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39. 그레이비어드

by 히말

팔지 않겠다는 말에, 고블린은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했다.

“실례했소. 말실수를 했단 말이지. 요즘 이런 물건을 본 적이 없다 보니...”


"그래서, 살 겁니까?"

"좋아, 사겠소. 얼마요?"

“황금은 무한대로 있다고 하셨죠?” 이준기는 고블린이 아까 했던 말을 물고 늘어지기로 했다.

“아니, 그건 내 사정이고. 그거 얼마냐고.”


“무한대로 많은 황금의 일부만 떼어 주시오. 한 만분의 일 정도만.”

“아니,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황금이 무한대로 많은 건 내 사정이라고. 당신이 걱정할 게 아냐. 그 메모장, 얼마요?”


이준기는 생각을 바꿨다.

돈도 좋지만 시간이 더 부족한 건 이준기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큰 이익을 남기면 좋기는 하겠지만, 고블린 상인의 ‘못 들은 척하기’ 신공은 파훼가 불가능해 보였다.


“47만 골드만 주시오.”

“아이, 무슨 소리야. 5천 골드면 충분하지 않나?”

“나도 본전은 뽑아야지 않겠소.”

“그럼 6천 골드.”


“관둡시다. 이 천막에서 굳이 이걸 팔 필요가 없지.”

이준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고블린 상인도 일어났다.

“좋아, 좋아. 인간이 이겼어. 내가 딱 4만 골드를 주지. 더 이상은 한 푼도 못 줘.”


“좋소. 그렇게 하겠소.” 이준기는 어려운 결정이라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좋은 거래야, 인간. 이게 바로 피차 남는 장사라는 거지. 윈-윈 말야.”


이준기는 오두막 자판기에서 375골드에 산 메모장을 넘기고, ‘고블린 골드’로 4만 골드를 받았다.

자판기 골드로 환산하면 100분의 1, 즉 400골드 정도다.

아주 조금이기는 해도, 이익을 남겼다.


게다가 카니발의 두 번째 천막을 클리어하기도 했고.


***


세 번째 천막은 오렌지색과 연두색이 체크무늬로 들어간 천막이었다.

입구의 드레이프를 걷고 들어서자, 체스판 모양으로 격자가 쳐진 바닥이 펼쳐졌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건너가면 된다.


중간에 장애물이 있으므로 전진만 해서는 안 되고, 좌우로 움직이거나 후퇴하는 선택도 때로는 필요하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기면 보상 카드 더미에서 한 장을 뽑는다.

보상 카드는 전, 후, 좌, 우 이동이 대부분이지만, 돈이나 아이템, 또는 힐을 받는 카드도 있다.


카드 더미에서 세 장을 뽑아 ‘내용이 보이게’ 펼쳐 놓고 고르게 하는데, 문제는 내용이 룬 문자로 쓰여 있다는 점이다.

룬 문자를 모르는 경우라면, 실제로 카드를 한 번씩 사용해 보는 시행착오를 통해 알아낼 수밖에 없다.

가위바위보에서 지거나 장애물에 부딪히면 벌을 받아야 한다.


벌칙 카드 더미에서 뽑은 세 개의 카드 중에서 하나를 골라 벌칙을 정한다.

역시 룬 문자로 쓰여 있다.

가장 많은 벌칙 카드는 골드 내기, 인벤토리에서 물건 뺏기기, 그리고 ‘화살 맞기’다.


화살은 뭐든지 좋지 않지만, 독화살이나 불화살을 맞게 되면 아무래도 더 좋지 않다.

카드 세 장이 다 ‘화살 맞기’가 나오지 않는 한, 대미지를 입지 않고 클리어할 수 있다.


룬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이준기는 쉽게 게임을 풀어나갔다.

운 나쁘게 세 장의 벌칙 카드가 모두 ‘화살 맞기’로 나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돈이나 인벤토리의 던전 식량 팩으로 벌칙을 해결했다.


이기는 경우에는 ‘아이템’ 카드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동을 선택했다.

총 36차례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준기는 출구로 나올 수 있었다.

단 한 차례, 일반 화살을 맞아 1의 대미지를 입었고, 두 번 아이템 카드를 뽑아 중급 힐링 포션 1개와 상급 힐링 포션 1개를 받았다.

벌칙 카드를 대개 골드로 충당했기 때문에 골드는 좀 잃었지만, 손쉽게 세 번째 천막을 클리어했다.


같은 종류의 천막을 두 번 고르면, 곧바로 벌칙 전투에 돌입하게 된다.

이전에 들어온 네 개의 공격대를 전멸시킨 것은, ‘전투 천막’을 골라서 나온 정규 전투가 아니라, 아마도 벌칙 전투였을 것이다.

벌칙 전투는 말 그대로 벌칙 전투, 그래서 페널티가 심하다.


더구나 천막 안 어딘가에 숨어 있던 부대가 기습하는 형태로 시작한다. 즉, 선공을 뺏기고 시작하게 된다.

앞의 천막에서 전투를 거치지 않았다면, 갑작스러운 기습에 놀라기까지 할 테니 승산은 거의 없다.


이 던전에는 총 42개의 천막이 있지만, 겨우 여덟 가지의 종류에 불과하다.

그중 같은 종류를 두 번 방문하게 될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


***


네 번째 천막은 ‘술고래 도전’.

누군가에게는 쉬운 도전이겠지만, 알코올에 자신이 없는 이준기는 가급적 뒤로 미루어 두었다.


거적 문을 걷고 들어가니 후덥지근한 공기에 술 냄새가 가득하다.

입구를 지키던 드워프가 자리로 안내를 한다.


