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3: 규칙이 없는 싸움 (2)
김형채는 생각했다.
충무공, 탑픽, 코리아. 모두 협회장 파벌 길드다.
현재 정찰조로 들어온 여덟 명 중 다섯 명이 이들 길드 소속이다.
그러니까 녀석들은 우리 편이라고 치고.
반협회장 파벌 길드 소속이라면, 신선자의 문아린, 그리고 문경새재의 소현배.
나머지 한 명, 주석의 소속 길드인 브릴리언트는, 아무래도 중립이라고 봐야겠지.
고성하의 입맛에 맞게 하자면, 소현배나 문아린을 죽이면 된다.
“FFA가 뭐겠어? 게임 안 해봤어? 아무나 공격해도 된다, 그게 ‘프리포올’이잖아? 이번 던전은 아마 그걸 거야. 다들 그거라고 예상하면서도 설마 그럴 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게 사실이면 제가 죽이는 입장이라는 보장도 없잖아요? 저쪽도 절 죽이려고 나올 텐데.”
“그렇다면 더 좋은 거지. 저쪽은 다른 구원자를 죽여본 경험이 없을 테니까.”
과연 그럴까?
구원자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장혁수가 대표적인 케이스였지만, 그 외에도 깡패 출신이라는 윤동직, 그리고 박충기의 자객이라는 소문이 도는 소현배가 그런 인물들이다.
평소와 같이 몬스터를 잡으라는 던전이라면, 뒤통수를 치면 된다.
그러나 지금처럼 대놓고 서로 죽이라고 하면, 김형채가 유리할 것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26레벨인 소현배보다는 23레벨인 문아린이 더 쉬운 타깃.
‘그럼, 뭐. 답이 나왔군. 타깃은 문아린이다.’
김형채는 지도를 켜고 위치를 확인했다.
현재 위치는 북동쪽 해안가 부근.
이 넓은 맵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몰라도, 문아린을 찾아야 한다.
‘일단 이걸 써봐야겠군.’
김형채는 인벤토리에 새로 추가된 아이템을 확인했다.
20골드 랜덤 뽑기에서 요란한 축하 음악과 함께 인벤토리로 빨려 들어갔던 아이템.
- 휴대용 슬라임 늪.
- 사용 효과: 휴대용 슬라임 늪은 최고급 덫입니다! 일단 설치해 놓으면, 반경 10미터 내에 적이 나타났을 때 샤샤샥 움직여서 놈의 발목을 잡아 묶어 버립니다. 게다가 사냥감이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알림창으로 알려드리기까지 합니다. 크기는 조그맣지만 늪이랍니다. 절대!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유효 시간 동안만이긴 하지만요!
- 주의 사항: 적의 발을 묶은 휴대용 슬라임 늪은 최대 6시간 동안 지속됩니다. 하지만 발이 묶인 적을 공격하면 곧바로 풀려버려요. 왜냐고요? 그렇지 않으면 너무 재미없잖아요! 그리고 또 주의사항! 이번 미션이 끝나거나, 던전 밖으로 나가면 당연히 이 아이템은 없어진답니다. 순전히 이번 미션을 위한 뽑기 아이템이라고 생각하시고, 아낌없이 사용해 주세요!
‘반경 10미터라니, 나쁘지 않다. 적당한 위치에 심어놔야겠다.’
***
성흔을 가진 사람이 있다.
던전 입구에서 확인한 정보.
공격대원 8명 중에, 이준기를 빼고도 성흔을 가진 구원자가 있다.
소현배.
‘해운대’ 공격대원으로 함께했던 사람이다.
- 26레벨.
- 전문화: 불 8, 물 8, 바람 8, 흙 2.
- 강인함 50. 민첩성 71. 통찰 34. 집중 15. 물리 저항 20. 마력 저항 15.
- 성흔: 그래엄의 축복.
- 획득 스킬: 속성 화살.
- 인벤토리: 다마스커스, 인챈티드 롱보우, 강화 화살 40개. 생존주의자의 흉갑, 숲 장화, 중급 힐링 포션 6개, 기본 식량 팩 4개.
성흔, "그래엄의 축복"의 설명은 이렇다.
- 에픽 등급.
- 구원자에 대한 공격력이 두 배로 증가하고, 구원자를 죽일 경우 얻는 경험치가 5배로 증가합니다.
소현배가 박충기 길드 마스터의 자객이라는 말은 헛소문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지금까지의 던전 포맷과는 전혀 맞지 않는 성흔.
갈등이 심했으리라.
‘저런 성흔을 가졌다는 걸 다른 사람들은 알까? 박충기는 그걸 알고 있을까?’
여러 개의 선택지에서 저런 성흔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마 그냥 주어졌을 것이다.
조슈아 테일러나 이준기처럼 여러 개의 선택지가 주어지고 그중 하나를 고르게 되는 케이스는 대단히 희귀한 경우.
보통은 단 하나의 선택지가 주어진다.
