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준기 오빠, 반가워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문아린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준기를 발견하고 뛰어왔다.
“준기 오빠, 사무실이 여기니까, 아침에 뭔가 준비하실 것 같아서 왔는데. 딱 계시네요. 역시, 제가 촉이 좋죠?”
“반갑다. 아린아. 커피 마실래? 2천…”
“2천만 원짜리 커피 머신입니다.”
최정윤이 다가오며 큰 소리로 말했다.
“뭐 드실래요? 아메리카노, 라테, 에스프레소. 다 됩니다.”
“라테 주세요! 감사합니다.”
서로 바라보며 웃고 있지만, 왠지 공기 중에 스파크가 튀는 것 같았다.
최정윤이 커피 머신 쪽으로 가자, 문아린이 테이블 건너편에서 이쪽으로 건너왔다.
“일하시는 거예요? 랩탑으로?”
“응. 늘 정리하는 습관이 있어서.”
“뭘 정리해요?”
“뭐든지. 던전 특성이라든가, 몬스터 공격 패턴…”
“우아! 그런 게 기억이 나요?”
“기억나는 데까지만 적는 거지.”
최정윤이 커피를 가지고 와서, 테이블에 놓았다.
지금 문아린이 앉은 자리가 아니라, 아까 문아린이 앉아 있던 테이블 맞은편에.
“고맙습니다, 언니!”
그렇게 말하고 문아린은 커피 머그를 집어 지금 앉은 자리로 가져왔다.
이준기 바로 옆자리로.
“이준기 구원자님, 다른 자료 필요하신 것 있나요?” 최정윤이 물었다.
“아뇨. 이제 준비하고 들어가야죠. 감사합니다, 최 대리님.”
“네. 수고하셨어요, 최 대리님!”
문아린의 감사 인사는 마치 얼른 꺼지라는 말 같이 들렸다.
“다른 분들은요? 여기가 연합 길드 사무실 맞죠?” 문아린이 고개를 돌려 이준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응. 여기가 맞지. 아마, 차원문으로 직접 오시겠지?”
“그게 편한가? 나 같으면, 사무실 잠깐 들르겠네.”
“근데, 여기는 왜 왔어?”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준기가 물었다.
“준기 오빠 보고 싶어서 왔죠.”
“B급 던전인데, 긴장도 안 돼? 그런 농담할 여유가 다 있고.”
“사실, 긴장이 돼서 온 거예요. 준기 오빠가 공부한 거 있음, 좀 들어보려고요. 정보 좀 주세요.”
이준기는 잠깐 고민했다.
공격대 명단에서 문아린의 이름을 본 순간부터 한 고민이다.
한 명이나 두 명을 포섭해서 팀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익숙한 솔로잉을 할 것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린아.”
***
구원자들이 차원문 입장 시각으로 가장 선호한다는 오전 11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문아린과 이준기는 10시 55분에 사무실을 나와 길을 건넜다.
종각역 사거리 한복판에 문아린의 빨간색 머시디즈를 중심으로 고급 차 다섯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지각생은 두 명.
“안녕하세요, 이준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마상욱입니다. 26레벨입니다.”
“하민서고요, 25레벨 딜러예요.”
“코리아 길드 김형챕니다. 준기 씨, 구면이죠? 반가워요.”
“소현배라고 합니다. 26레벨. 문경새재 길드 소속입니다. 형채 씨, 아린 씨, 준기 씨,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문아린이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통성명이 끝날 때쯤, 페라리 한 대가 광화문 쪽에서 질주를 해왔다.
차 창문을 열고 신분증을 보여 2중으로 쳐진 전경들의 벽을 열게 한 그 차는, 다른 차들과 마찬가지로 종각역 사거리 한복판까지 들어와서 멈춰 섰다.
“준기 씨 일찍 오셨군요. 여러분 안녕하세요. 한택수라고 합니다. 25레벨이고요. 탱커입니다. 오늘은 어차피 정찰대라 탱힐딜 이런 거 별로 중요하지는 않겠지만요. 제가 제일 늦었나요?”
