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60. 자신감

by 히말

주석은 빛의 터널을 지나 오크 사원으로 들어왔다.

차원문을 통과하여 던전에 진입할 때와 별다를 것이 없었다.


2초 정도, 그런 현란한 빛에 시각이 방해를 받고 나니, 어두침침하게 조명이 밝혀진 구닥다리 건축물 내부가 눈앞에 펼쳐졌다.

높이가 20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


주석은 느긋하게 중앙 홀로 걸어 나왔다.


주석은 살인 미션을 선택했지만, 그 미션을 꼭 깨야 할 필요는 없었다.

이준기와 문아린 파티가 오크 사원을 정리해 준다면, 자신도 던전에서 해방된다.


데스매치 쪽이 더 재미있기는 하지만, 밤잠까지 설쳐가며 할 정도는 아니다.

이준기 쪽이 오크 사원을 정리해 준다면, 그것도 좋다.


던전 바깥으로 나갔을 때, 사람들을 왜 죽였냐고 누가 물어도 할 말은 있다.

미션 내용이 그래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들이 먼저 덤볐다고, 자신은 정당방위를 했을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반박할 증거 따위는 없다.


최악의 경우는 24시간이 지나도록 이준기와 문아린이 어디 숨어서 질질 짜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느 쪽 미션도 해결되지 않으니까, 살아남은 세 명이 전원 사망하는 배드 엔딩이다.


그러나, 2라운드에서 이미 살인을 한 이준기가 그럴 리가 없다.

이준기는 어느 쪽이든 움직일 것이다.

그러므로, 주석은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문아린과 이준기, 누구라도 주석 앞에 나타나 준다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처리하면 된다.

그럴 경우, 주석의 미션, ‘멋진 신세계’가 완료되어 던전이 클리어된다.


그들 중 하나, 또는 둘 다가 오크들과 싸우다가 죽으면?

더 간단하게 미션이 해결된다.

역시 ‘멋진 신세계’, 즉 남은 인원의 50% 이상이 사망하는 것으로 미션이 완결된다.


만약 그 둘이 주석을 사냥하려고 한다면?

누가 사냥꾼이고 누가 사냥감인지 보여주면 된다.


원래 성격이 그렇기도 했지만, 주석에게는 이제 무서운 것이 없었다.

희귀 스킬 '귀검'을 얻고 나서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음, 흠, 큼!”


목을 가다듬기 위한 헛기침을 몇 차례 하고, 주석은 최대한 큰 소리로 외쳤다.


“이준기! 문아린!”


1층 신전의 방대한 공간에 주석의 목소리가 난반사로 메아리쳐 돌아다녔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메아리가 잦아들고 다시 고요가 가라앉았다.

주석은 혼잣말을 했다.


“분명히 여기에 있잖아? 사람이 부르는데 왜 대답을 안 하는 거야?”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주석은 낼 수 있는 최대의 목소리로 다시 외쳤다.


“이준기! 문아린!”


거대한 홀에 다시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


“주석! 여기 퀘 하러 온 거냐? 소리 질러서 오크 사원 무너뜨리는 거야?”


넓은 홀 반대편 기둥 뒤에서, 이준기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

역시, 몬스터들은 깔끔하게 쓸어버린 모양이다.

이준기는 역시 주석이 생각하던 그런 성격이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50미터 정도.

주석이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오, 이준기 선배, 드디어 다시 만나네요. 농담은 좀 썰렁하기는 하지만 반갑습니다. 문 선배는요? 문아린 선배?”


문아린이 기둥 뒤에서 나오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주석.”


“이야, 2대1은 좀 치사하기는 하지만 봐줄게요. 그래도 내가 여기서 최고 레벨이니까요.”

주석이 이죽댔다.


“우린, 여기 미션 거의 다 진행했거든. 2층에 올라가서 몬스터 하나만 잡으면 끝나. 어때? 같이 가겠어?”


주석은 이준기를 잠깐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었다.

이건 뭐, 너무 진지한 성격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아, 그건 흥미로운 제안이네요. 사실 저도 미션 거의 다 진행했거든요. 2라운드 끝나고 다섯 명 중에서, 과반수니까 어디 보자,”

주석은 손가락을 전부 편 오른손을 들어 보인 다음, 손가락 세 개를 왼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2.5명 죽이면 되거든요. 현재까지 2.0명 죽였네요. 0.5만 더하면 되니까, 제가 더 빠를 것 같은데. 어때요?”


“자신감이 넘치는 건 좋지만,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 우린 두 명이거든.”


이준기가 웃으며 응대했지만, 주석도 지지 않았다.


“저, 26레벨이라니까요? <저렙> 두 분이 절 당해낼 거 같아요?”

“우리 둘 레벨 합치면, 44레벨인데?”

“아아, 제발! 이준기 선배. 썰렁한 개그는 그만요.”


“좋아, 그럼. 내가 진지하게 한 가지 제안해도 될까?”

“제안이야 언제든지 환영이죠.”

“1대1 결투로, 어떻게 할지 정하는 거야. 내가 이기면, 사람 죽이는 거 그만두고 오크 사원을 깨는 쪽으로 던전을 클리어하는 거다.”


“아항? 제가 이기면요?”

주석은 불량배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워낙 미소년 얼굴이라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럼 날 죽여. 그럼 네 미션을 깰 수 있겠지.”

