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직, 그리고 소현배가 거의 동시에 현장에 나타났다.
이유는 다르지만, 장혁수를 찾아 헤매던 그들이다.
그러나 타깃은 이미 시체가 되어 있다.
“이,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놀란 표정으로 윤동직이 물었다.
“저를 쫓아왔습니다.”
이준기가 대답했다.
“장혁수가? 이 ㅅㅋ, 말도 없이 사라지더니 널 죽이려고 쫓아온 거군.”
“정당방위라고 말하고 싶지만, 저에게도 살의가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구원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라면, 정부는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협회에 백지위임을 한 상황.
구원자에 대해 공권력 집행이라도 하려다가는, 경찰 여러 명이 다칠 거라는 사실, 정부도 잘 알고 있었다.
구원자끼리의 살인이라면, 굳이 정부에서 나서서 정의를 구현하려고 할 이유가 없다.
구원자들 사이의 문제가 경계 바깥으로 확장되지만 않으면 그만이다.
비현실적인 그들의 문제를 현실로 가져올 이유가 없다.
협회 차원에서 사건을 정리하기 위한 재판, 아니 회의가 열렸다.
윤동직은 물론 피해자인 장혁수와 같은 길드인 소현배도 이준기를 옹호했다.
성나린의 죽음이 장혁수 탓이라는 생각에는 공격대 전원의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이상덕 협회장도 사건을 확대시킬 이유가 없었다.
협회장 파벌에서 한 명, 남궁훤이 죽었지만, 반협회장 파벌에서는 장혁수, 권영호 등 두 명이 죽었다.
특히 전체 랭킹 2위의 실력자인 권영호가 죽어서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인 이상덕.
문제를 크게 키울 이유가 없었다.
물론, 원한을 가진 자도 있었다.
서라벌 그룹 장오현 회장은 아들의 죽음에 대해 복수해 달라고, 길드 문경새재에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재계 서열 10위권인 서라벌 그룹도 구원자를 상대로 사적인 복수를 밀어붙이기에는 힘이 모자랐다.
언론은 신났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넘쳐났다.
- 한국 사상 최악의 던전, ‘해운대’ 드디어 소멸. 최고 레벨로 구성된 공격대 15명 중 4명 사망.
- 백제그룹 장오현 회장, 아들 사망에 의연한 모습. “정의를 위해 싸운 아들이 자랑스러워.”
- 구원자 장혁수의 죽음에 관한 소문, 사실인가? 몬스터가 아니라 구원자가 죽였다!
- 한국 길드협회 내분 표면화. 남궁훤, 장혁수의 죽음은 구원자들간 갈등 때문이라는 소문.
팬덤 사이에는 메탈엔젤 성나린의 죽음이 화제의 중심이었다.
- 메탈엔젤 성나린 사망. 팬들, 큰 충격에 빠져.
- 여전사 성나린 추모 촛불 문화제. 광화문에 5천여 명 운집.
- 해외 팬들도 추모 집회. 뉴욕, 런던, 도쿄 등 10여 도시에서 추모 행사 열려.
이준기 개인으로서는, 최초의 구원자 처단이라는 의미가 컸다.
- ‘구원자 첫 킬’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모든 능력치가 5 증가합니다.
언젠가는 달성하게 될, 사악한 업적.
그러나 지난번에 비해 훨씬 일찍, 훨씬 낮은 레벨에 달성했다.
구원자를 살해하고 얻는 업적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
조슈아 테일러가 넘사벽의 레벨을 달성하게 된 데에는, 구원자 학살이 큰 기여를 했다는 점.
나중에는 널리 알려지게 되지만, 아직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
그걸 이준기는 기억하고 있다.
‘물론, 조슈아에게는 다른 비결도 있지만.’
장혁수 살해로 얻은 경험치는 얼마 남지 않은 경험치 바를 밀어 올렸다.
‘해운대’에서 이준기는 17레벨까지 올라갔다.
전문화는 여전히 바람과 마나, 스탯은 민첩성 올인이다.
마력 저항 보너스 수치가 +15에서 +10으로 낮아졌다.
탱커 한상태에게 대여해 주었던 ‘마력 저항의 펜던트’가 소멸해 버렸기 때문.
하지만 ‘해운대’ 던전을 통해 이준기는 골드를 많이 벌었다.
소방용 부츠 판매 대금, ‘마력 저항의 펜던트’ 대여료, 그리고 경매 수익금을 배분받은 것까지, 약 500골드를 벌었다.
현재 골드 시세로 계산하면 한화로 약 5억 원.
하지만 그걸 한화로 바꿀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힐링 포션, 식량, 그리고 아이템을 사는 데 쏟아부을 것이니까.
이번 던전에서 가장 큰 전리품이라면 역시, 장혁수를 처치하고 얻은 숏소드, ‘오캄’.
원래 남궁훤의 물건이고, 장혁수가 아버지 백을 동원해서 길드에서 빼앗다시피 한 물건이다.
문경새재 길드로서는 반환을 요청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장혁수가 이준기를 죽이려고 한 증거는 차고 넘친다.
그래서 문경새재 길드는 이준기가 ‘오캄’을 접수하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준기는 이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장혁수의 나머지 유품을 문경새재 길드에 넘겼다.
에픽 등급 숏소드, ‘오캄’ 하나만으로 보상은 충분하다.
- 오캄.
- 숏소드. 에픽 등급.
- 대미지 등급 D-. 공격 속도 2.5초.
- 발동 효과: 자신에게 가해진 ‘설명이 복잡한’ 스킬을 무효화합니다.
이 물건의 주인이었던 남궁훤, 장혁수는 발동 효과에 대해 잘 몰랐겠지만, 이준기는 다르다.
