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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38. 사육제

by 히말

사육제 펜스 안으로 들어오자, 문이 닫혔다.

이래서야 퇴각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상황.

그것이 현재까지 네 팀의 공격대가 모두 전멸한 이유.

이래 놓고, ‘퇴각 페널티 없음’이라니 신뢰 보호 위반이다.


‘일단, 어떤 천막이 있는지 전부 둘러본다.’


사육제는 총 6개의 스테이지로 구성된다.

이 던전의 클리어 조건, ‘사육제의 여섯 단계 통과’란 여섯 개의 천막을 클리어하라는 것.

어떤 여섯 개를 어떤 순서로 진행하든 상관없다.

그래서 ‘사육제 포맷’은 다른 비정형 포맷 던전과 마찬가지로 초심자에게는 대단히 어려울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아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쉽다는 것이지.”


천막 표지를 그림처럼 전부 외우는 방법도 있겠지만, ‘룬 문자’는 다른 곳에도 쓸 데가 많다.

그래서 고레벨 구원자들은 룬 문자를 배우기 위해 시간을 투자했다.

룬 문자를 자꾸 만나게 되는, 40레벨 이상 시점에서.

아직은 헬렌 카자크도, 조슈아 테일러도 40레벨에 이르지 못했다.


그들에게도 룬 문자는 이런 던전에서 한두 번 구경해 본 것이 전부다.

모든 천막을 둘러보는 데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천막의 개수는 무려 42개였다.


이 중에 여섯 개를 선택하면 된다.

천막의 난이도는 천막의 크기나 색깔, 장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직 팻말에 적힌 글자와 관련이 있을 뿐.


이준기는 푸른색과 흰색의 스트라이프 무늬로 된 거대한 천막을 첫 번째 타깃으로 정했다.

붉은색 드레이프를 걷고, 이준기는 안으로 들어섰다.

너무 어두워 눈이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어둠에 압도되어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준기에게, 매우 건방진 톤의 고블린 목소리가 외쳤다.


“이건 또 웬 미친놈이냐.”


***


어둠에 눈이 적응하는 데에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밖에서 눈을 좀 감고 있다가 들어올 걸 그랬다.

하지만 위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잘 안 보이는 쪽이 나을지도.


42개의 천막 중에 엄선한 첫 번째 천막.

조금도 위험하지 않다.


휘유우우!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

이준기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어둠에 적응하려면, 눈을 뜨고는 있어야 한다.

아직 야맹인 상태가 낫다.

어둠에 적응해서 잘 보이는 상태라면, 지금 눈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이 꽤나 무섭게 느껴질 것이니까.


퍽!


눈에 보이면 꽤 무서울 상황이었지만, 이준기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푸하하!”


시각, 그리고 청각 효과는 화려하지만, 그 외의 요소가 부족한 가상 현실.

꽤나 요란하게 ‘퍽’ 소리를 냈지만, 날아온 물체는 이준기의 눈 바로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곧바로, 다음 차례가 펼쳐졌다.

오크 주술사가 이끄는 오크 보병 한 부대.

총 일곱 마리의 오크다.

17레벨 이준기가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


그러나 이준기는 편안했다.

이제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오크들의 흉악한 얼굴이 보였다.

시작부터 북을 두드리는 오크 주술사.

오크 보병들이 일제히 광란 상태에 빠져 눈을 벌겋게 하고 덤벼들었다.


무기도 다양하다.

도끼, 박도, 철퇴는 물론 쌍절곤도 있다.


'닌자 거북이냐.'


이준기 한 명을 상대로 달려드는 여섯 마리의 오크 보병, 그리고 그 뒤에서 북을 치며 계속해서 뭐라고 외치는 주술사.


“푸핫!”


이준기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동안 못 보던 것을 다시 보니, 마치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는 것 같았다.


‘이거, 시작은 좀 쉽게 하려고 이걸 골랐지만, 이건 생각보다 너무 웃기는데.’


계속해서 웃고 즐길 수도 있겠지만,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다.

이준기는 이 환영을 만드는 놈을 찾아 어둠 속을 뒤지기로 했다.


이준기가 어두운 천막 안을 여기저기 배회하는 동안, 일곱 마리의 오크는 사나운 소리를 내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무기를 휘두르며 따라다녔다.

누가 보면 남사당패 행진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건 뭐, 무기 휘두를 때 바람 효과라도 넣던가. 요즘 4D 극장 수준만도 못하네.’


체스판 무늬로 된 바닥의 한쪽에서 드디어 검은 상자를 찾았다.

이준기는 발을 들어 야트막한 검은 상자를 발로 콱 밟았다.

햄스터 한 마리가 상자에서 튀어나와 멀리 도망갔다.


영상이 꺼졌다.

이준기를 뒤따르던 오크 부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햄스터가 열심히 돌리던 쳇바퀴가 멈춘 모양이다.


이준기는 허공에 대고 외쳤다.

“이봐, 설마 드래곤까지 할 건 아니지? 식상하잖아.”


그 말에 답하기라도 하듯이, 쿠르릉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이어 통나무에 금가는 소리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붕 무너지는 연출이다.


“하아.”


이준기는 양반다리를 하고 바닥에 앉았다.

처음의 화살과 마찬가지로, 지붕이 내려앉는 연출이야 한 번으로 끝날 테니까.

지붕이 주저앉는 화려한 시각 효과가 ‘우지끈, 쾅’하는 우렁찬 청각 효과와 함께 연출되었다.


“나, 시간 없다고!”


