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9)
고통
우주와 삶의 의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은가. 가장 좋은 출발점은 먼저 고통(pain)을 관찰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이다. (362쪽)
사피엔스는 이야기를 만들고 믿는 능력으로 지금에 이르렀지만, 그로 인해 수많은 고통을 만들어 왔다.
사람들에게 어떤 허구를 정말로 믿게 만들고 싶다면, 그것을 대신해서 희생하는 쪽으로 그들을 유도하라. (336쪽)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허구에 빠져 존재하는 고통을 만들어내고 싶지 않다면, 특히 4개의 단어를 조심해야 한다.
그러니 정치인이 신비로운 용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는 늘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이해하기 힘든 거창한 말 속에 숨기는 방법으로 실제 고통을 위장하고 변명하려 들지 모른다. 특히 다음 네 단어를 조심해야 한다. 희생, 영원, 순수, 구원. 이 중 어떤 단어라도 듣게 되면 경보음을 울려야 한다. (362쪽)
자아의 허구성을 깨닫는 방법은 명상이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개념이 허구인지 알아보는 더 손쉬운 방법이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자.
어떤 거대한 이야기에 직면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실체인지 상상인지 알고 싶다면 핵심 질문 중 하나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당신에게 폴란드 국가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잠시 폴란드가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 (360쪽)
명상 - 오직 관찰하라
책의 끝에 다다랐고, 저자는 해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명상이다.
책 제목을 보자.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이다. 왜 이런 걸 알아야 할까? 바로 우리의 (근)미래이기 때문이다. 왜 미래를 알아야 할까? 제대로 살기 위해서다. 영화 <월-E>에 나오는 미래 인간의 생활이 괜찮아 보인다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이 비참한 미래상은 헉슬리가 이미 <멋진 신세계>에서 제시한 것이지만, 감각이 둔해진 사람들을 위해 픽사 스튜디오가 더 구체적이고 역겹게 묘사해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발 하라리 3부작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피엔스가 지구를 정복한 원동력은 집단 상상력이었다. 허구를 실체로 만들어 사피엔스는 자연을 지배하는 위치로 올라섰다. 이제 사피엔스는 <호모 데우스>가 되어 정보 처리 기계로 진화할 것이다. 이 과정은 필연일까? 이대로 좋은 걸까?
신은 이미 죽었고, 민족 국가는 전 인류 공통 문제를 풀기에 부적절한 허구다. 자유가 존재 이유로 찬양되는 자유주의 세계관에서 제일 중요한 가치는 진실이다. 그러나 진실은 너무 쉽게 왜곡된다. 그런데 진실을 정말 알아야 할까? 진실이 당신의 정체성을 무너뜨려도 좋단 말인가? 정체성은 허구에 기반한 이야기다.
마이클 싱어의 말대로, 우리는 관찰자다. 우리는 체험의 주체가 아니다. 다만 관찰할 뿐이다. 체험에 몰입하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는 자아라는 허상에 부록처럼 딸려 있는 괴로움(suffering)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직 관찰하라.
괴로움의 본질은 실체의 거부입니다. 당신은 어떤 것 — 고통이든 쾌락이든 — 을 경험하면서 그 밖의 것을 바랍니다. 고통을 경험할 때에는 그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쾌락을 경험할 때는 쾌락이 강해지고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실체의 부정이 모든 괴로움의 뿌리입니다. 우리는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스스로 훈련해야 합니다. (3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