 40의 대미지를 입혔습니다.
- 오크 주술사가 죽었습니다.
이준기는 보상품을 챙기고 다음 천막을 향해 나갔다.
***
드디어 맨 마지막 텐트 앞에 섰다.
- 제물의 방.
- 반드시 여섯 번째로 방문하시오.
“보험 약관에 보면 깨알 같은 글씨로 쓰여 있는 주의 사항이 있잖아. 읽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그것과 마찬가지지. 룬 문자로 주의 사항을 써 놓고 주의 사항을 알렸다고 하는 꼴이니.”
예전에 동료들과 하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맨 마지막까지도, 룬 문자를 완전히 마스터한 것은 이준기와 헬렌 카자크 둘뿐이었다.
최초의 구원자 타이틀을 달고 있던 헬렌 카자크는 그렇다고 치고, 이준기의 노력에 동료들은 혀를 내둘렀다.
미겔 산체스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도대체 준기는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야? 헬렌보다 2년이나 늦게 각성해서, 룬 문자도 다 외우고, 레벨도 헬렌보다 높고.”
“2년 2개월이야, 미겔. 나보다 2년 2개월 늦게 각성했다고.” 헬렌이 대꾸했다.
“헬렌, 미겔.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말라고. 나는 노력해야 그나마 뭐라도 되는 스타일이라서 노력을 계속해야 해. 멈추는 순간, 거기서 끝이라고.”
“나도 그런 스타일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스타일이 바로 천재란 말야.”
“알았다, 알았어. 오늘 점심 내가 쏠게. 됐어?”
“음핫핫, 또 성공. 준기는 단순해서 좋아.”
경고 표지판 말고도, ‘사육제’ 주최 측이 배려한 것이 있다면 바로 문이다.
‘제물의 방’ 문은 다른 천막처럼 천으로 된 문이 아니고, 나무문이다.
천막 위에 덧대어진 나무판.
뭔가 맞지 않는 듯 보이지만, 그래서 의미는 더 확실하게 전달되지 않는가.
여긴, 위험하다는 그런 의미가.
나무판을 치우고, 다시 천막 입구의 드레이프를 치우고 이준기는 안으로 들어갔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임프가 허름한 낡은 탁자 위에 턱을 괴고 앉아 있다가 들어오는 이준기를 향해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여기 앉으세요!”
이준기는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딱 맞춰서 오시는 거 보면, 룬 문자 좀 읽으시나 봐요? 신기하네.”
“그렇게 됐습니다.”
“아직까지 룬 문자를 해독하는 인간은 못 봤다고 들었는데 말이죠. 시작할까요?”
“네.”
불타는 임프는 목을 가다듬고 최대한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악한 느낌으로 번뜩이는 눈과는 달리 공손한 말투였다.
“여기는 제물의 방이랍니다. 제물을 바치고, 대가를 얻는 그런 곳입니다. 뭐든지 제물로 바칠 수 있어요. 황금이나 아이템은 물론이고, 동료나 신체의 일부분도 제물로 바칠 수 있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