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 시.
수서역 근처에서 택시가 서고, 이준기가 내렸다.
“더 이상은 못 갑니다. 동부간선도로도 광평교 근처는 전부 통제된 상태라서요. 이 근처 학교들도 전부 휴교 들어간 지 오래고…”
“세종고등학교도 마찬가지겠죠?”
“암요. 세종고, 수서중은 물론이고, 다리 건너편 가원초등학교까지 다 휴교예요.”
2023년 9월 15일.
원래 역사라면 이틀 뒤에 소위 ‘세종고 사건’이 일어난다.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위치한 세종고는 일본 규슈고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규슈고는 매년 서울로 수학여행을 오는데, 당연히 자매고인 세종고에 들른다.
차원문이 일상이 된 세상.
자매결연 학교 바로 옆에 차원문이 생겼지만 그렇다고 수학여행을 포기할 수는 없다.
광화문 근처에 숙소를 잡고 최대한 안전하게 수학여행을 진행하려는 학교 측.
그러나 학생들이 어디 그런가.
원래부터 SNS 친구였던 규슈고와 세종고 학생들 몇 명은 담력 테스트를 하겠다고 밤에 학교로 진입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학교 전설에 나오는 귀신이 아니라, 근처 차원문에서 빠져나온 고블린을 상대로 담력 테스트를 하게 된다.
물론 전원 사망.
차원문 안쪽에서는 잡몹이지만, 차원문 바깥이라면 고블린은 조폭 따위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한 존재다.
이것이 9월 19일 새벽 시간에 발생한 소위 ‘세종고 사건’이다.
일본 구원자협회는 이에 대해 아주 강경한 내용의 성명을 발표한다.
한국 길드협회의 안이한 대응으로 일본인 학생들이 죽었다,
한국 길드협회의 차원문 대응 능력이 충분한지 의심스럽다,
따라서 일본인 구원자들과 한국인 구원자들이 연합 공격대를 꾸려, 해당 차원문을 닫아야 한다는 요구를 해 온 것이다.
밴쿠버-시애틀 동맹이라든가, 싱가포르-말레이시아 연합 등 다국적 길드 내지는 협력체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상대방을 협박하여 꾸려진 협력체는 유례가 없었다.
마치 갑신정변 이후 자기들 공사관을 지키겠다고 군대를 보낸 것과 같은 상황.
그 이후의 전개를 보면, 그들은 그동 바로 이런 구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이준기는 광평교 쪽으로 걸어갔다.
임시 폐쇄된 수서동 우체국을 중심으로, 전경 200여 명이 광평교 남단으로의 접근을 완전히 봉쇄하고 있었다.
보통 ‘구원자 패스’라고 불리는 한길협 회원증을 보여주자, 전경 소대장은 포위를 풀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구원자님!”
광평교 남단에 탱크 한 대가 보였다. 멀리 북쪽에도 한 대 더.
포신을 차원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차원문이 광평교 남쪽 거의 끝에 있는 관계로, 남쪽의 군인 배치가 더 빡빡해 보였다.
차원문 근처로 접근하자, 대위 계급장을 단 군인 한 명이 앞을 막아섰다.
새벽 시간이라서 그런지, 현장 책임자인 중령은 자리에 없었다.
“어디 가십니까?”
“구원잡니다. 던전 탐색차 나왔습니다.”
“호, 혼자서요?”
“네. 말씀드렸다시피, 던전을 깨려고 온 것이 아니고, 탐색하러 온 거라서요.”
“탐색이라면, 밖에서만 보시는 거죠?”
“그게 무슨 탐색입니까. 들어가 봐야죠.”
“구원자님. 이 차원문으로 지금까지 스무 명의 구원자가 들어갔습니다. 한 명도 나오지 못했고요.”
“물론 그건 알고 왔습니다. 퇴각하면 되니까, 걱정 마세요.”
“그, 그래도.”
이준기는 상태창을 열어 차원문 정보를 확인했다.
- 차원문 고유 번호 08162. 랭크 C. ‘사육제’
- 차원문 소멸 조건: 사육제의 여섯 관문 통과.
- 차원문 소멸 보상: 에픽 아이템 1개 이상.
- 퇴각 페널티: 없음.
예상대로다.
퇴각 페널티가 없는데, 한 명도 살아나오지 못했다는 것은, 퇴각을 할 수 없다는 얘기.
저렇게 불친절한 설명을 달아놓으니, 안이한 마음으로 들어갔다가 예상치 못한 결말을 맞은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C급 던전이다.
퇴각 페널티가 없다는 조건은,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게임에서 보던 몬스터들이 나오니까, 게임처럼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된다고 생각한 건가.
‘사육제’ 던전 역시 이준기에게는 익숙한 포맷이다.
일단 행사장으로 진입하고 나면 출구가 없다.
퇴각 출구인 오두막은 그대로 있지만, 행사장에서 오두막으로 나가는 길이 봉쇄되므로 의미가 없다.
들어간 사람들은 사육제를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탑픽 길드 회원도 아니신 것 같은데, 그냥 들어가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차원문 정보를 확인하는 이준기를 향해, 군인이 엄근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제가 그냥 밀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아시죠?” 이준기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 넷?” 군인이 당황했다.