멀쩡한 천막 지붕을 향해, 이준기가 외쳤다.

그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지붕에서 쪽지 하나가 떨어졌다.

희미한 촛불이 붙어 있는 한쪽 기둥으로 다가가서, 이준기는 쪽지를 폈다.


룬 문자였다.

시키는 대로, 이준기는 쪽지를 촛불 위에 가져다 댔다.

촛불이 쪽지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천막이 사라졌다.

상태창에 메시지가 떴다.


- 사육제 첫 번째 천막 클리어.


carnival tent.png


***


시간을 좀 보낸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자원 소모 없이 첫 번째 천막을 클리어했다.

곧바로 다음 천막을 향해 걸어갔다.

여섯 개의 천막을 고른 것은 물론, 순서까지 이미 정해 놓았다.


암녹색 단색 천막의 거적때기 문을 열고 이준기는 들어갔다.

어울리지 않게 큰 책상에 앉아 뭔가를 쓰던 고블린이 고개를 들어 이준기를 보더니, 말했다.


“이봐, 인간. 밖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보고 들어온 거야? 물론, 아니겠지만 말이지.”

“보고 들어온 건데.”

“뭐?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어! 네가 우리 글자를 안다고?”

“그게 당신들 글자는 아니잖소, 고블린 양반?”

“허! 이거 별종이군. 강적이야.”


고블린이 책상 위에 놓인 상자를 누르자, 고깔 모양의 전화기가 튀어나왔다.

고블린이 거기에 대고 말했다.


“잘 말린 송충이 차, 두 잔!”


어차피 마시지 않을 거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하던 이준기가 갑자기 외쳤다.

“잠깐만!”


전화를 끊으려던 고블린이 수화기를 든 채 물었다.

“뭐야?”

“물 한 잔도 좀 같이 부탁합시다.”

“아, 그래? 물이란 말이지?”


주문을 다시 확인하고, 고블린은 수화기에 대고 외쳤다.

“물도 두 잔 가져와. 이왕이면 기저귀 빤 물 말고 행주 정도 빤 물로.”


‘이런.’

이준기는 당황했다. 물도 그런 걸 마실 줄은 몰랐다.

고블린 상인을 상대해 본 것은 여러 번이지만, 물을 가져다 달라고 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평온을 가장하려 했지만, 식은땀을 흘리는 이준기.


고블린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물었다.

“왜 그래? 더워? 선풍기라도 가져다줄까?”

“아, 아뇨. 괜찮소.”


고블린 상인의 선풍기라면, 털이 풍성한 거대한 꼬리를 가진 곰 크기의 생물이다.

크기는 곰 만하지만, 생긴 것은 영락없이 다람쥐다.

그 동물이 와서 옆에서 꼬리를 살랑거려 주는 것이 고블린 상인의 선풍기다.

생각만 해도 재채기가 나올 것 같다.


“그래서, 밖에 뭐라고 쓰여있는지 한번 말해 보시지, 인간 양반.”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거죠? 고블린답군요.”

“난 말야, 황금도 보석도 석유도 무한대로 있는데 시간만 그렇질 못해. 알겠나, 인간?”


“좋아요. 훌륭합니다. 밖에 뭐라고 쓰여 있었냐 하면, 이렇게 쓰여있었죠.”

“그래, 뭐라고?”

“무조건 삽니다. 문구류.”


그게 아니었다면 이 천막은 들어오지 않았다.


42개의 천막 중에 ‘무조건 삽니다’는 모두 3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목숨’, 또 하나는 ‘생명력’을 산다고 쓰여 있었다.


‘문구류’나 ‘날붙이’나 ‘요리도구’를 산다면 각각 메모장, 숏소드, 소형 방패를 넘겨줘서 평화로운 방법으로 클리어가 가능한 천막이다.

하지만 ‘목숨’이나 ‘생명력’은 피를 봐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피를 보는 과제의 해결은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물론, 최악의 시나리오는 바깥에 뭐라고 쓰여있는지도 모르고 천막 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지금은 점잖게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고블린 상인이지만, 수틀리면 자기 군대를 동원하는 녀석이니까.

고블린이 한두 마리가 아니고 수십, 아니 수백 마리다.

레벨 40 정도 된다면 모를까,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그런 군대를 가진 고블린 상인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식한 놈’이다.

심지어 장사에서 손해를 보는 것보다도 무식한 놈이 싫다고 한다.

이준기가 과거에 직접 들은 얘기다.


“그래서, 인간 같은 무식한 종자가 문구류를 가지고 왔다고?”

“그렇소. 보여드리겠소.”

“그러시오. 그보다 우선 차 좀 드시오. 최고급 말린 송충이 차란 말요. 내가 이걸 아무한테나 내놓는 게 아닌데.”

“하, 하하, 네. 천천히 마시려고 합니다.”

“아차, 아까 목마르다고, 물 달라고 하셨지? 행주 빤 물이 아니라서 맛이 그렇게 좋지는 않겠지만, 걸레 빤 물이니 마실 만할 거요. 적어도 기저귀 빤 물보다는 낫지. 그렇고말고.”


이준기는 인벤토리에서 ‘메모장’을 꺼냈다.


고블린이 그걸 보고 한마디 했다.

"급식충들이 영단어 외울 때 쓰는 종류잖아. 싸구려야, 싸구려."


값을 후려치려는 속셈인가 하고 생각하며, 이준기가 대꾸했다.

"마음에 안 드신다면 거래는 없던 걸로 하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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