그래서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성흔, 그것이 일반적이다.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면, 그래서 운명처럼 주어졌다면, 그런 성흔이라고 해도 그 보유자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질서를 거역해야 하는 것이 운명이라니, 오히려 불쌍하다고 생각할 여지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건 값싼 감상평에 불과하다.
구원자들끼리 혈투를 벌여야 하는 전장에, 딱 맞는 성흔을 가진 자가 나타났다.
그것이 현실이다.
‘해운대’ 던전에서 아무에게나 어그로를 끌고 다니던 장혁수.
아마 소현배와 싸웠다면 순식간에 패배해서 죽었을 것이다.
소현배 역시 장혁수에게 이를 갈았다.
박충기의 자객 노릇을 하던 게 사실이라면, 장혁수를 죽이지 데 있어 거리낄 것도 없다.
살인이 처음이 아니라는 거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날뛰던 장혁수가 가소로왔으리라.
장혁수의 도발을 내심 반겼을 것이다.
성흔도 마음대로 써보고, 마음에 안 들던 놈도 처단하고, 아이템도 빼앗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테니.
그렇게 생각하면, 소현배가 지금 이를 갈고 있을 대상은 다름 아닌 바로 이준기다.
장혁수 처단으로 얻을 수 있던 그 모든 것을 대신 가져간 이준기니까.
정찰조 명단에서 이준기의 이름을 보고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해운대’ 던전과 함께 ‘한길협 내분 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던 던전, ‘종각’.
원래대로라면, 정찰대 여덟 명이 아무도 나오지 못한 채로 오랫동안 방치된다.
그러나 이미 역사는 바뀌었다.
이미 ‘해운대’ 던전에서 죽었어야 할 소현배가 지금 다른 던전에 들어오기까지 했으니.
FFA 포맷의 던전에서 주도권은 주어진 미션을 깨는 인물에게 주어진다.
이후의 진행 방향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미 장혁수를 죽인 이준기.
구원자를 하나 더 죽인다고 해서 죗값이 많이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몇 달 후부터는 누굴 죽였는지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구원자들을 죽일 운명이다.
최선의 길은, 이준기가 누군가를 죽이고 첫 번째 미션을 클리어하는 것이다.
미션 해결자에게 주어지는 선택지에서 가장 유혈이 적은 방향으로 다음 미션을 선택하는 것.
그러는 와중에 문아린을 보호할 수 있다면 더 좋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최우선 과제는 아니다.
***
“어, 민서 씨!”
“상욱 씨, 어떻게 된 거죠?”
마상욱과 하민서가 마주쳤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입구 오두막이 아니고 그냥 무슨 숲 한가운데로 떨어졌네요.”
“그러게요.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어딨어요?”
“글쎄, 다들 이 근처에 떨어졌을까요?”
“불러볼까요?”
“몬스터들이 덤벼들지도 몰라요. 일단 안전한 곳을 확보하죠.”
던전에 입장하고 나서 보니, 평소와 달리 숲속 한가운데에 있어 하민서는 당황했다.
재빨리 몸을 낮추고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다가, 같은 길드 마상욱과 눈이 마주쳤다.
탑픽 길드에서 예전에 배운 대로 정찰을 하다 보니, 둘이 같은 행동을 한 것이다.
옆에는 거대한 나무가 서 있었다.
양팔을 벌린 사람 스무 명은 있어야 안을 만한 크기의 밑동이다.
얼마나 높은 나무일까 하고 위를 올려다보니, 10층 건물 높이 위치에 통나무집 같은 것이 보였다.
“저것이 혹시, 오크 사원?”
“그럴 수도 있겠는데요. 저런 건물이 그냥 장식은 아니겠죠.”
평소보다 날카로운 색다른 알림음과 함께, 상태창에 미션이 출력되었다.
- 첫 번째 미션입니다. 공격대 멤버 한 사람을 죽여주세요.
- 미션 클리어 조건: 공격대 멤버 1인 이상 사망.
- 보상: 레벨업, 에픽 보상 상자.
“헉!”
둘은 놀라면서 서로에게 떨어졌다.
경계하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미, 민서 씨!”
“사, 상욱 씨, 설마… 절 죽일 생각은 아니겠죠?”
“아, 아녜요! 제가 왜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둘은 의심의 눈빛을 거두지 못한다.
“민서 씨. 미션 내용을 봐요. 한 명만 죽이면 돼요.”
“그,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끼리 이럴 필요 없어요. 힘을 합쳐서 다른 사람을 죽입시다.”
“그, 그럴까요?”
마상욱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규칙을 정해요.”
“규칙요?”
“나는 민서 씨를 믿지만, 민서 씨는 나를 믿을 수 있어요?”
“미, 믿고 싶어요!”
“둘이 가까이 붙어 있어 봐야, 서로 의심만 할 거예요. 그러니까, 2미터 정도 떨어져서 움직여요, 우리.”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