“근처에 초중고교가 네 개나 있는데, 그걸 두 달씩이나 방치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제가 정리하고 나오면, 대위님 공이 컸다고 얘기하겠습니다. 최상혁 대위님.”
이준기는 군복의 이름을 읽으며 말했다.
“그, 그래도, 제가 책임자가 아니라서요. 중령님 오셔야.”
“감사합니다. 최상혁 대위님!”
이준기는 다른 사람들 들으라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최상혁 대위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틈을 타서, 유유하게 차원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
던전 안.
역시 언제나와 같은 입구 오두막.
일단 자판기 쇼핑을 좀 해야 한다.
랜덤으로 채워지는 다양한 물건들이 있지만, 그런 것에 혹해서 힐링 포션 살 골드를 남기지 못하면 큰일이다.
중급 힐링 포션 열 개.
‘사육제’ 포맷이라면 쓰고 남을 양이다.
그러나 도중에 돌아올 수 없으므로, 충분히 사둬야 한다.
앞의 던전들과 마찬가지로, 이 던전 역시 이준기는 같은 포맷의 던전 경험이 있을 뿐이다.
바로 이 던전을 들어와 본 것은 아니다.
그러니 넘치게 대비하는 쪽이 안전하다.
현재까지 이곳에 진입했던 공격대는 모두 네 팀.
첫 두 팀은 ‘탑픽’ 길드 구원자로만 구성했지만, 이후의 두 팀은 외부 지원이 있었다.
‘스무 명이 전부 ‘탑픽’이었다면 탑픽 길드 자체가 소멸했겠지.’
어제 확인했던 최정윤 대리 자료에 따르면, 네 번 모두 탱딜힐 일반적인 구성이었고, 평균 레벨은 20 내지 22 정도.
전투가 주가 되는 일반적인 던전이었다면 네 번이나 시도해서 모두 전멸했을 리가 없다.
‘사육제’ 포맷에는 단순한 화력 이상의 요소가 필요하다.
그래서 혼자 클리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온 것이다.
중급 힐링 포션 열 개를 사고도 아직 492골드가 남았다.
이준기는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자판기의 랜덤 아이템 메뉴를 클릭했다.
C급 던전 자판기에는 랜덤으로 채워지는 아이템 슬롯이 아홉 개 있다.
이준기는 아이템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장갑, 부츠, 단검… 장갑이 아직 보급품 신세이니, 장갑을 살까? 200골드 수준이면 비싸긴 하네. 레어 등급 주제에.’
- 토끼 사냥꾼의 장갑.
- 205골드.
- 장갑. 레어 등급.
- 물리 저항 20.
- 착용 효과: 공격 속도가 1% 증가합니다.
- 발동 효과: 치명타를 적중시킬 때마다 공격 속도가 추가로 1% 더 증가합니다. 전투 종료 시점까지 지속됩니다.
나쁜 옵션은 아니다.
치명타를 터뜨리면 무조건 공격 속도가 추가되는 것은 매우 좋다.
문제는 그 보너스가 전투 종료 시까지만 유지된다는 점이다.
그라인딩이라도 한다면 모를까, 너무 미미한 보너스.
더구나 비전투형 퍼즐이 많은 사육제라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물건을 살펴보자. 목걸이, 반지… 어, 그런데 이건?’
- 단어장.
- 375 골드.
- 목걸이. 레어 등급.
- 발동 효과: 미리 정해놓은 조건이 만족될 경우, 미리 세팅해 놓은 주문이 즉시 시전됩니다. 해당 주문에 사용된 책들은 5초 후에 재생됩니다.
대단히 좋은 아이템이다.
1회용 아이템에 375골드를 소비하는 게 즐겁지는 않지만, 그걸로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싼 것이다.
비슷한 기능을 하는 전설템이 있지만, 아마 A급 던전에나 가야 나올 것이다.
A급 던전은 내년 초, 전 세계적으로 구원자들의 레벨이 급격하게 높아질 때, 세상에 출현한다.
서로를 죽이면서 레벨이 높아진 구원자들에게 내리는 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메모장’을 사용할 정도로 강력한 스킬은 아직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이준기는 남은 돈을 탈탈 털어 ‘메모장’을 샀다.
‘사육제’의 이벤트 중에 ‘메모장’이 매우 유용한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보급품 선반에서 소형 방패와 철제 숏소드도 꺼내 담았다.
그리고 오두막을 나왔다.
드넓은 평야.
사람의 키보다 별로 크지 않은 나무가 듬성듬성 있지만, 대개는 그냥 풀만 조금씩 나 있는 황무지 느낌의 평야다.
해가 뜬 지 얼마 안 된 아침 광경은 산뜻했다.
하지만 공기는 신선하지 않았다.
술 냄새와 토사물 냄새가 풍겨왔다.
바로 눈앞에서부터 거대한 천막이 여러 개 줄지어 있었다.
모든 천막 앞에는 글씨가 쓰인 팻말 표지가 있었다.
서하 문자와 태국 문자를 섞어 놓은 것 같은 기괴한 모양의 글자들.
이 글자를 읽을 줄 아는 것은 2023년 가을 현재, 전 세계에 이준기 하나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