“아뇨. 아직 한 분이 안 오셨는데.”
그때, 종로2가 쪽에서 자전거가 나타났다.
초록색 따릉이.
누가 보면 경륜 선수라고 생각할 정도로 전력을 다해 페달을 밟고 있었다.
자전거를 거치대에 허겁지겁 반납하고 뛰어오는 대학생 스타일의 남자.
“으아, 이거 헬멧을 안 벗고 왔네. 잠깐만요.”
헬멧을 벗자, 붉은색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렸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종각역이 폐쇄된 걸 모르고 지하철로 왔다가 종로 3가에서 내려서 자전거 타고 오느라 늦었어요. 죽을죄를 졌습니다.”
헬멧을 옆구리에 끼고 남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돌아가며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게 해놓고 오히려 이쪽이 미안해지는 상황.
사람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땀 좀 닦으시고.”
“헬멧도 두고 오셔야죠.”
“와앗, 원빈이닷.”
“종각역이 폐쇄돼서 그런 거니까, 이해합니다.”
고개를 든 그 남자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릴리언트 길드, 주석입니다!”
***
섬이다.
해안가의 하얀 모래 위로 풀썩 엎어지면서 던전 안으로 던져진 이준기.
재빨리 일어서서 근처의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양쪽으로 시야가 터진 해안가에는 몬스터가 보이지 않는다.
FFA 포맷이라면 몬스터는 매우 성기게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조심하는 것이 언제나 최선이다.
FFA 포맷도 자주 경험했고, 섬도 자주 경험한 이준기였지만, FFA 포맷과 섬이 겹친 경우는 처음이다.
섬 맵은 일반적인 던전보다 큰 것이 보통이므로, 생각보다 장기전이 될 상황.
한 시간 전, 사무실에서 문아린에게 괜한 말을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아린아.”
“네, 준기 오빠.”
“FFA는 ‘프리포올’일거야 아마.”
“다들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걱정하시는 분들도 많고.”
“이 던전은 구원자들끼리 서로 공격을 하도록 유도할 거야.”
“네? 정말요?”
“그냥 추측이기는 한데, 지금까지 내가 추측한 게 거의 다 맞아서 말이지. 나름대로 공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추측한 거니까.”
“그럼 어떻게 해요?”
“네가 나를 믿는다면, 맵의 북쪽 끝에서 만나자.”
“물론 오빠를 믿어요!”
“맵 중앙에서 최북단, 그러니까 맵 화면을 세로로 삼등분했을 때, 가운데 토막에서 제일 북쪽을 찾아. 거기에서 보자.”
이준기는 바위 뒤에서 나와 해안가 둔덕을 넘어갔다.
키 작은 나무와 무성한 풀이 섞인 지대에서 몸을 적당히 숨긴 뒤, 맵이 밝혀진 정도를 확인했다.
‘역시. 섬 맵답게 상당히 넓다. 평균 맵 넓이의 4배는 될 거 같은데.’
맵에 따르면 이준기의 현재 위치는 북서쪽 해안.
북쪽 끝이 정확히 어디쯤 될지는 지도를 밝혀야 알 수 있겠지만, 문아린과 약속한 장소까지 멀지는 않다.
변수는 두 가지.
문아린, 그리고 다른 멤버들의 위치다.
FFA 포맷에서 시작 위치는 그야말로 랜덤이다.
8명 전원이 이 근처에 떨궈졌을 가능성도 제로는 아니다.
샤캉!
‘올 것이 왔군.’
상태창에 메시지가 떴다.
- 첫 번째 미션입니다. 공격대 멤버 한 사람을 죽여주세요.
- 미션 클리어 조건: 공격대 멤버 1인 이상 사망.
- 보상: 레벨업, 에픽 보상 상자.
장혁수 같은 사이코패스가 아니더라도 눈이 돌아갈 보상이다.
