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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May 25. 2018

우리도 매일 걷는다

[서평] 김종건, <50대 청년, 대한민국을 걷다>

예전에 '청년' 백남준이 나오는 TV 광고가 있었다. 당시에 생물학적으로 청년이었던 나는 별 생각 없이 그 광고를 봤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젊음이란 정말 마음속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분들을 보게 된다.

우리 어머님은 환갑이 넘으셔서 뇌과학과 심리학 공부를 시작하셨고, 지금은 웰-다잉(well-dying) 강의를 하신다. 평생 하시던 일과 조금도 상관없는 영역에 도전하시고, 자신보다 스무 살 이상 어린 강사들과 경쟁하며 강의를 따내시는 어머님을 보면서, 백남준이 자신을 청년이라 칭하던 것이 단지 오기나 허세가 아님을 이제는 알 것 같다.

2018년 4월 어느 날, 모르는 분에게 쪽지를 받았다. 최근에 직장을 그만두신 아버님이 우리 국토 1000km를 순례하시고 책을 내셨는데, 관심이 있으면 책을 보내주시겠다는 내용이었다. 출판사 담당자가 아니라 저자의 가족이 직접 연락을 해 온 점도 마음을 움직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겨우 24일 만에 1000km의 거리를 주파해낸 사람에게 청춘은 단지 마음만의 문제는 아닐 거라는 생각에 책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매일의 시작점과 종착점이 정해져 있고, 대개의 경우에는 끼니를 어디에서 때울지까지도 정해 놓은, 매우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저자는 길을 나선다. 첫 시련은 4일 차에 닥친다. 비가 오는 길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다. 이틀 뒤에 청주에 사는 친구 집에서 묵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악천후를 이유로 목표 거리를 줄일 수도 없다.

비를 예상해서 젖은 운동화를 신고 연습해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젖은 운동화를 신고 걷는 것은 누구에게나 익숙지 않다. 운동화와 양말이 젖은 상태에서 오래 걷는 것은 운동화 속에서 발이 미끄러져 걷기에 불편함은 물론 발이 부르트고 테이핑한 것이 떨어지면 물집이 잡힐 수도 있다. (59쪽)

예상치 못한 이야기다. 하루에 60km를 주파하는 아프간식 걷기를 가르치는 <나는 걷는다 고로 존재한다>에도 테이핑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도시 여행만 가도 발이 피곤한데, 24일에 걸친 대장정 도중에 발바닥에 물집이라도 잡힌다면 그건 정말 큰일이다. 저자는 꼼꼼한 테이핑을 통해 그런 위험을 사전에 차단했다. 꼼꼼한 준비에 놀란다.

날씨에 영향을 받는 건 걷기뿐만은 아니다. 서울 근처, 텐트 안에서 잠을 자던 저자는 빗소리에 깬다. 짐 무게를 줄이려고 1.4kg 초경량 텐트를 준비했기에, 큰비라도 오면 위험할 수 있다.

폭우가 쏟아진다면 감당할 수 없다. 특히 질펀한 바닥에서는 도저히 잘 수가 없다. 나는 텐트를 걷기로 했다. 시간을 밤 11시. 텐트를 걷는 중에 빗줄기는 폭우로 변했다. 텐트를 대충 배낭 위에 동여매고 나는 아파트 인근에 있는 사우나로 뛰었다. 결국, 그날 밤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209쪽)

한밤중에 과감하게 텐트를 걷고 피하지 않았다면 아마 불어난 빗물에 텐트와 함께 떠다녔을지도 모르는 일. 회사 다닐 적에도 하지 못했던 과감한 결단이라는 저자의 논평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여행을 방해하는 것은 날씨 외에도 얼마든지 있다. 도시 한복판에서 걸어야 할 때는 차들과 나란히 걷게 된다. 그런데 배낭에 적힌 국토순례라는 커다란 글씨에 아무 느낌도 없는 사람들도 있나 보다. 그만큼 하루하루가 바쁘고 고달픈 사람들이겠지.

