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카를로 로벨리,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2)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다양한 방법을 검토한 결과,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질문에 도달한다.
실재란 무엇인가?
또한, 이 질문은 다음 질문과 거의 같은 의미다.
관찰이란 무엇인가?
카를로 로벨리는 답한다.
실재란 관찰이다.
농담이 아니다. 이 책의 결론이 바로 그거다.
내가 여기서 설명하는 양자론의 ‘관계론적’ 해석의 핵심은, 양자론은 양자적 대상이 우리(혹은 ‘관찰’이라는 일을 하는 특별한 실체)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는 발상입니다. 이 이론은 어떤 물리적 대상이 다른 임의의 물리적 대상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기술합니다. 즉, 물리적 대상이 다른 물리적 대상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기술하는 것이죠. (75쪽)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책 제목이 말하듯, 카를로 로벨리는 나 없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실재란 관찰이다. 관찰 없이는 실재란 존재할 수 없다. 실재가 선행하고, 우리가 무언가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는 유아론(solipsism)으로 들린다.
나는 인류가 유아론을 확정적으로 반박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제 한 유명한 물리학자가 유아론이 옳다고 말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대상의 속성은 상호작용하는 순간에만 존재하며, 그 속성이 한 대상과의 관계에서는 실재하지만 다른 대상과의 관계에서는 실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81쪽)
과격한 주장인 만큼, 저자는 반복해서 설명한다. 전자를 예로 들어보자. 전자의 속성이란, 관찰 이전에 의미가 없는 것이다. 관찰 이전에 전자에게 어떤 속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속성은 없다.
그렇다면 묻고 싶어진다. 속성만 없는 것인가? 우리가 관찰하기 전에, 속성은 없어도 전자 그 자체는 존재하는가?
카를로 로벨리가 이 질문에 어떤 답을 줄지는 뻔하다. 속성이 없는 전자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의미가 없다>라는 명제는 카를로 로벨리에게 그냥 <없다>와 동치다.
그래서, 나 없이는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EPR
아인슈타인이 동료 두 명을 얽어매어 양자 얽힘에 대해 딴지를 걸었던 EPR 역설은 유명하다. 1950년대에 이미 John Bell이 유명한 Bell의 부등식을 통해 이 역설의 승자가 누구인지 밝히는 방법을 제시했고, 이후 실험에 의해 닐스 보어가 승자로 정해졌다.
https://brunch.co.kr/@junatul/244
양자 얽힘이 진실이라 밝혀지자, 사람들은 곧바로 초광속 통신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우주의 지름만큼 떨어진 두 광자도 서로 얽혀 있을테니, 그 어떤 시공간도 즉각적인 이 <통신>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물론 이 <통신>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압도적 다수의 사람들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이 얽힘은 애초에 두 광자가 쌍생성할 당시에 발생한 속성인데, 그걸 어떻게 조작하여 메시지를 만든단 말인가.
그런데 카를로 로벨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베이징의 관측 결과가 이메일이나 전화로 비엔나에 도착할 때, 그리고 오직 그때만 비로소 그 결과는 비엔나에서도 현실이 됩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더 이상 먼 곳의 신비한 신호는 존재하지 않지요. 비엔나와 관련해서는, 그 정보가 담긴 신호가 비엔나에 도달하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베이징의 광자 색이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93쪽)
생각해 보자. 우주 한쪽 끝에 전자가 도착했고, 관찰자 A가 그 전자가 업스핀인 것을 확인했다. 이제 얽힘이 진짜인지 확신하고 싶은 그는 우주의 다른 끝에 있는 관찰자 B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이 통신은 아무리 빨라도 빛의 속도일 테니, 느긋하게 기다려 보자. 언젠가, 관찰자 B는 드디어 이 통신을 받고 자기에게 도달한 전자의 스핀을 확인한다. 다운스핀이다. 신나서 그는 그 사실을 다시 관찰자 A에게 알린다.
이쯤 되면 우주가 이미 끝났을 것 같지만, 어쨌든 두 관찰자는 양자 얽힘을 실제로 확인하고 기뻐한다. 해피 엔딩이다.
카를로 로벨리가 말하는 것은, 관찰자 A와 B가 각자의 관측 결과를 공유하기 전까지, 두 전자의 얽힘이란 실재가 없다는 얘기다.
주목할 점은, 바로 이 시점에서 카를로 로벨리가 유아론을 벗어난다는 점이다.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이 객관성이며, 실재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인식에 갇혀 있지만, 소통을 통해 우주가 실재함을 확인한다.
양자론의 문법에는 이러한 정합성이 갖추어져 있으며, 이것이 상호주관성의 기반이 되어 우리의 공통된 세계상의 객관성을 뒷받침합니다. 서로 대화하는 우리 모두에게, 나비의 날개색은 늘 같은 색인 것입니다. (97쪽)
***계속***