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에 입장하자마자 눈에 뜨인 것은 바다, 그리고 모래사장.
잠시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다가 여기가 던전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늘 보던 오두막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
‘문아린, 뭐야! 정신 차려!’
종각역 사거리에 차원문이 생겼다는 뉴스를 듣자, 문아린은 이준기 생각을 했다.
종각역이라면, 이준기 소속 길드, 충무공의 사무실이 있는 종로타워 바로 앞이다.
레벨은 낮았지만, 침착하고 노련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구원자, 이준기.
멋지고 신비한 느낌의 남자.
수려한 외모, 신중한 말투, 무엇보다 레벨을 뛰어넘는 실력에 그녀는 끌렸다.
그를 따라다니면 적어도 던전에서 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동료로서, 아니 그 이상으로 알고 싶었다.
종각역 차원문이 한국 최초 B급 던전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만 해도 그곳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퇴각 페널티가 인내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관할 길드로 내정된 충무공-탑픽 연합 길드는 내부적으로 사람을 모았다.
그러나 최소 입장 인원인 여덟 자리를 다 채우지는 못했다.
도움 요청을 받은 협회는 정찰조 투입이라는 형태로 1차 탐색을 추진했다.
정찰조에 지원하는 사람들에게 인당 100골드의 비용을 대주겠다는 것.
시가로 1억 원. 절대 적은 돈이 아니다.
하지만 1억 원이 1레벨 강등에 대한 대가로 충분한가?
구원자 신분을 빌미로 정부 지원금이나 받아먹으며 빈둥대는 삶을 추구하는 경우라면 1억 원은 충분한 미끼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20레벨 이상의 중견 구원자라면, 1레벨 강등을 겨우 1억 원으로 퉁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셈이 맞지 않는다.
‘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준기 오빠와 다시 한 팀이 되어보고 싶어서, 들어온 건데.’
조금 일찍 도착해서 종로타워 충무공-탑픽 사무실에 들어갔다.
이준기는 랩탑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니까, 그렇게 많이 아는 거구나.’
사무직원이라는 여자가 왠지 견제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이준기와 함께 나란히 앉아 마시는 커피가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준기가 그녀를 신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기뻤다.
공격대 멤버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경우라도, 그녀를 믿겠다고 말했다.
이번 던전은 공격대 멤버들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이준기는 말했다.
공격대의 반 정도는 죽어야 하는 포맷일 것이라고.
“그러니까, 아린아. 만약 네가 나를 신뢰한다면, 던전 안에 입장한 다음에, 맵의 북쪽 끝에서 보자.”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함께 던전에 들어가는 거잖아요?”
“생각해 봐. 서로 죽여야 하는 포맷이라면, 처음에 한곳에 모아놓고 시작할 리가 없잖아.”
“아, 그렇군요.”
“차원문 안쪽에서는 뭐든지 가능해. 아마, 던전 안에서 모든 멤버들은 다른 위치에서 시작하게 될 거야. 그럴 경우, 네가 나를 믿는다면…”
“북쪽 끝으로 갈게요.” 문아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던전 안쪽에 떨어지고 혼자인 걸 확인하니 마음속에 두려움이 일었다.
그러나 이준기와의 대화를 회상하면서 용기를 냈다.
‘자, 문아린. 침착하게. 이제 움직여보자.’
다행히 주위에 몬스터는 없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문아린은 던전 안에서 혼자 움직여 본 적이 없다.
엄폐물이 없어 휑한 해안가를 나와 내륙 방향으로 움직이니 모래가 높이 쌓인 둔덕이 보였다.
사람 키를 조금 넘기는 높이의 둔덕에는 낮게 자란 풀과 식물이 지저분했다.
그걸 넘어가니 안쪽은 울창한 숲이었다.
사람의 앉은키를 사뿐히 넘는 높이로 풀이 길게 자라 있었다.
앉아서 이동하면 멀리서는 전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둔덕을 넘어, 수풀 사이로 몸을 숨기고 문아린은 지도를 확인했다.
남동쪽 해안가.
북쪽 끝까지는 정말 멀어 보인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카칭!
평소와는 좀 다른 음색의 알림음과 함께 상태창이 켜졌다.
- 첫 번째 미션입니다. 공격대 멤버 한 사람을 죽여주세요.
- 미션 클리어 조건: 공격대 멤버 1인 이상 사망.
- 보상: 레벨업, 에픽 보상 상자.
‘헉.’
이준기의 예상이 또 맞았다.
이번에는 맞지 않기를 바랐건만.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공격대원들이 흩어져 버린 것도 맞았고, 멤버들끼리 서로 죽고 죽여야 하는 상황이 닥친 것도 맞았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던전 안에서 죽어도… 정말로 죽는 걸까?’
던전 안에 홀로 있다는 불안감이 공포로 바뀌었다.
무서워서 눈물이 핑 돌았다.
‘아냐. 정신 차리자, 문아린!’
너무 큰 소리가 나지 않게, 문아린은 양손으로 자기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북쪽으로 가자. 준기 오빠만 찾으면 될 거야. 힘내자, 문아린!’
***
“아니, 왜 또 접니까?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제가 던전에서 나온 지 일주일이나 지났나요? 제가 뭐, 길드 머슴입니까?”
김형채는 빡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마구 불만을 토해냈다.