한참 동안이나 쓰던 물건이다.
어떤 스킬이 무효화 되는지, 당장 목록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잘 안다.
‘딜러에게도 최상급 무기지만, 탱커에게 더 좋은 무기다. 이걸 맡겨도 좋을 만한 동료가 있을까?’
이준기는 조슈아의 결계 안에서 함께했던 마지막 공격대 멤버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헬렌 카자크, 미겔 산체스, 키라트 싱, 린핑 루, 그리고 길수연.
탱커는 이준기 자신뿐이었다.
최종 목표는 드래곤도 레비아땅도 아니다.
조슈아 테일러다.
탱커는 필요 없다.
'일단 그게 결론이다. 적어도 지금은.'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9월 14일에 해운대 던전을 클리어했고, 오후 늦은 시간임에도 간단한 기자회견을 했다.
보도자료를 포함한 정식 기자회견은 다음 날 오전에 했다.
성나린, 권영호와 마찬가지로 장혁수와 남궁훤도 몬스터에게 죽은 것으로 발표했다.
공격대원 대부분은 오후에 KTX 편을 통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틀 뒤 아침에는 길드에서 장시간 회의를 했다.
게으르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특징인 구원자들이지만, 아침 9시 회의에 지각하는 사람도 없이 전원 참석했다.
길드 마스터가 죽었으니 위기의식을 가질 만했다.
이도협 부길마가 당분간 길마 대행 역할을 하겠지만, 서둘러 정식 선거를 통해 차기 길드 마스터를 뽑아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형식적이지만, 이도협은 윤동직과 이준기에게 의견을 물었다.
차기 길마를 뽑는 정식 선거까지, 임시 길마를 자신이 맡아도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윤동직도, 이준기도 그건 당연하지 않으냐고 대답했다.
약간의 수군거림이 뒤따랐다.
이도협이 막판에 던전 입장을 거부하는 바람에 권영호가 들어갔다 죽은 것이니까.
권영호의 죽음에 대해 이도협에게 도의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길드 규정도 그렇지 않나요?”
이준기의 말에, 웅성거림이 사라졌다.
이제 17레벨의 중견 구원자다.
저렙인데도 대활약을 했다는, 윤동직의 믿기 어려운 증언도 있었다.
다음 날 오후를 이준기는 푹 쉬었다.
길드 숙소인 오피스텔 헬스장에서 운동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했다.
연쇄살인마를 처단한 셈이지만, 장혁수를 죽인 것은 엄연한 살인.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길마가 사라진 길드는 뒤숭숭한 분위기이고, 다음 일정은 어차피 정해져 있다.
최정윤 대리와 저녁 식사 약속을 잡았다.
나오는 김에 이런저런 자료를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
“이준기 구원자님, 부탁하신 자료입니다.”
“고맙습니다. 한번 살펴보면서, 궁금한 건 질문드리겠습니다. 괜찮죠?”
“그럼요. 빠진 게 있으면 지금이라도 다시 조사해서 가져다드릴게요.”
“그 정도까지 하실 건 없고요. 우선 주문부터 할까요?”
내일 아침은 먹지 않을 것이므로, 이준기는 엄청 두꺼운 스테이크를 시켰다.
힘쓸 일도 많을 것이다.
던전 안에서는 탄수화물이 많이 당기므로, 필라프, 마늘빵, 그리고 디저트로 단 음식을 많이 주문했다.
이 정도는 근육에 글리코겐으로 저장해 놓고 24시간 내에 마구 당겨쓰면 그만이다.
“우아, 이준기 구원자님, 단 거 좋아하시나 봐요? 좀 의왼데요.”
“뭐가 의욉니까. 저 단 음식 엄청 좋아하는데요. 없어서 못 먹죠.”
던전에 들어가면 커피도 못 마시니까, 커피도 시키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계획이 틀어진다.
오늘 일찍 자고, 내일은 새벽 일찍 움직일 계획.
차원문 고유 번호 08162. 속칭 ‘세종고’.
광평교 남쪽 끝에 두 달째 열려 있는 차원문이다.
C급 던전인데, 인원 제한이 빡세다.
겨우 다섯 명.
지금까지 진입했던 공격대 네 팀이 전부 전멸했다.
“그래서,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게 현재 상황이죠?”
“네.”
“관할 길드는… ‘탑픽’이군요. 이번에 성나린 탱커가 죽어서 당분간은 들어갈 엄두도 못 내겠군요.”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차원문에 갑자기 왜 관심을?”
일본놈들의 한반도 침략 빌미가 되는 사건이, 이번 주말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걸 막으려면 뭔가 해봐야 하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관할 길드가 손 놓고 있는 던전이라면, 제가 들어가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요.”
“네? 하지만 거긴 이미 스무 명이 들어가서 한 명도 빠져나오지 못한…”
“아,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당장 들어가겠다는 게 아니라 자료 조사하는 거니까요.”
“아, 네.”
“그러니까 최 대리님, 관할 길드가 손 놓고 있는 다른 던전에 관해서도 조사를 좀 부탁드릴게요.”
“맡겨만 주세요. 이준기 구원자님 부탁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네? 왜요?”
“다른 분들과 다르시잖아요. 구원자신데도 겸손하시고, 말씀도 막 하시지 않고요. 다른 분들은 일반인 직원을 마치 머슴 대하듯 대하는데…”
이준기는 잠깐 생각했다.
혹시 나도, 회귀 전에는 저렇게 행동했던 것 아닐까.
“감사합니다, 최 대리님. 말씀드리는 김에, 부탁 하나만 더 드릴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