어떤 차들은 길가로 걸어가는 나를 보고 자기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맹수의 포효처럼 경적을 울려 대곤 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은 갓길이 충분히 확보되어 있는데도 갑자기 뒤에서 울리는 화물차 경적은 나를 깜짝 놀라게 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97쪽)

북미 원주민 전통 중에는 화가 나면 무작정 걷는 풍속도 있다고 한다. 걷기는 그렇게 화를 녹인다. 그런데 그런 걷기조차 녹이지 못하는 불쾌한 기억도 생기는 법이다. 저자는 그런 기억을 가감 없이 종이 위에 옮겼는데, 가식 없는 인간미가 오히려 돋보인다.

길가 안쪽에 있는 추어탕 집으로 들어갔다. 일요일 낮인데도 손님은 나 혼자뿐이었다. '여유로워서 좋네' 하면서 휴대전화와 보조배터리 충전도 하고 한 시간쯤 쉬다 가자고 생각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보조배터리와 휴대전화를 꺼내 콘센트에 각각 꽂았다. 그런데 주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한 군데는 빼라고 한다. 참으로 인심이 고약했다. (109쪽)

하지만 여행은 좋은 사람들도 만나게 해준다. 비를 피해 들어선 정자에서 만난 여행하는 부부들, 목마른 저자에게 남은 물을 건네주는 캠핑 여행자, 그리고 새벽같이 일어나 남편 친구에게 김밥을 싸주는 친구의 아내.

멋모르고 들른 곳에서 듣는 우연한 이야기가 마음을 움직이기도 한다. 저자의 가슴속에 머물며 오랫동안 그 마음을 환하게 비춰줄 그런 이야기.

언젠가 두 명의 청년이 부산까지 자전거 여행 중이라며 들렸는데 그중 한 젊은이가 나를 보고 혹시 자기 기억 안 나냐고 묻는 거야. 내가 기억날 리가 없지. 근데 글쎄 그 청년이 그때 아버지와 자전거 같이 타고 왔던 중학생이라는 거야. 이젠 커서 군대도 갔다 왔고 대학교 3학년 되었다며 대학 졸업 전 아버지와 함께 왔던 이 길을 자전거로 꼭 한번 다시 와 보고 싶었다며 왔더구먼. 아버지는 자전거 여행 후 7개월 뒤 돌아가셨다는데 그 당시 암 투병 중이셨다고. 죽기 전 늦둥이 아들과 기억에 남는 여행을 꼭 한번 해보고 싶어서 그때 여길 오게 되었다구 하면서 말이야. (124쪽)

마실 물 얻으러 들어간 길가 식당에서 듣는 이야기다. 묻지도 않고 토마토와 참외를 내어주는 할머니 인심에, 저자는 예정에 없이 길게 머물다가 저녁까지 먹게 된다. 이래서 여행을 한다고, 할머니를 오래 기억할 거라고, 저자는 마음속으로 되뇌었을 터다.

24일을 걸어 저자는 최종 목표 지점인 속초에 도착한다. 빗속을 걷기도 하고, 끼니를 거르고, 노숙자와 달걀 두 개를 나눠 먹기도 했다. 22일 째에는, 비가 예보된 이틀 동안 많이 못 갈 것에 대비하여 80km를 뛰기도 한다. 비 핑계가 있기는 해도, 왠지 일 욕심이 남다를 것 같지 않은 필자. 흔하게 볼 수 있는 유형 아닌가? 50대의 나이에 1000km를 걷는다고 해서 괴짜는 아니다.

걷기 여행의 끝자락에서 저자는 무엇을 보았을까? 우리는 거창한 일 뒤에는 뭔가 대단한 결말과 깨달음이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런데 곰곰이 과거를 돌아보면, 실제로 삶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는다. 저자의 깨달음 또한 같다.

다시 세찬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희열도 잠시 허탈감이 밀려왔다. 나는 이번 국토종횡단 1000km 배낭도보 도전을 통해 얻고자 한 게 무언가 잠시 생각했다. 역시 난 아무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끝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했다. 그래서 나는 또 걸을 것이다. (293-294쪽)

저자는 2018년 봄 현재 KOICA 해외봉사단으로 캄보디아에 있다고 한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수많은 샐러리맨들, 그리고 나처럼, 매일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 가족의 얼굴을 보려는 것도 하찮은 목표는 아닐 거다. 한 번뿐인 삶의 또 다른 하루를 걷고, 뛰고, 순례하는 매일이니까. 지금 당장 천리 길을 나서지 못한다고 자책할 일은 아니다. 모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매일을 열심히 사는 것이니까. 우리도 매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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