사상 최초의 B급 던전에 정찰조로 들어가라는 지시를 하는 것은 길드 마스터, 고성하였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해운대’ 던전에서 나온 지 겨우 일주일이 지났다.
그런데 다시 정체불명의 고레벨 던전에 들어가라고?
“김 부장. 그냥 회사 일이라고 생각해. 두둑하게 챙겨줄게. 이상덕 협회장과 이미 얘기가 돼 있다고.”
“뭐, 얼마나 주시는데요?”
“골드로 200 주고, 별도로 2억 원 통장으로 쏴줄게. 사업 빚, 아직 많이 남았지? 이제 겨우 10억 이하로 내려왔던가?”
“8.8억 정도 남았습니다. 남들은 귀족이라고 부르는 구원자가 됐는데도 빚쟁이 신세라니.”
“구원자 됐으니까 빚을 갚기라도 하는 거 아니고?”
그렇게 이죽거리는 고성하의 얼굴을 보니 주먹이 운다.
전 벤처기업 사장이라는 30대 초반의 구원자, 고성하.
그러나 김형채보다 훨씬 센 구원자다. 주먹은 무슨.
약육강식의 세계. 더 강한 짐승 앞에서는 웅크릴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충무공 길드 마스터 권영호가 죽는 바람에, 이제 코리아 길드의 마스터인 고성하가 그를 대신해 전국 랭킹 2위에 올랐다.
25레벨의 김형채도 랭킹 30위권의 실력자.
하지만, 고성하에게 이길 가능성은, 아마 없겠지.
레벨 차이도 심각하지만, 더 심각한 차이는 템빨이다.
지금 한국에 세 개밖에 없는 전설템 중 하나의 소유자가 고성하다.
바로 얼마 전에 김형채가 ‘해운대’에서 낙찰받아 신발, ‘아킬레우스의 샌들’.
치고 빠지는 고성하의 파이팅 스타일과 아주 잘 맞는 최고의 아이템이다.
사상 최초의 2층 던전이라면 뭔가 대단한 아이템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
코리아 길드는 ‘해운대’ 던전에서 나올 아이템을 차지하기 위해서, 길드 차원에서 경매에 대비했다.
김형채에게 길드 소유 골드 전부를 맡긴 것이다.
전설템이라면 무조건 모든 골드를 때려 박아서라도, 낙찰받아 가져오라는 지시.
김형채가 그걸 들고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려고, 뭘 믿고 그런 결정을 했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성하는 안다.
김형채는 전설급 아이템을 노릴 정도로 야망이 크지도 않고, 그걸 들고 튈 정도로 간이 크지도 않다는 것을.
빨리 빚을 다 갚고 다른 게으름뱅이 구원자들처럼 귀족 생활을 하고 싶을 뿐이다.
"빚도 없는 구원자 놈들이 목숨 걸고 던전 들어가는 거,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지."
김형채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렇다고 김형채의 실력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전국 랭킹 30위권을 유지하는, 코리아 길드의 넘버 쓰리.
길드 마스터 고성하의 오른팔이다.
부길마 강명성은 길마인 자신과 맞먹으려 해서,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김형채를 중용하는 것이다.
“오케이 하는 거지, 김 부장? 이상덕 협회장한테 그렇게 연락한다?”
“네, 뭐 어쩔 수 없죠. 이상덕이한테, 1억 원만 더 달라고 좀 해주십쇼.”
“알았어. 역시 내가 믿을 건 김 부장뿐이니까. 이상덕이 팔을 비틀어서라도 내가 1억 원 더 받아낼게.”
“그래서, 임무가 뭡니까? 진짜 임무요.”
“한국 최초의 B급 던전이다. 뭔가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조건이 있을 거야. 그걸 알아보고.”
“그거야 정찰조로 들어가면 기본적으로 하는 거잖습니까. 다른 건 없어요?”
“왜 없겠어. 반협회장 파 트리오, 권영호-전용택-박충기 중에 권영호가 죽었잖아?”
“그랬죠.”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반협회장파 길드에서 나오는 놈이 있으면, 좀 정리를 해줘.”
“네? 사람을 죽이라고요? 또요?”
“공짜로 해달라는 거 아니잖아."
"일반인도 아니고, 구원자를 죽이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들키면 또 어떻게 합니까?"
"남궁훤 그놈처럼 멍청하게 하지만 않으면 절대 문제없어."
그렇게 말하고 나서, 고성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형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너무 많은 구원자는 이 세상에 필요 없어. 우리와 생각이 다른 놈들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그것이 며칠 전 고성하와의 대화.
막상 던전에 들어오고 나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사고를 가장해서 사람을 죽이는 게 어디 쉽나.
김형채는 지시받은 일을 잘하는 스타일이지, 뭘 생각하고 계획하고 하는 것은 영 성미에 맞지 않는다.
카칭!
요상한 알림음과 함께 상태창에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 첫 번째 미션입니다. 공격대 멤버 한 사람을 죽여주세요.
‘에? 이거 좋군. 사고처럼 위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잖아.’
던전 안에 들어갔더니, 사람을 죽이라는 과제가 나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던전을 깨기 위해서 그래야만 했다.
그렇게 말하면 되는 것이다.
‘자, 그럼 누굴 죽일까?’
일이 간단해지자, 의욕이 솟아올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