겨우 한 명을 죽이면 레벨도 올리고 에픽 아이템을 먹을 수 있다.
샤킹!
또다시 알림 메시지가 떴다.
- 아이템 상점입니다. 보급품, 힐링 포션, 그리고 랜덤 아이템의 행운이!
- 메뉴: 보급품, 소모품, 랜덤 아이템.
미션이 새로 열릴 때마다 나타나는 아이템 상점이다.
최대한 더티하게 데스매치를 벌이라는 주최 측의 배려다.
힐링 포션을 모조리 소비하는, 유혈극을 벌이라는 것.
게다가 사행성을 조장하는 랜덤 아이템 뽑기라니.
뽑기 확률조차 나와 있지 않다.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이준기는 랜덤 아이템을 클릭했다.
- 20골드입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예’를 클릭.
- 두구두구두구!
- 짜잔!
- 축하합니다. 좋은 아이템이군요!
- 섬광탄.
- 사용 효과: 반경 10미터 이내의 모든 적을 10초 동안 무력화합니다. 섬광탄의 영향을 받은 적은 앞이 보이지도, 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무려 10초 동안이나 그렇다는 거죠!
- 사정거리: 20미터.
- 주의 사항: 던전 밖으로 가지고 나가려고 하면, 소멸해 버린답니다. 이번 미션이 끝나도 마찬가지고요. 아끼지 마시고, 이번 미션에 무조건 쓰세요!
설명대로 상당히 좋은 아이템이다.
FFA용 아이템은 다 쓸만하지만, 그중에서도 상급.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사용할 수도 있고, 적을 기습할 때도 좋다.
식량 팩, 힐링 포션 등 소모품을 챙기고, 이준기는 맵의 북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평소와는 다른 음향 효과와 함께 ‘미션’이라는 것이 상태창에 출력되었다.
소현배는 눈을 의심했다.
‘정말로, 한 명을 죽여야 한다고?’
소현배가 이번 던전 탐색조에 참여를 자청한 이유는 이준기였다.
남궁훤이 가지고 있다가 장혁수에게, 그리고 이준기에게 넘어간 에픽 무기, 오캄.
그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억울해서 잠을 깨고는 했다.
애초에 남궁훤을 처단했을 때, 오캄은 소현배의 소유가 되었어야 했다.
그걸 공격대장이 장혁수에게 넘기는 바람에, 이제는 이상한 녀석의 소유가 되었다.
FFA, 즉 프리포올이라는 차원문 명칭을 보고 혹시나 했던 것인데, 던전 안에 들어오니 아예 미션이라는 이름으로 동료를 처단하라고 한다.
'내가 레벨이 제일 높다. 게다가 난 스나이퍼다. 기습이라면 자신 있다.'
양민 학살이 미션이라니, 게다가 구원자들이 상대라니.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게다가, 남들은 모르는 무기가 내게는 있다.'
소현배는 상황을 정리하려고 기억을 되짚었다.
공격대 여덟 명이 모두 상태창을 클릭하고 난 다음에야 던전으로 들어왔다.
상태창 클릭 후 잠깐 동안 눈부시게 빛나는 공간을 거치는 것은 평소와 마찬가지.
그러나 나와보고 나니, 평소의 오두막이 아니었다.
수풀 속이었다.
바다 냄새, 기러기 소리, 그리고 파도가 해안가에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지도를 살펴보니 맵의 서쪽 중앙이다.
처음부터 앉은키를 넘어가는 수풀 때문에 자연스럽게 엄폐 상태에서 시작했다.
조금 주변을 정찰해 보았으나, 몬스터를 발견하지 못했다.
미션 내용으로 보더라도, 이번 던전은 몬스터 사냥이 아니라 구원자들끼리의 혈투인 것 같다.
꺼림칙하긴 하지만 마음속으로 은근히 원했던 그런 포맷.
지난번 공격대를 함께했던 동료다.
미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이게 현실이다.
소현배는 이번 던전 목표를 확실하게 정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