“아주 좋은 제안이기는 하네요. 약속이 지켜지냐가 문제겠지만. 문아린 선배가 바로 저어기 있는데, 제가 이 선배를 막 죽이려고 할 때, 가만히 있을까요?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 보세요. 제가 그런 제안을 믿을 상황인지 말이죠.”


“글쎄.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도 괜찮은 제안인데? 넌 기습도 안 하고 우릴 그냥 불렀잖아. 2대1을 각오하고 그렇게 한 거 아냐?”

“각오요? 그건 너무 무거운 단어네요. 그냥 2대1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그런 거죠. 각오가 아니라 무시라고 해야죠.”

“그러니까 도중에 아린이가 약속을 깨고 내 편을 들어도, 원래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불리할 것도 없잖아?”

“아하, 그렇군요. 저한테 아주 유리한 제안이었군요. 그렇다면, 문아린 선배!”


주석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문아린을 불렀다.


“왜?”

“문 선배 생각에도 이게 공정한 것 같습니까?”

“아니. 나는 준기 오빠가 너무 봐준다고 생각해. 살인자는 그냥 죽여도 된다는 게 내 생각이거든.”

“이거, 이거… 여성 구원자분들, 너무 무서워요. 하 선배도 말은 되게 무섭게 하더라고요.”


이준기가 다시 끼어들었다.


“하민서를 죽인 거야?”

“제가 아까 2.0명 죽였다고 말씀드렸잖아요. 2.0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누군가 죽었겠죠.”


하민서를 꼭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이준기는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주석. 꼭 피를 봐야겠어?”

“네. 이 던전은 그런 던전이잖아요?”

“난 그냥 널 때려눕히고 던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재판에 회부할 생각이다. 살인이기는 해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니까.”


주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준기 선배! 그거 진심 아니죠? 재판이라니 어디 재판요?”

“어디 재판이냐니? 너, 외국인이었냐?”

“설마, 저를 일반인들 재판에 넘기겠다는 거예요? 레알?”

“그럼 군사재판에 넘기랴?”


주석이 엄한 표정을 지으며 톤을 낮춘 목소리로, 마치 위협하듯 말했다.


“우린 구원자잖아요. 일반인이 감히 우릴 재판…한다고요?”

“주석. 뭔가 착각이 심하구나. 너나, 나나, 그리고 여기 아린이도 전부, 인간일 뿐이다.”


주석은 생각이라도 하듯 잠깐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든 주석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이준기를 향해 천천히 말했다.


“이. 선. 배.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고리타분하고 짜증 나는 성격이시네요. 좋아요. 죽여드리죠. 혼자든 둘이든 맘대로 덤벼보세요.”


주석의 양쪽 손에 단검이 하나씩 쥐어졌다.


***


지하에서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기계실 쪽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계속되었다.


“쓸데없이 빌딩이 높네요. 한 층 올라가는 계단이 보통 건물 3, 4층 높이인 것 같아요.”

“그러게 말야. 오크가 인간보다 좀 크기는 해도, 건물을 이렇게 높게 지을 이유가 있나?”


만 하루 동안 열심히 움직여서 그런지, 둘 다 계단 오르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걸 겨우 다 올라와서 1층으로 나오려는 순간.


“이준기! 문아린!”


1층의 그 광대한 공간을 주석의 에너지 넘치는 샤우팅이 꽉 채웠다.


“하하. 특이한 사람들 많네.”


이준기의 코멘트에, 이번에는 문아린이 신중하게 한마디 했다.


“괜찮을까요? 몬스터가 듣고 달려온다든가.”

“그럼 오히려 좋을 텐데 말야. 2층 신관실은 문이 두꺼워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릴 거야.”

“타이밍 한번 기하네요. 1층을 다 치웠다는 사실을 알고 저러는 것처럼.”

“아무튼, 재미있는 캐릭터네. 살인자이긴 하지만.”


넓은 공간에 메아리가 가득 차 날아다니니, 주석의 위치를 정확하게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양쪽으로 거대한 기둥들이 도열하고 있는 ‘그랜드 홀’ 한가운데라고 생각이 되었다.


계단에서 이어지는 1층 한쪽 구석에서부터, 둘은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천천히 걸었다.

다시 주석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이준기! 문아린!”


기둥 뒤다.

아마, 텔레포트해서 처음 도착하는 위치 근처.


“훗, 나가봐야겠다. 저렇게 부르는데.”

“도대체 저 자신감의 원천이 뭘까요? 어이없네요.”

“우리가 불살을 맹세한 사람들로 보이나 봐.”

“착각도 심하네요. 오빠는 몰라도 전 절대 아닌데.”


문아린의 단호한 태도에 조금 놀라면서, 이준기는 호응했다.


“난 2라운드 클리어한 공인 살인자인데?”

“쩝. 그렇네요. 제가 살인자랑 함께 있었네요. 하하.”


문아린이 원래의 담백한 표정으로 돌아오자, 이준기가 물었다.


“아린아.”

“네?”

“내가 주석한테 제안을 하나 할 건데, 너도 동의해 줬으면 좋겠다.”

“뭔데요?”


“그냥… 서로 죽이지 말자고 해보려고.”

“그게 되겠어요? 저쪽은 연쇄살인마인데?”

“일단, 제안은 해보려고.”

“알았어요. 주석하고는 처음 얘기해 보는 거니까요.”


“오케이. 그럼 나간다.”

“네.”


이준기는 기둥 바깥으로 나가며 주석에게 소리쳤다.


“주석! 여기 퀘 하러 온 거냐? 소리 질러서 오크 사원 무너뜨리는 거야?”


주석.png 주석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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