“도전자시군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이준기는 살짝 불쾌한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렸다.

총 여덟 종류의 천막 유형 중 세 가지가 무조건 싸움에 휘말리는 유형이다.

그중 두 가지는 혼자 들어와서 감당할 수준이 못 된다.


그래서 결국 남은 여섯 가지 유형을 전부 고를 수밖에 없는 상황.

순서를 고민했다.

그냥 무시하면 되는 ‘환영의 방’을 처음으로 하고, 필요한 아이템을 사가지고온 ‘고블린 상인’을 두 번째로, 가진 골드와 힐링 포션으로 대처가 가능한 ‘가위바위보’를 세 번째로 들어갔다.


나머지 세 개는 체력, 즉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이 있는 유형들이다.

마지막에 들어가는 텐트는 반드시 마지막에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섯 개를 클리어하고도 다시 한번 그 텐트를 또 거쳐야 한다.


그 텐트에 두 번 들어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최대한 불친절하고 아리송하게 쓰여 있는 표지 팻말도 그 유형의 텐트만은 이렇게 쓰여 있다.


- 반드시 여섯 번째로 방문하시오.


물론, 다른 팻말과 마찬가지로 룬 문자로 쓰여 있다.

룬 문자를 아는 사람에게만 친절한 셈이다.


드워프 주인장이 커다란 머그에 술을 가득 채워 가지고 왔다.

겉으로 봐서는 무슨 술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모습.


‘술고래 도전’에서는 총 석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도중에 화장실에 가도 되고, 물을 마셔도 되니 신체적 한계로 인해 실패하는 경우는 없다.

문제는 술의 종류인데, 무척, 정말 무척 많은 종류의 술이 대기하고 있다.


드워프 주인장이 가져온 술을 그냥 마셔도 되고, 거절해도 되지만, 거절은 최대 세 번까지만 가능하다.

그러니까 거부권을 초반에 다 써버리면, 나중에 드워프가 한눈에 봐도 독주가 분명한 것들을 연이어 가져와도 거절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도 다른 모든 천막과 마찬가지로 피로 해결할 수 있다.

드워프 주인장과 술집 기도들을 전부 때려잡으면 된다.

혼자서 해본 적이 딱 한 번 있기는 하지만 쉽지는 않다.

그래서 힐링 포션을 여러 개 사 가지고 온 것이다.


첫 번째 술부터 독을 섞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이준기는 술잔을 들이켰다.

생맥주 통에 육상선수가 신던 양말 열다섯 켤레 정도를 넣은 듯한 맛이 났다.


“아주 잘 드시는군요. 두 번째 술, 대령합니다요.”


드워프 주인장이 웃자, 회색 콧수염이 입꼬리를 따라 올라갔다.

아주 착해빠진 웃음 같아 보이지만, 이 천막에서 나오는 술의 70%가 독주다.

웃음 따위에 속으면 안 된다.


술을 마시고 시간이 좀 지났지만, 몸에 이상이 오지는 않았다.

이준기는 두 번째 술도 그냥 들이켰다.

녹색 거품이 나는 이상한 맥주였지만, 단지 맛이 없을 뿐,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자, 세 번째 술입니다요. 우리 집 전통, 우리 집 자랑이죠.”

그렇게 말하는 드워프의 너털웃음이 한층 더 포악해 보였다.


이건 뭐, 딱 봐도 맥주잔에 독을 스트레이트로 부은 것이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물질이었다.

붉은색 액체가 정체불명의 메커니즘으로 기포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건 패스하겠습니다. 다른 걸 주세요.”

이준기가 그렇게 말하자, 드워프 주인장의 얼굴에 노여움이 가득 떠올랐다.


‘무서워서 오줌 지리겠군. 예전에도 이런 표정을 지었었지.’


그래도 명백히 독임에 분명한 액체를 들이켤 수는 없다.

드워프는 노기를 가득 띤 눈으로 이준기를 쳐다보며 바꿔온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이건 어떻습니까? 열두 가지 뱀을 섞었습죠. 하하핫.”


이준기는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오늘 준비해 온 열 개의 중급 힐링 포션이 아직 그대로 있다.

그러나 과연 이걸 견뎌낼 수 있을까?


‘술집 도전은 싸움으로 끝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래서 사실 최대한 뒤쪽에 넣은 건데.’


이준기는 아주 조금만 맛을 보기로 했다.

다채로운 색깔로 부글거리던 그 액체가 닿자마자, 입술이 마치 데기라도 한 것처럼 쓰려왔다.

이준기는 입에 댔던 맥주잔을 곧바로 테이블 바닥에 내려놓았다.


술이 쏟아질 뻔했다. 아니, 조금 쏟아졌다.

술이 쏟아진 자리의 나무 테이블이 치익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이준기는 인벤토리에서 중급 힐링 포션을 꺼내 들이켰다.


“이것도 치울깝쇼?”

그렇게 말하는 드워프 주인장의 얼굴은 한층 더 노여움에 불타올랐다.

“네, 네. 부탁합니다.”


술을 바꾸러 들어간 드워프는 부엌에서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나왔다.

그사이에 힐링 포션의 효과로 입술의 화상은 아물었다.

아직도 조금 찌릿찌릿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핫핫핫. 이건 정말 단숨에 냉큼 한달음에 훌쩍 쉬지도 않고 주욱 들이키시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제가 150 한평생을 연구해서 완성해 낸 역작이죠. 이름하여, ‘그레이의 50가지 독’입니다. 제 이름이 그레이비어드라서. 카카캇.”


Greybeard.png


***계속***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38. 사육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